제573화
저 너머에 있는 여자가 넘어오려 한다.
분노에 찬 얼굴로 걸어오는 여자.
그때 무극자 사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자야. 뒤로 물러나거라.]
“그럴 수 없어요.”
[지금의 네 경지로는 경아를 이기지 못하느니라. 거기다가 다른 놈들까지 있지 않느냐.]
무극자가 답답해했다.
객기를 부린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주경아는 마왕이 됐다.
마계의 왕.
신계의 4대 신 중 한 명이었다.
아무리 이준이 강하더라도.
자신의 뒤를 이을 고금제일인이더라도.
신, 그것도 4대 신계의 왕은 이길 수 없었다.
물론 이준이 탈신경의 경지에 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겠지만.
현재로선 어림도 없었다.
[답답한지고. 뒤로 물러날 때도 있어야 되는 법이니라.]
참 말 잘듣는 제자였다.
그 어떤 적을 만나도 등을 보이면 안된다고 가르쳤다.
혼원은 홀로 우뚝 서 있는 존재.
만약 주인이 적에게 꼬리를 말고 도망친다면 혼원은 더 이상 도와주려하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뒤로 몸을 빼야 했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신선이나 야차들이 도착하기 전에 부딪히면 안 됐다.
그만큼 상대가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러던 그때 이준이 뜻밖의 말을 했다.
“저도 사부님 말씀을 듣고 싶은데 몸이 안 움직이네요.”
지금 이곳에 서 있는 건 이준의 뜻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무슨 말이냐.]
“다리가 안 움직여요.”
[어디 이상이 생긴 거냐.]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마주를 본 직후부터 이래요.”
이준도 무극자의 말을 듣고 싶었다.
저 많은 인원을 상대하는 건 자살 행위.
특히 마왕이 된 마주와 싸우는 건 미친짓이었다.
경지를 더 올리고 싸우면 모를까.
지금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몸이 안 움직이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기도 했다.
바로 천살성 때문.
심연에 잠든 천살성이 몸을 돌리는 걸 거부했다.
그래서 함부로 물러날 수 없었다.
만약 여기서 몸을 뺀다면 혼원신공과 더불어 천살성까지.
자신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무극자 사부에게는 이 말을 하지 않았다.
천살성이 또 눈을 뜨려한다는 걸 알면 사부가 걱정하지 않을까.
아직은 천살성이 심연에 가라앉아 있기에 이 말은 뺐다.
[몸이 얼어붙었나보구나.]
사부의 호통이 들려오지 않았다.
[혼원신공을 돌리며 긴장을 풀거라. 나머진 혼원신공이 알아서 해줄 것이니라.]
되려 안심을 시켜주었다.
마주가 게이트를 넘어오려고 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뭘 잘못 드셨나.
꼬장꼬장한 사부가 아니었다.
[조금만 있어보거라 네게 도움이 될 자들을 내려보내주마.]
사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이 움직였다.
그 즉시 퇴보를 밟았다.
마계수와 멀리 떨어진 거리.
게이트 안에서 사라졌던 마주가 인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마족들이 대거 등장했다.
그럴수록 마계수가 말라비틀어졌다.
가득 열렸던 열매.
윤기 났던 나무가 마기를 잔뜩 뿌리고 있었는데 그 기운이 시들시들해졌다.
마계수의 기운을 통해 인계로 내려온 마족 때문.
마계수가 소멸 직전까지 왔다.
그러던 그때였다.
마주가 이준을 확인한 후, 몸을 돌려 마계수로 갔다.
그녀가 마계수에 손을 얹자.
비틀어져가던 나무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뿐인가.
전보다 더 강력하고 음침한 마기가 마계수에서 흘렀다.
이게 바로 마왕의 힘.
마왕이 함께 싸운다면 마족의 힘이 배로 증가한다는 걸 증명하는 장면이었다.
“저자를 당장 내 앞에 무릎 꿇리세요.”
그녀의 명령에 붉은 머리를 한 남자, 분노의 군주 페나 비아키가 고개짓을 했다.
그러자 분노의 군단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이준을 향해 공격을 가하려는 순간.
주변에 빛이 번쩍였다.
빛이 사라지자 나타난 이들.
모두가 하얀 도포 자락을 휘날리고 있었다.
[때마침 도착했구나.]
‘저들이 누구에요?’
[널 도와줄 아군, 신선들이니라.]
‘신선들이요?’
이준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신선들이라면 신 아닌가.
마족에 이어 신선까지 나타났다.
이곳에서 아예 전쟁을 하려나 보다.
[저들과 함께 싸우면 적어도 힘없이 밀리진 않을 것이다. 곧 지옥의 나찰과 야차도 내려올 것이다.]
‘아예 결판을 지으려나보네요.’
신들의 전쟁이었다.
미국의 땅덩어리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남아 돌까.
칼질 한 번에 대륙이 날아가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이준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에게 한 여자가 다가왔다.
“안녕? 네가 이준이구나. 위에서 많이 봤어.”
“그쪽도 신선이에요?”
“안 그래도 보여?”
“선녀 같아 보여서 물어본 거예요.”
정말 예뻤다.
천사, 선녀가 있다면 딱 이 여자를 말하는 것 같았다.
인간의 미와는 다른 아름다움이랄까.
그녀를 봄으로 눈이 또 한번 개안하는 느낌이었다.
이준은 뇌를 거치지 않고 말했지만.
뇌문의 여신선, 연아린은 웃음을 보이며 좋아했다.
“호호호. 싸움만 잘할 줄 알았더니 여자를 기분 좋게 하는 것도 잘하는구나?”
많은 신선이 그녀를 흠모했다.
당연한 일.
신선계에서 제일의 미녀가 그녀였으니까.
예쁘다는 말을 하도 들어서 감응이 없었으나.
인간에게, 그것도 신선제의 제자에게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진 연아린이었다.
“그런데 왜 어르신은 너를 걱정하는 걸까?”
“어르신이요?”
“네 사부님 말이야.”
“아아. 사부님이요. 신경쓰지 마세요. 원래부터 잔걱정이 많으신 양반이세요. 그보다 사부님은 안 내려와요?”
“신선제께서 인계에 강림하려면 많은 조건이 필요해. 그래서 우리들만 내려 보낸 거야.”
“아쉽네요. 그쵸?”
이준은 무극자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좀 전까지 들렸던 사부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사부님?”
이준이 무극자를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연아린이 궁금증을 해결해줬다.
“지금은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거야. 우릴 내려보내서 잠시 소통이 끊길 거거든.”
신계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원래라면 이준에게 영혼을 보낸 것도 규칙 위반.
하나 파천혈신이 잠자코 신선제를 맡아주니 신계도 배려를 해준 것이다.
딱 이것까지.
대신 지금과와 같이 제약을 줄 때가 있었다.
정말 뜬금없는 제약에 이준이 비꼬면서 말했다.
“신계는 참 유도리가 없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연아린도 동의하는 내용이었다.
참 쓸데없는 곳에서 가하는 제약이 많았다.
“뇌문. 그만 이야기하고 마족을 맞이해야할 것 같소.”
무극자에게 최상위 신선들이 거의 죽었다.
대부분 새로 교체된 최상위 신선들.
기존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신선들이 있다고는 하나.
연아린만큼 강하지도 그렇다고 서열이 높지도 않았다.
이곳에선 그녀가 우두머리.
모두가 그녀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너무 반가워서 말이에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는 신선들이었다.
그들도 이준이 어떤 인간인지 안다.
특히 신선제의 제자.
이 하나만으로 온통 관심이 쏠렸다.
하나 눈앞에는 마족이 있었다.
그것도 마계의 마왕이.
한눈을 팔았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 몰랐다.
연아린이 걸음을 옮겨 제일 앞으로 나갔다.
“무슨 생각으로 왕의 권한을 사용한 거죠? 당신이 인계에 내려오면 저희들이 가만히 있을 줄 알았나요? 곧 천계도 움직일 거예요.”
“상관 없어. 내가 바라는 건 파멸뿐. 인계든 신계든 마계의 발 아래에 꿇릴 생각이야.”
주경아의 눈동자가 온통 검었다.
마계수를 만진 후부터 나온 현상.
그녀의 이성이 완전히 날아간듯 보였다.
그러면서도 본능적으로 이준을 찾았다.
“죽이세요.”
그녀가 다시금 분노의 군주에게 명령을 내렸다.
멈췄던 군단이 이준과 신선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신선과 마족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신선들의 무력은 경악스러웠다.
“컥!”
그들의 우아한 검무가 분노 군단을 사정없이 갈라놓았다.
엄청난 위용.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마족들이 죽어 나갔다.
이곳은 마계수가 있는 장소.
심지어 근처에 마왕까지 있었다.
마족으로서 싸움하기 가장 좋은 조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선들이 압도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분노의 군주, 페나 비아키가 경악했다.
“저, 저게 무슨 광경이란 말이오.”
질투의 군주 하몬 레탄 또한 페나 비아키와 같은 표정이었다.
“무공이란게… 저렇게 강했다니.”
“내가 그래서 방심하면 안된다고 하지 않았나.”
알제스 루퍼는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또한 무공을 익힌 입장.
백무생의 기억이 고스란이 있어서 그런가.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뛰어났다.
당연히 무공을 익힌 신선들이 마족 군단을 쓸어버릴 걸 예상했다.
‘하지만 난 무공과 마법을 동시에 익히고 있지. 너희들이 하찮은 하급 마족을 가볍게 쓸어버린다고 해도 나는 못 이길 테다. 크크.’
알제스 루퍼가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그는 가소롭다는 얼굴로 앞을 보며 말했다.
“마왕께서도 무공을 익히셨다는 걸 잊지 말게. 무공을 폄하하는 건 마왕을 무시하는 일. 말을 함부로 해선 안 되네”
“깜빡했습니다.”
“워낙 흑마력도 잘 다루셔서 그만…”
하몬 레탄과 페나 비아키가 조심스럽게 주경아의 눈치를 봤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아 하는 얼굴이었다.
그때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질투 군단도 보내세요.”
“예.”
하몬 레탄의 손짓에 질투 군단이 움직였다.
다양한 마물이 존재했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몬스터는 단연 데스 템플러였다.
자연과 동화하여 자신의 기척을 감추는 몬스터.
이동 속도도 빠르기까지 했다.
신선들을 향해 은밀히 접근해서 기습을 가하려는 찰나.
쾅!
하늘에서 거대한 뇌전이 떨어졌다.
“모두 긴장을 놓지 마세요. 생각보다 귀찮은 마물이 섞여 있어요.”
연아린이 아니었다면 하급 신선들은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으리라.
“벌써 시작 됐나.”
허공 수 많은 이들이 새로 나타났다.
남자들은 금강저를 들고 이었다.
지옥계를 수호하는 자들 중 하나인 야차였다.
“신선들한테 전공을 뺏길 순 없지. 나찰들은 흉악한 놈들을 징벌한다!”
“네 큰 언니!”
나찰들이 마계 군단을 향해 쇄도했다.
그녀들이 든 무기는 지옥창이었다.
나찰들의 창에 찔리면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진다 하여 붙여졌다.
“우리도 가자.”
야차들도 싸움에 합세했다.
안 그래도 신선들이 싸움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찰과 야차까지 신선들을 도와주니 마계 군단이 속절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내가 너희 때문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큰 부상을 입어 지옥계로 갔던 케로베로스.
삼두가 인계에 모습을 보였다.
삼두의 몸집은 작지 않았다.
거대화한 상태.
거기다가 지옥의 화염인 암화를 두르고 있었다.
전과는 달라진 중압감.
지옥계 서열 공동 2위에 달하는 삼두가 제약을 완전히 푼 채 내려 왔다.
[마계 놈들 내가 누군지 똑똑히 보여주마.]
삼두가 이를 갈았다.
한편 주경아는 알제스 루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만의 군단도 보내세요.”
“알겠습니다.”
그는 자기 군단을 순순히 내보냈다.
적에게 죽을 걸 알지만 주경아를 비롯한 군주의 얼굴은 평온했다.
마치 자신들의 뜻대로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저들이 죽으면 바로 마계수를 터트리세요.”
“인계에 마계수를 터트리면 어떤 변화가 올지 기대가 됩니다.”
하몬 레탄이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오랜만에 마계수를 터트린다.
오직 마왕이 존재할 때만 실행할 수 있는 일.
천계와 싸울 때도 마계수를 터트리진 못했다.
그때는 마왕의 자리가 공석이었으니까.
인계에서 마계수를 터트린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말 기대되는 군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