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2화
마주 주경아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뭐… 지?’
게이트 너머의 남자를 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뭘까.
왜 이러는 걸까.
구천옥에서 억겁의 세월을 보내면서 감정이 말살되었다.
그 어떤 동요도.
심장이 뛰는 일도 없을 거라 여겼건만.
‘왜 저 남자에게서….’
주경아가 이준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럴수록 심장이 요동쳤다.
긴장된 몸.
더부룩한 속.
오한이 든 듯 떨리는 몸.
거기다가 식은땀도 흘렀다.
‘인간치고는 강해 보이긴 하지만 위험해 보이지 않아.’
그녀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느낀 감정이라 낯설었다. 마치 인간이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랄까.
다신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다.
갑자기 기분이 확 내려갔다.
상대가 위험하면 모를까.
약관(20살)이나 되어 보이는 청년에게서 뜻하지 않는 감정을 느낀 것이다.
주경아의 이상함을 눈치챈 알제스 루퍼가 말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입니다.”
그녀의 상태가 이상했다.
마계로 와서 단 한차례도 보이지 않았던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심지어 기운을 통제하고 있지 못했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기.
파멸적인 마기는 아니었으나.
마족에게는 재앙과 같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물론 마족들은 마왕이된 그녀가 과시를 한다고 생각했다.
마족을 통제하는데 있어서 강한 힘만 한 건 없었으니까.
“괜찮아요.”
주경아가 감정을 급히 숨겼다.
마기를 갈무리하려고 내공을 돌렸다.
두근거리던 심장도 차츰 진정됐다.
잔떨림도 마찬가지.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그녀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알제스 루퍼의 한쪽 입꼬리가 순간적으로 올라갔다.
‘마왕이 그것도 구천옥에 있던 주경아가 감정을 내보였다. 재밌군. 저놈이 설극의 무공을 계승한 것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
주경아는 이준이 보인 기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낀 감정에 신경이 뺏긴 상태였다.
“마왕. 저 인간이 지닌 기운이 심상치 않습니다. 언뜻 보기에 마기로 보이지 않습니까?”
알제스 루퍼는 일부러 이준의 무극기를 가리켰다.
주경아도 그제야 이준이 뿜어내는 기운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 옛날 설극이 보이던 기운 아닌가.
무언가 많이 달라 보이긴 하나.
분명 설극이 무림맹를 도륙할 때 뿜어내던 기운이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알제스 루퍼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역시나! 예상했던 얼굴이다. 구천옥에서 죽은 감정이 되살아나고 있어.’
오만의 주인이자 군주인 그가 주경아에게 고개를 숙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자신을 대신해서 신계의 율법을 감당할 자를 내세운 것.
인계든 4대 신계든.
전쟁을 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특히 4대 왕에게는 권한이 부여된다.
그녀가 이 권한을 사용해서 전쟁을 일으킨다면 더없이 좋았다.
왕의 권한은 단 한 번.
전쟁에서 이기면 다행이지만 지면 권좌는 물론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다.
왕의 권한은 최대한 아껴 쓰는 게 이득.
하나 주경아는 왕의 권한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설극, 파천혈신에게 복수하는 게 전부였다.
‘네가 왕의 권한을 사용해서 세상을 도탄에 빠트려라. 나머진 너 대신 내가 마무리를 짓겠다. 크크.’
주경아가 파천혈신까지 없애주면 금상첨화.
그게 아니더라도 서로 끝까지 물고 뜯어주기만 해도 좋았다.
두 사람을 동시에 처리하면 신계에서 자신을 막을 자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설…극!”
주경아의 눈동자가 검게 물들었다.
몸에선 마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졌다.
마왕의 마력.
마계에서 가장 강한 마족만이 뿜어낼 수 있는 흑마력이었다.
이를 느낀 알제스 루퍼가 인상을 찌푸렸다.
‘마왕의 흑마력! 이 빌어먹을 몸뚱이가 반응하고 있다.’
마계는 전형적인 마교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약육강식.
강한 마족만이 마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들을 통제하는 게 바로 가주들.
이 가주들 머리 꼭대기에 있는 게 바로 마왕이었다.
마교로 비유하자면 왕은 천마였다.
천마가 마인들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천마신공 때문.
천마신공의 마기는 마인을 속박했다.
스스로 복종하고 무릎 꿇게 만들었다.
마계 또한 마교와 마찬가지.
마왕의 흑마력은 마족을 통제했다.
알제스 루퍼도 거부할 수 없었다.
‘네 이용 가치가 다하는 순간 끝이다.’
그는 남의 밑에 있는 건 취미가 아니었다.
오로지 위에 군림하는 게 그의 일상.
오만의 근본이기도 했다.
“저 인간이 어떻게 설극의 무공을 익혔는지 알아야겠어요.”
“인계로 직접 가시겠다는 겁니까? 마왕께서 움직이시려면 권한을 사용하셔야….”
“왕의 권한을 사용하겠어요.”
“헉!”
“마왕께서 전쟁을 선포하셨다!”
“전쟁이다!”
“마왕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마족들이 날뛰었다.
천계와 전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나.
마족은 전쟁에 미친 자들.
싸움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주경아가 이준을 똑바로 본 채 포탈로 몸을 던졌다.
마족들도 그녀의 뒤를 따라 인계로 내려갔다.
* * *
쿠쿵!
지옥계에 큰 진동이 일어났다.
죽은 자를 재판하던 염라대왕이 하던 일도 멈추고 중얼거렸다.
“왕의 권한이 발동돼? 누구냐!”
왕의 권한을 발동할 신은 단 세 명.
천계의 왕이나 마왕, 신선제뿐이었다.
천계의 왕은 제외.
자기들 일 아니면 절대 나서지 않은 족속들이었다.
“설극인가? 아니면 주경아?”
둘 중 누구라도 심각했다.
괜히 왕의 권한을 딱 한 번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을까.
권한을 사용하면 이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둘 중 한 명이라도 왕의 권한을 사용한다면 불행이 뒤따를 것이다.
염라대왕은 신선계에 있는 설극에게 말을 걸었다.
[설극, 설마 네가 왕의 권한을 사용했나?]
[내가 아니오.]
[그럼?]
[경아가… 왕의 권한을 발동했소.]
[주경아가? 신선계에 전쟁을 선포하기로 했나?]
[신선계가 아니오. 준이의 기운을 보자 인계로 움직였소.]
[인계!?]
[아무래도 내가 내려가야 할 듯싶소. 준이도 경아는 막지 못하고. 그녀를 막을 사람은 나뿐이오.]
[너도 왕의 권한을 발동한단 말이냐.]
[내가 인계로 내려가려면 그래야 하지 않소.]
[불가하다! 너도 왕의 권한을 발동하면 동시에 두 개의 권한이 사용된다. 그러면 더욱 큰 대가를 받고 말 거야.]
염라대왕이 극구 반대했다.
동시에 두 개의 권한이 발동된 건 신계에서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저대로 놔둔다면 준이가 위험하오. 내 제자가 경아에게 당하는 꼴은 죽어도 못 보오.]
설극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이준과 주경아에 대한 건 이성부터 잃고 마는 설극이지 않나.
그가 대화도 하지 않은 채 왕의 권한을 사용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대신 신선들을 내려보내라. 지옥계는 나찰과 야차를 보내겠다. 사자들을 보내고 싶긴 하지만 그들은 아직 요양해야 할 때라 인계로 가지 못한다.]
[신선들이 내려가는 건 괜찮소?]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도 신계의 일. 왕만 움직이지 않는다면 괜찮다.]
[음.]
[주경아를 살리고 싶다 하지 않았나. 왕의 권한은 주경아를 위해 사용해라.]
파천혈신 설극이 신선제가 된 이유였다.
마왕이 된 주경아를 구할 때 권한을 사용하는 게 옳았다.
마왕의 죄는 가만히 있어도 무거웠다.
심지어 구천옥에서 탈출한 죄도 있었기에 왕의 권한이 없다면 그녀를 살리기 어려웠다.
그 때문에 설극이 고민에 빠진 거다.
[내 말대로 해. 최상위급 신선과 야차, 나찰이면 마족을 막을 수 있다. 마계가 움직였으니 천족도 인계로 내려갈 터. 네가 생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터다.]
주경아가 이준을 죽인다면 설극은 아마 미치지 않을까.
사랑하는 여자가 제자를 죽이는 건 천륜과도 같았다.
그러니 설극이 바로 나서려 하는 것이다.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그 즉시 왕의 권한을 사용할 거요.]
설극이 한발 물러났다.
염라대왕의 의견도 괜찮았다.
보다 못하면 그때 왕의 권한을 발동해서 인계로 강림하면 됐으니까.
[잘 생각했다. 연아란과 연우도 깨어났으니 쉽게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믿어보겠소.]
그 말을 끝으로 설극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다.
염라대왕은 한숨을 돌렸다.
설극이 인계로 강림한다면 모든 상황은 종료될 거라는 걸 안다.
하나 설극의 불행은 구천옥의 금지에 있는 천극자.
전대 신선제를 자극하게 될 터.
그렇게 되면 4대 신계는 끝장나고 말리라.
“사제들이 골칫덩어리야. 제 명에 못 살겠군. 하아.”
4대 신계가 무너지는 일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됐다.
4대 신계가 있으니까 세상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만약 이게 무너진다면 지구에 종말이 닥칠 터였다.
“야차전과 나찰전에 연락을 취해라. 즉시 인계로 가서 마족을 소탕하라고.”
“알겠나이다 대왕이시어.”
염라전 관리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사라졌다.
“우려한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할 터인데….”
염라대왕이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생각에 빠졌다.
* * *
신선계, 신선경.
설극이 신선들을 죄다 호출했다.
최상위급 신선들은 그에게 죽어서 새롭게 임명된 자들이었다.
모두가 설극의 눈만 봐도 오금을 저려할 정도.
그의 호출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하고 있을 때.
“모두 인계로 내려가라.”
예상외의 말을 들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갑자기 인계로 내려가라니….”
신선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마계 놈들이 인계로 내려갔다. 마왕과 함께 말이다.”
“마, 마왕!?”
“설마 조금 전의 진동이 왕의 권한을 발동해서 일어난 현상이었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이야기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지금 당장 내려가.”
신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두려움에 떨던 신선들이 아니었다.
마족과의 전쟁.
신선이 된 그들의 사명은 인계의 질서가 유지되는 걸 지켜보는 것이었다.
마족이 인계를 엉망으로 만들 시 그들을 막는 게 바로 신선의 의무였다.
“전 준비가 끝났어요.”
뇌문의 여신선 연아린이었다.
애초에 신선들은 자신의 무기를 떼어놓고 다니지 않았다.
무기만 챙기면 되는 입장.
따로 준비할 건 없었다.
아니, 단 한 명.
천의문의 신선만 준비할 게 많았다.
“저… 야, 약재료와 상처약을 가져가려면 준비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의(醫) 하나만으로 신선이 된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 빼고 다 내려가.”
“가, 감사합니다. 최대한 빨리 준비하고 내려가겠습니다.”
천의문의 신선이 신선경에서 후다닥 사라졌다.
“모두 강림 준비하세요.”
연아린이 신선들을 재촉했다.
신선제가 얼마나 다급해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인계에는 그의 제자 이준이 있었으니까.
마왕 주경아와 만나서 싸운다면 신선제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두 사람 모두 신선제가 가장 사랑했다.
만에 하나라도 둘 중 한 명이 다치기라도 하면 얼마나 가슴 아플까.
한 명은 평생을 찾아다녔던 연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처음 마음을, 신선제가 인정한 제자였다.
“아린아.”
설극이 연아린을 불렀다.
“네. 어르신.”
그가 이름으로 불렀기에 연아린도 신선제가 아닌 예전의 호칭으로 대답했다.
“부탁할 사람이 너밖에 없구나.”
“제가 최대한 막아볼게요.”
“고맙구나.”
“어르신께선 강림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생각해 보마.”
“그럼 다녀올게요.”
연아린이 설극에게 고개를 숙였다.
신선경에 모인 신선들.
설극의 몸에서 기운이 흘렀다.
그 기운은 신선경으로 빨려 들어갔다.
호수의 물이 반짝이면서 신선들을 감쌌다.
빛과 함께 사라진 신선들.
신선경에는 설극 홀로 남았다.
그는 서 있는 그대로 호수를 들여다보았다.
“제자야. 그냥 뒤로 물러나거라. 지금의 너는 경아를 이길 수 없느니라.”
이준이 주경아를 이기면 좋았다.
하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터다.
주경아는 탈신경에 든 상태.
자연경 끝자락에 있는 이준이 이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