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1화
“주, 죽여!”
의주가 소리쳤다.
그를 따르는 죄인들이 이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나 그들은 이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저 걷기만 할 뿐인데 픽픽 쓰러지는 죄인들.
압도적인 광경에 의주가 빽 소리쳤다.
“마, 막으란 말이다! 자폭해서라도 날 보호해!”
추잡스러운 의주의 명령에도 죄인들은 군소리하지 않고 따랐다.
죄인들은 죽을 걸 알면서도 이준을 향해 쇄도했다.
어떻게든 이준의 발목을 잡기 위해.
조금이라도 걸음을 늦추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의지만으로는 이준을 막지 못했다.
“직접 발악이라도 하면 억울하지 않을 텐데. 의주라는 이명이 아깝다.”
이준의 발에 거력이 몰려들었다.
기류가 회오리치며 발끝에서 정점을 이룬 순간.
발이 땅을 강하게 내리쳤다.
콰앙!
무극군림보의 마지막 발걸음.
사보 멸.
모든 생명을 소멸시키는 보법이 펼쳐졌다.
지진과 함께 갈라지는 땅.
대기 또한 무극군림보로 인해 비명을 질렀다.
의주를 따르는 죄인들의 몸이 모래처럼 부서지기 시작했다.
“안… 돼…!”
의주가 눈을 크게 뜬 채 경악했다.
어떻게든 저항하려고 발버둥 쳤다.
내공과 지옥의 기운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했다.
그도 모자라 마력까지 사용한 상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준이 뿜어대는 기운에 의해 호신강기가 뚫리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처참히.
부서진 것도 아닌, 해제.
마치 자신이 일부러 호신강기를 집어넣은 것처럼 보였다.
이준의 내공에 닿은 찰나 거짓말같이 호신강기의 기운이 끊긴 것인데 말이다.
“이 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가다니….”
의주의 몸도 모래처럼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도 다른 죄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이게 바로 자연경 완숙과 끝자락의 차이.
그리고 그와 이준이 익힌 무공의 차이기도 했다.
이준이 의주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히 앞섰다.
그가 발악해봤자 이준에게 죽는 건 똑같았다.
“네 힘도 요긴하게 쓸게.”
이준은 사라져 가는 의주의 기운을 마지막까지 뽑아냈다.
“…안….”
의주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끝내 소멸하고 말았다.
제스퍼 가문에 서 있는 사람은 오직 이준 한 명뿐.
그에게 모두가 죽었다.
이준이 몸을 돌려 마계수 앞에 섰다.
[너로 인해 마계수가 열매를 맺었구나.]
마계수는 생명을 먹고 산다.
특히 인계의 생명을.
마족들을 많이 죽이긴 했으나 마계수에 영향을 끼치진 않았다.
그들은 애초에 마계인.
인계의 인간이 아니었다.
하나 의주와 죄인들은 달랐다.
인간의 몸에 빙의한 망자들.
죄인들을 죽이느라 수많은 생명을 거뒀다.
심지어 마계수가 있는 지근거리에서 죄인들을 죽였다.
이는 마계수가 가장 좋아하는 상황.
마계수가 충분히 활성화되고도 남았다.
대기에 남은 생명의 기운을 마계수가 빨아들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의주를 비롯한 죄인들의 기운인 지옥의 기까지 마계수가 먹어 치웠다.
많은 생명과 지옥의 기운을 먹으니.
마계수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건 당연했다.
“의도한 대로 되고 있네요.”
이곳에서 죽인 마계 군주만 세 명.
남은 마계 군주는 세 명밖에 없었다.
이들을 전부 죽이면 마주가 나타나지 않을까.
아니면 오만, 질투, 분노의 군주도 같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러면 오히려 좋았다.
귀찮게 한 명씩 찾아서 죽이는 게 아닌 한꺼번에 전부 처리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오만의 군주가 조금 꺼림직하긴 했다.
무공을 사용하는 마족이라니.
판타지 소설을 봐도 이런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색욕과 나태, 인색, 탐욕의 기억 속의 오만 군주는 마법과 동시에 무공도 썼다.
‘오만 군주의 무공을 어디서 본 듯한데… 기억이 잘 안 떠올라.’
분명 봤다.
너무도 짧게 지나쳐서 기억이 안 날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할꼬?]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사부에게 비밀을 만든단 말이렸다?]
“마계 군주가 한꺼번에 덤비면 상대할 수 있을까, 잠깐 상상했어요.”
[당연히 상대할 수 있느니라. 네 무공이 무엇이냐. 전 고금제일인이었던 사부가 만든 무공이니라. 응당 마계 군주도 무릎을 꿇릴 수 있다.]
무극자 사부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이준도 무극자 사부에게 맞장구쳐 줬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만에 하나란 경우를 떠올려 봤을 뿐이에요.”
[마왕이면 몰라도 마계 군주에게는 패배할 리 없으니 걱정 말거라.]
무극자 사부의 호언장담이었다.
마경 끝자락의 경지에 있는 마계 군주들.
오만 군주만이 마경을 벗어나 신마경에 있었다.
신마경 초입은 자연경 끝자락과 동일한 경지였다.
이준과 비슷한 무력이라 볼 수 있었다.
“차기 고금제일인이 전데 걱정 안 해요.”
방긋 웃으며 마계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에 마계수가 닿았다.
의주가 죽기 전에 뽑아낸 저승의 기운을 마계수에 주입했다.
우웅-
강력한 기운에 의해 마계수가 파르르 떨었다.
고통에 떠는 게 아닌, 기분 좋은 떨림.
보라색을 띠던 열매가 검보라색으로 변했다.
* * *
마계수에 열매가 가득했다.
그 열매는 머지않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퍽 소리와 함께 열매가 깨졌다.
바닥을 가득 적신 열매가 균열 오염의 색을 짙게 했다.
지잉-
그럴 때마다 마계수 주변이 요동쳤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게이트가 열렸다.
심지어 마계수 중앙.
거대한 검은 문이 활짝 열리기도 했다.
“사부님. 저기가 마계예요?”
[그렇느니라.]
“그냥 마계로 쳐들어 갈까요?”
[아무리 너라도 마계에 들지 못한다. 산 사람이 신계에 든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느니라.]
“만약 억지로 가려면요?”
[육신이 소멸하고 말 것이다.]
“마족은 인계로 오면서 불공평하네요.”
이준은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마계수 중앙에 열린 게이트를 들여다 봤다.
게이트에는 마계의 풍경이 보였다.
어두컴컴하고 음침한 날씨였다.
마족이 사는 곳답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인간이 살 곳은 아니었다.
“인계와 마계를 이어주는 통로가 열려서 당황했나 보네요.”
이준은 계속해서 마계의 광경을 보고 있었다.
오만을 뺀 질투와 분노 군주가 황당한 표정을 했다.
마계수의 넘치는 기운이 마계에 흘러갔기 때문.
여태껏 느껴보지 못했던 생명이기에 잠시 당황해하는 것이다.
그 생명은 곧이어 지독한 마기로 변했다.
마기는 마족의 원천이자 원동력.
생명에서 마기로 변한 기운으로 인해 마족들의 힘은 더 강해졌다.
그러던 그때였다.
질투와 분노 군주가 게이트 너머를 유심히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정확히는 이준의 눈을 보고 있었다.
“눈이 딱 마주쳤네요.”
이준은 두 군주를 향해 회안을 번쩍였다.
도발이었다.
어서 인계로 넘어오라고.
“저 둘 꽤 강해요.”
나태와 인색, 탐욕은 군주 중에서 가장 약했다.
하지만 색욕부터는 급이 달랐다.
특히 질투와 분노 군주는 싸움에 특화된 마족이었다.
[이제부터 진짜 싸움이니라. 천살성이 깨어나지 않게 싸워야 한다.]
무극자 사부가 걱정했다.
두 군주에게 자신이 패배한다는 건 일절 생각하지 않았다.
사부는 천살성이 깨어날까 봐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 일렀다.
[넌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싸움이 더 어려울 것이다.]
이준과 천살성은 신뢰가 깨진 상태였다.
옛날과 같은 믿음이 없었다.
천살성이 언제든 고개를 치켜들 수 있는 상황.
한번 믿음이 깨진 순간부터는 매일 천살성을 걱정해야 했다.
“명심할게요. 저놈들이 강해 보여도 저한테 죽는 건 변함 없어요.”
이준의 자신감 찬 발언에 무극자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만족해했다.
[암. 누구의 제자인데 저딴 저급한 것들에게 지겠느냐. 네 자신과의 싸움이 아니면 패배할 리 없느니라.]
이준이 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두 군주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들어와.”
이준의 음성이 질투와 분노에게 들렸을까.
그들이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어깨를 잡은 자가 나타났다.
기골이 장대한 중년 남자였다.
“오만군주?”
하얀 머리를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 그러지?’
그를 보자 흥분됐다.
손에 땀이 맺혔다.
이런 적은 천주와 사부를 직접 대면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준의 상태가 급변했다는 걸 느낀 무극자가 물었다.
[왜 그러느냐.]
‘저도 모르겠어요.’
웃고 있던 얼굴도 딱딱하게 굳은 지 오래였다.
머리가 새하얘지기까지 했다.
[혼원신공을 돌려 마음을 진정시키거라.]
무극자 사부의 말대로 혼원신공을 돌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런데도 좀처럼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갑자기 왜 이러지?’
이번엔 지독한 살기가 올라왔다.
동시에 폭발적으로 뿜어지는 무극기.
[저놈이 원흉이구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거라.]
무극자는 이준의 상태가 누구 때문에 이러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오만 군주 알제스 루퍼.
마왕의 자리가 빈 마계에서 실질적으로 우두머리 역할을 한 마족이었다.
이준은 호흡에 집중했다.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노력 중이었다.
‘하아… 됐어요.’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파멸적인 기운을 뿜어내던 무극기도 잠잠해졌다.
다만 아직도 지독한 살기는 여전했다.
“뭐라고 하는 거지?”
게이트 너머에 있는 알제스 루퍼의 입이 뻐끔거렸다.
자신을 향해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알제스 루퍼의 입 모양을 자세히 봤다.
그리고 따라 말했다.
“설극? 사부님을 아는데요? 마족하고도 원수졌어요?”
[구주라면 몰라도 마족하고는 원수지지 않았다.]
“정말요? 그런데 쟤는 왜 그러는 거예요.”
[나도 모른다. 네 무극기를 보고 저러는 것 같은데….]
무극자의 말에 이준은 생각에 잠겼다.
‘오만의 군주는 무공을 쓴다. 어째서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마족은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
검을 잘 사용하기도 했고, 마법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그런데 무공을 사용한단다.
다른 군주가 무공을 사용하면 미심쩍긴 하겠으나 넘어갈 수 있었다.
왜?
마법이 무공보다 안 좋으니.
마족들도 어디서 무공을 배워 사용한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한데 오직 오만 군주만 무공을 사용했다.
그것도 검법을.
‘아마 검법에 해답이 있을 거야.’
자신이 왜 이런 반응을 했는지.
오만 군주가 왜 설극이란 이름을 곱씹었는지.
오만 군주의 무공을 보면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 *
한편 오만 군주 알제스 루퍼는 이준을 보곤 옛 감정에 휩싸였다.
‘설극, 그놈이 내게 마지막으로 보였던 무공이다!’
얼마나 경이롭고 파멸적인 무공이었는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소름이 돋았다.
‘저놈이 어떻게 설극의 무공을 계승했는지 모르겠지만 죽여야 한다.’
설극의 무공은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됐다.
신도 죽일 수 있는 신살의 무공.
최고위 마족으로 깨어났을 때도 설극의 무공만은 알고 있었다.
백무생의 기억을 되찾고선 더욱 경계 했다.
설극의 무공이야 말로 진정한 신살의 무공.
백날 자신이 마족의 마법과 검술을 토대로 무공을 새로 창안해도.
설극의 무공은 따라잡을 수 없었다.
얼마나 좌절감을 맛봐야 했나.
설극은 인간일 때 신살의 무공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그 무공만 없었더라면 모든 건 자신의 계획대로 됐을 거다.
주경아도 품을 수 있었을 거고.
명예롭게 무림맹주의 자리에서 천수를 누리고 있었을 터였다.
한데 이상한 미꾸라지 한 명 때문에 모든 계획은 틀어지고 죽고 말았다.
‘아니지. 저놈을 통해서 설극의 무공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분노로 휩싸였던 감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알제스 루퍼, 과거에 백무생으로 불렸던 그가 이준을 향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기회다. 설극 그놈을 넘을 기회!’
알제스 루퍼가 꿈을 꾸고 있는 사이.
세 군주에게 한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는 마계의 새로운 왕이 된 마주 주경아였다.
“마왕을 뵙습니다.”
“준비는 끝났나요?”
“이제 인계로 넘어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군주들이 제대로 일했나 보군요. 예정했던 시간보다 빨랐어요.”
“마계의 소원은 전 층계를 마족의 발아래에 꿇리는 일. 마족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알제스 루퍼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면서 작은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없앴다.
“그런데 저 문 너머에 있는 자는 누군가요?”
마주의 눈에 문 너머에 보이는 이준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