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9화
와르르.
마계의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아데스 가문의 붕괴였다.
가주나 직계 혈통 중 한 명이라도 남아 있으면 가문이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
하나 이들이 다 사라진다면 지금처럼 무너져 내린다.
아데스 가문이 무너졌다는 보고에 곧장 달려온 한 사람.
오만의 군주인 알제스 루퍼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색욕의 군주가 죽었구나.”
옆에 있던 그의 심복이자 오른팔인 데르고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마계 군주 중 한 명인데 어찌 이렇게 쉽게 죽은 겁니까?”
“인간 중에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강자가 있는 듯하다.”
“고작 인간 따위에게 마계 군주가 죽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인간 따위라는 데르고의 말에 알제스 루퍼의 이마가 찌푸려졌다가 이내 펴졌다.
그 또한 전생에 인간이었던 자.
데르고의 말은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과 같았다.
물론 지금은 인간보다 월등한 종족이긴 했지만 말이다.
알제스 루퍼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데르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한 인간은 많다. 예를 들어 신계를 긴장시키는 파천혈신도 인간이었다는 걸 잊지 마라.”
그는 파천혈신이라는 단어를 유독 강조했다.
목소리에는 은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알제스 루퍼는 한때 무림맹주였던 백무생.
심지어 애송이라 여겼던 파천혈신에게 처참하게 찢겨 죽었다.
어디서 굴러온지 모르는 촌뜨기에게.
과분한 무공과 여자가 있기까지 했다.
“그자는 예외가 아닙니까. 이미 신선계를 밟고 추방당한 자입니다. 신선에 오른 자를 인간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데르고가 격렬히 부정했다.
그는 파천혈신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신선에서 추방당해 인간으로 태어난 자로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하찮고 나약한 존재.
신계에서 준 각성자 시스템이 없다면 한없이 약한 종족이라 여겼다.
그런 인간을 파천혈신과 비교할 수 없었다.
“너도 파천혈신이 무서운가.”
“무섭기보다는… 까다로운 자라 생각합니다. 신계의 율법 따위는 개나 주라는 듯한 태도를 취하지 않습니까. 신계에 사는 이들치고 신계의 율법을 어기고서 살아남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마왕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마왕도 신계의 율법에는 묶여 있지.”
“인간 따위가 어떻게 감히 율법을 무시하겠습니까. 그는 애초에 신의 위치에 있다가 추락한 자일 겁니다.”
오른팔인 데르고가 파천혈신을 한껏 띄웠다.
그럴수록 알제스 루퍼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설극! 네가 신의 위치에 있다가 추락한 존재라 생각하지 않는다. 운 좋게 하늘도 부수는 무공을 얻어 강해진 것뿐이다.’
으득.
알제스 루퍼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열등감이 비추어졌다.
그러다 이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가 무림맹주인 백무생에서 알제스 루퍼가 되어 산 세월만 억겁.
감정을 감추는 건 일도 아니었다.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을 한다. 인간이 우리보다 강할 리 없지. 하나 색욕의 군주가 죽은 건 사실이다. 그녀가 제일 먼저 인계로 넘어갔고 얼마 가지 않아 이렇게 아데스 가문이 무너졌다. 이 광경을 보고도 계속 인간을 무시할 생각이냐.”
“구주의 간계에 색욕의 군주가 넘어간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구주 또한 인간이다.”
“그들은 지옥계의 뇌옥에서 억겁의 세월을 버틴 자들입니다. 오래 살아봤자 70년도 못 산 인간과는 다릅니다.”
데르고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인간은 하찮은 존재라고 바닥에 깔고 갔다.
“색욕의 군주가 우리 말도 듣지 않고 인계로 먼저 간 이유를 잊었느냐. 그녀는 파천자란 놈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구주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을 게야.”
데르고는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색욕 군주의 눈깔이 뒤집혀 인계로 떠난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인간을 죽이겠다고 군주가 움직였다.
신선도, 지옥의 사자도.
그렇다고 천계의 천족도 아니었다.
그녀가 직접 아데스 가문의 정예를 이끌고 죽이겠다고 한 게 바로 파천자란 인간이었다.
딸의 원수를 갚기 위해 말이다.
“데르고. 인간을 우습게 보지 마라. 그들은 의외로 강하며 생명력이 질긴 종족이야. 방심했다간 너 또한 당할 수 있다.”
“…명심하겠습니다.”
데르고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주인의 말이라 인정하는 척했다.
주인의 말을 부정하는 건 종으로서 경을 칠일.
지금도 충분히 주인에 대한 무례를 저지른 상태였다.
“그보다 다른 군주들은 인계로 넘어갔느냐.”
“나태, 인색, 탐욕의 군주가 인계로 넘어갔습니다.”
“우리도 슬슬 인계로 떠날 준비를 해라.”
데르고의 눈에 희열이 떠올랐다.
드디어 마계를 떠나 인계를 정복하는 날이 왔다.
마계의 권좌가 비어 정복 전쟁을 미루고 있었다.
이제는 마계의 권좌도 채워진 상태.
신계의 율법은 새로운 마왕이 감당할 일이고 자신들은 인계를 정복하면 됐다.
“알제스 님께 인계를 바치겠습니다.”
“기대하겠다.”
* * *
마계수의 문이 열렸다.
그곳을 나온 수많은 마족이 공기를 들이마셨다.
“이 공기 미치도록 맡고 싶었어.”
“마계의 공기도 이랬으면 얼마나 좋아.”
“이래서 우리가 인계를 포기 못 하는 거지.”
중년 남자로 보이는 세 명의 마족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정체는 각각 나태, 인색, 탐욕의 자리에 앉아있는 주인이었다.
“이보르. 이번에는 내 발목 잡지 말라고.”
나태의 군주인 시른 페르고가 인색의 주인 이보르 도미트에게 짓궂게 말했다.
“시른, 천계와의 싸움에선 내가 아니고 크로드가 네 발목을 잡은 거야.”
“닥쳐! 너희들이 나대다가 부상을 당했으면서 내 탓 하지 마.”
탐욕의 군주인 크로드 바세블이 버럭 소리쳤다.
세 사람은 가문의 후계자일 때부터 붙어 다닌 친구였다.
군주의 자리에 앉아도 그들은 여전히 같이 다녔다.
“큭큭. 발끈하긴.”
인색군주 이보르 도미트가 배를 붙잡고 웃었다.
친구인 탐욕군주가 발끈한 모습이 재밌나 보다.
“그런데 마중 나온 놈은 없는 건가?”
인색군주 이보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그들에게 한 무리가 다가왔다.
나이가 지긋이 든 노인이 성큼성큼 걸어와 말했다.
“인계에 온 걸 환영하는 바이오.”
“너는…?”
인색군주 이보르의 반말에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하는 의주였다.
“강풍오라 하외다. 사람들은 노부를 천의라 불렀다오. 이곳에선 딘 제스퍼요.”
의주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세 군주가 눈을 마주쳤다.
[강하대?]
[구주의 수좌에 있었던 마왕보면 몰라? 당연히 강하겠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태와 인색, 탐욕이 시크릿 보이스를 주고받으며 놀라 했다.
처음부터 반말한 것도 의주를 얕잡아 봤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기운을 숨겼어.]
[능구렁이 같은 놈.]
[그러니까 그 지옥 같은 구천옥에서 살아남지.]
신계에서도 구천옥은 정말 유명했다.
지옥의 뇌옥.
한 번 들어가면 억겁의 세월 동안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었다.
그냥 감옥이면 유명하지 않을 터.
지옥의 염왕은 죄인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이성을 말살시키고 악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살육을 유발시켰다.
영혼이 소멸 되기 전까지 서로를 죽여야 했다.
지겹도록 싸우고 죽여야 하는 곳이기에 마계까지 그 소문이 난 것이다.
[어쩌냐. 난감한데.]
[그건 네 사정이고 우린 아니다.]
[큭큭. 맞아. 그러게 왜 먼저 나댔냐.]
[배신자 새끼들.]
인색군주 이보르를 뺀 나태와 탐욕이 인주에게 인사를 했다.
“시른 페르고요 나태의 좌에 있소.”
“탐욕의 군주 크로드 바세블이오.”
“나태와 탐욕의 군주! 여러분의 말은 많이 들었소.”
인주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처음 반말했던 이보르가 어물쩍하게 말했다.
“인색…군주 이보르 도미트….”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에 나태와 탐욕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친구의 꼴이 말이 아니었으니까.
마족은 강자에게 약했다.
약육강식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 바로 마계.
군주끼리는 서로 비등비등하다고 여겨 영역 다툼을 자주 할 뿐.
압도적인 군주가 나오면 곧바로 밑으로 들어가는 게 마족이었다.
“다른 분은 언제 오는 거요?”
“준비가 끝나는 대로 올 예정이오.”
“색욕의 군주는 어디 있소?”
“한국이란 나라로 먼저 갔소.”
“한국?”
“이곳에서 굉장히 먼 나라요. 그곳에 파천자가 있다오.”
“아, 색욕의 딸인 에스텔을 죽인 인간?”
탐욕군주 크로드의 말에 인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오. 화가 잔뜩 나 있었소.”
“애지중지한 딸을 잃었으니 색욕이 분노할만하지.”
“여러분은 어찌할 생각이오?”
의주가 세 군주에게 물었다.
색욕이 있는 한국으로 갈지.
아니면 이곳을 거점으로 움직일지.
“우린.”
“군주! 마계에서 온 정보입니다.”
뒤에서 크로드의 말을 끊으며 달려온 마족이 있었다.
“갑자기 무슨 정보?”
“새, 색욕의 군주가 죽었다 합니다.”
“뭐!?”
“무슨 그딴 정보가 다 있어!”
“색욕이 하급 마족도 아닌데 죽었다고? 정확한 정보냐.”
세 군주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같은 선상에 있는 군주가 죽었다.
믿기지 않는 소식.
어디서 이런 개 같은 정보가 나온 걸까.
크로드가 마족을 뚫어지게 보면서 물었다.
“어디서 온 정보냐.”
“아, 알제스님이 보내신 정보입니다.”
“알제스님이?”
“그분의 말이라면 확실한데….”
“색욕이 진짜 죽었다니. 믿기지 않아. 대체 누구한테 죽은 거야.”
“설마… 파천자라는 인간에게 죽은 건가?”
세 군주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군주가 죽은 사건.
영토 분쟁 때도 부상은 당할지언정 사망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인계에 내려온 지 얼마나 됐다고 비보가 들려올까.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의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족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군주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자연경에 든 강자.
마계 경지로 치면 마경 끝자락은 된다.
그런 자가 죽었단다.
‘파천자에게 죽은 거면… 얼마나 강한 것이냐.’
자신은 구천옥에서 억겁을 굴러서야 간신히 자연경에 올랐다.
한데 파천자라는 놈은 억겁도 살지 않았음에도 자연경에 오른 게 아닌가.
색욕의 군주를 죽였다면 그 정도는 될 터.
질투가 몸을 지배했다.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재능.
무공에 대한 천재라 가능한 이야기였다.
네 사람이 각자의 생각에 빠져있을 때였다.
그들이 동시에 같은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보르!”
“느꼈다. 말도 안 되는 기운이야.”
“불청객이 찾아온 걸 보면 아무래도 저놈이 색욕을 죽인 것 같지?”
크로드의 말에 시른과 이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군주와 의주가 잔뜩 경계를 하자.
눈치 빠른 이들이 앞으로 나와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마족과 제스퍼 가문의 각성자들.
그들은 다 같이 앞쪽을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 * *
이준이 미국 땅을 밟았다.
그가 서 있는 곳은 LA.
로스엔젤레스였다.
“지독한 악취가 진동하네.”
[대기에 마기가 들끓고 있구나.]
마계수의 영향이었다.
그토록 살기 좋은 곳이었던 LA가 균열 오염으로 가득했다.
“제스퍼 가문이 의주에게 먹히니 미국도 속절없이 무너지네요.”
미국은 강력한 각성자를 다수 보유한 국가였다.
특히 제스퍼 가문은 S등급의 각성자가 많기로 유명했다.
아시아나 유럽은 S등급이 거의 가주급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선 자주 보이는 등급.
막 특별한 각성자가 아니었다.
미국의 국력이 세계 1위였던 이유기도 했다.
이준은 균열 오염을 밟으면서 경공을 펼쳤다.
그가 밟자 증발되는 균열 오염.
자연경 끝자락에 오르니.
그토록 지독하고 끈질긴 균열 오염조차도 버티지 못했다.
“여기가 제니퍼 가문이겠네.”
이준은 하늘에 우뚝 솟은 마계수를 보고 달려왔다.
그의 앞에는 웅장할 정도로 거대한 정문이 있었다.
마치 마계수가 피어날 것을 예견한 문이랄까.
“안에 재밌는 것들이 있구만. 들어가서 인사를 해볼까?”
이준의 입꼬리가 말아올라갔다.
그의 기감에 잡힌 네 명.
한 명은 의주였다.
세 명은 마계 군주의 기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