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4화
“강의는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한지유가 강의실 시계를 확인하곤 수업을 마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야간 강의는 정말 힘들어.”
“그래도 빠진 강의를 보충한 게 어디야.”
“한 교수님은 정말 성실하셔.”
“그러니까 SS등급을 다신 게 아닐까?”
“나도 한 교수님처럼 꼭 강해질 거야.”
여 학생들에게 한지유는 박정연과 더불어 가장 닮고 싶은 각성자였다.
21살에 무려 SS등급.
전 세계에 전무한 사례였다.
수많은 천재가 있지만 높디높은 S등급의 벽을 깨진 못했다.
나이가 더 들어서 간신히 깨거나 평생을 S등급으로 살아가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한지유는 그 두꺼운 벽을 깨부수고 SS등급에 올라선 것이다.
그것도 아주 젊은 나이에.
“그런데 요즘 교수님이 저기압이신 것 같아.”
“그러게.”
“강의할 때 목소리에 힘이 없으셨어.”
“파천자님이 없으셔서 그런가?”
“에이. 파천자님은 박 교수님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야?”
“무슨 소리야. 한 교수님하고 썸타고 있는데.”
“그럴 리가. 혈마님이 류 교수님을 엄청 밀고 있다고 들었어.”
여학생들은 자기가 지지하는 교수들의 이름을 꺼냈다.
그때 한 여학생이 여유 넘치는 듯 말했다.
“너희 소식 정말 늦구나? 파천자님께서 직접 스페인에 가셔서 데려온 분이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되지.”
“벨렌 교수님을 말하는 거야?”
“그 귀한 푸른 등불의 꽃을 사신가만 반값으로 주는 이유가 뭘까?”
“모종의 거래가 있었겠지.”
“그 모종의 거래가 두분이 사귀는 사이라면?”
“아.”
“일리는 있어.”
푸른 등불의 꽃은 계승의 꽃과 같은 가치를 지녔다.
균열 오염을 정화하는 하나뿐인 아티팩트.
등급이 높을수록 가치는 어마어마했다.
그걸 사신가에 반값에 판다는 건 웬만한 관계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세연이 말이 제일 근거 있어.”
“거대 가문일수록 이윤을 안 따질 수 없긴 하겠다.”
“특히 사신가라면 더욱 그러겠지.”
“아쉽다. 난 한 교수님을 응원했는데.”
“박 교수님하고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생각했는데 아쉽다.”
여학생들이 자기들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한지유는 복도를 걸으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나는 언제까지 이준에게 짐이 되는 걸까.’
박혁진과 박정연이 각성했다.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엄청난 무력을 뽐내며 금룡황가의 가주인 황바울을 제압했다.
뿐인가.
천외천의 마인인 살주라는 자도 죽였다.
이제 자신과 같은 짐 덩어리가 아니었다.
이준을 도와줄 수 있는 조력자의 입장.
한지유는 여기서 자괴감을 느꼈다.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이준을 도와줄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건 자기만의 생각.
그를 도와주기는커녕 항상 발목만 잡고 있었다.
천외천이 등장하고부터 피어난 무력감.
재능 천재라 들었던 옛날의 자신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녀가 복도를 걸어가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순 없어. 뭐라도 해야 해.’
화가 났다.
자신은 왜 이렇게 못났을까.
피나는 노력을 해도 박씨 남매는 왜 못 따라잡을까.
언제까지 사람들에게 기대어 구함을 받아야만 할까.
온갖 잡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녀의 귀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이 없는 건 죄악이야.]
‘죄악?’
[그래. 소중한 사람도 지키지 못하잖아. 네가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봐.]
‘지금처럼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한지유는 걸어오는 목소리에 홀린 듯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누구인지 의심도 못 한 상태.
자신을 이해한다는 목소리에 푹 빠져 있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지?]
‘어.’
[내가 그 힘을 줄 수 있다.]
‘네가 누군데?’
[든든한 아군이야.]
‘든든한 아군? 설마 참백연?’
[참백연?]
‘아니야?’
목소리의 주인이 의문을 표했다가 이내 대답했다.
[맞아. 그러니 네게 힘을 줄 수 있는 거지. 어떻게 지금 바로 줄까?]
‘내게 힘을 줘.’
[좋아. 내게 마음을 열거라.]
한지유가 내공을 개방했다.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있게.
안전장치를 전부 해제했다.
그러자 그녀의 발밑에서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림자는 그녀의 등.
가슴 부위에 손을 뻗으며 속삭였다.
[네가 원하는 힘을 주마. 그 대가로 넌 내 영원한 노예가 될 것이다.]
그림자, 라넬 아데스의 목소리가 끝나자 한지유의 몸으로 거대한 마기가 빨려 들어갔다.
그것도 아주 잠깐.
그녀의 부릅떠진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언제 마기의 폭풍이 몰아쳤는지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사라진 기운.
그녀는 평소처럼 복도를 걸어갔다.
* * *
“군…주님 괴물이… 옵니다….”
남자 마족은 공포가 가득 담긴 음성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마족이나 날개는 드러내지 않은 인간 형태.
그저 실성한 사람으로 착각할 뿐.
그를 마족이라 생각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군주님….”
각사학에 도착한 남자를 본 학생들이 수군거렸다.
“누구지?”
“우리 학교 학생은 아닌 것 같은데.”
“내보내야 하는 거 아니야?”
각사학은 각성자들이 다니는 특수학교였다.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학생들이 남자를 막으려는데 신기지가의 각성자들이 먼저 나섰다.
“멈추십시오.”
“누군지 신원을 밝혀주십시오.”
신기지가의 각성자가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걸음이 멈춘 남자.
흐릿한 눈동자로 신기지가의 각성자를 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살수를 펼쳤다.
푸확!
남자를 가로막은 신기지가의 각성자들이 반토막으로 잘렸다.
이를 보고 있던 학생들이 소리를 쳤다.
“꺄아아아!”
“미친!”
“침입자다. 어서 교수님들께 알려야 해.”
학생들이 각자의 무기를 꺼냈다.
남자를 향해 무기를 겨눴으나 이렇다 할 공격하지 못했다.
신기지가의 각성자를 단번에 갈라버린 실력을 지녔기에.
함부로 공격했다가는 오히려 당할지도 몰랐다.
학생들이 무기를 겨누거나 말거나.
남자는 상관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괴물이 오고 있습니다….”
그가 혼자 중얼거리자 학생들은 오싹했다.
교수들이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
각사학 학생으로서 여길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겁이 나도 자리를 지켜야 했다.
남자가 본관 건물까지 왔다.
그를 막느라 죽은 사람만 수십 명.
모두 신기지가의 각성자였다.
본관 건물에 당도하니 각사학 교수들이 남자를 막았다.
“허수야. 마기다.”
“또 천외천의 마인입니까?”
“그런 듯하다.”
천외천의 마인과 싸운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그들을 마주한 건지.
진경수와 허수는 진절머리가 났다.
“금룡황가 놈들보다는 싸울만 해보여.”
“적도 한 명이니, 합공을 해서 빠르게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돕겠습니다.”
진경수와 허수 그리고 조용석까지.
이렇게 세 명은 강의가 끝나면 항시 붙어 다녔다.
특별 1반 출신이기도 했고 이준의 추종자이기도 했다.
끈끈한 우정을 자랑한 세 사람이 진을 이루었다.
[전륜마멸진을 펼쳤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두 배로 상승합니다.]
[주 속성 ‘광’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살성력이 100% 증가했습니다.]
[전륜마멸진의 속성이 광속성으로 전환됩니다.]
[부 속성을 ‘화’로 선택하셨습니다.]
[전륜마멸진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광속성 공격력 250% 상승했습니다.]
[마속성 저항력 100% 하락했습니다.]
[화속성 공격력 100% 상승했습니다.]
[수속성 저항력 50% 하락했습니다.]
전륜마멸진을 완성한 세 사람이 남자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허수였다.
그의 참마도가 남자를 향해 내려찍었다.
아니, 찍히려는 순간!
“큭.”
무언가가 날아와 옆구리를 가격했다.
다행인 건 전륜마멸진을 이룬 상태.
조용석이 날아온 화살을 검으로 막았으나.
강력한 기운이 담겨 온전히 다 막진 못했다.
그 여파도 허수는 애꿎은 땅을 참마도로 내려찍고 말았다.
“어딜 공격하는 거야!”
근처에 있던 학생의 공격에 조용석이 버럭 소리쳤다.
진경수와 허수는 아차 싶었는지 학생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이곳에서 벗어나.”
“안전한 쉘터로 가 있어!”
마족인 남자를 천외천의 마인으로 착각한 진경수와 허수는 학생들을 피신시켰다.
학생들의 담력은 높이 사지만 남자가 마인이라면 객기였다.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그러던 그때.
“억!”
“네가… 왜…?”
“으어어어….”
곳곳에서 신음이 들려왔다.
방금전 허수를 향해 공격했던 학생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옆에 있던 친구를 공격한 게 아닌가.
“뭐 하는 짓이야!”
심지어 기초반 교수들은 자기네 들끼리 치고박고 싸웠다.
“미쳤습니까. 같은 편끼리 왜 싸우는.”
“허수야. 쟤들 좀 이상하다. 눈을 봐봐.”
허수는 진경수의 말에 학생들을 향해 무차별 공격을 가하는 이들의 눈을 보았다.
검은색으로 뒤덮여 있는 눈동자.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누군가에게 정신을 제압당한 것 같아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한 명이라도 살리려면 빨리 움직여야 해.”
“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본관 앞.
세 사람은 분주히 움직였다.
* * *
마족 남자는 제 갈 길을 갔다.
주변이 피바다로 변하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누가 악마 아니랄까봐 더러운 계략을 쓰네.”
같은 편끼리 싸우게 하는 전략이었다.
당한 진영은 극도로 혼란에 빠지게 된다.
가족이나 친구, 동료가 등에 칼을 꽂는다.
어떤 누가 혼란에 빠지지 않을까.
큰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죽은 목숨은 안타깝지만 색욕의 군주를 찾기 위해선 어쩔 수 없어.”
색욕의 군주가 마음먹고 숨어버리면 찾기 어려웠다.
차라리 희생을 치르더라도 색욕의 군주를 확실하게 처리하는 게 많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마족 남자의 뒤만 따랐을 뿐이었다.
“이 근처 같은데.”
이준의 중얼거림을 들었을까.
마족 남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창문을 깨고 학교 뒷산으로 향했다.
산을 오르자 너른 공터가 보였다.
이준이 홀로 무공 수련을 하던 장소였다.
마족 남자는 그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잠시 후.
한 인형이 마족 남자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본 이준의 눈 근육이 실룩였다.
“재밌네. 재밌어.”
말과는 달리 이준의 입가에는 냉소가 흘렀다.
마족 남자가 새롭게 나타난 여자.
그러니까 박은비의 얼굴을 한 여자에게 말했다.
“괴물이… 오고 있어.”
“괴물? 누군데?”
“도망쳐야 해. 어서 군주님을 마계로 안내해야 해.”
“그레고리 무슨 말이야. 똑바로 말해봐.”
마족 남자, 그레고리가 두려움에 떠는 음성으로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괴물이 온다, 괴물이 와! 군주를 피신시켜야 해!”
그레고리가 몸을 부들거리고 있을 때 곁으로 다른 사람이 다가왔다.
이번에도 여자였다.
그녀는 박은비의 얼굴을 한 여자에게 말했다.
“이 녀석이 왜 여기에 있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괴물이 온다고 똑같은 말만 반복할 뿐 다른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사신가로 보낸 녀석 중 돌아온 건 그레고리 하나라….”
여자가 생각에 잠겼다.
수십 명의 마족을 보냈다.
그런데 돌아온 건 달랑 한 명.
그렇다는 건 모두 임무에 성공해서 보고하러 왔든지.
아니면 전원이 죽고 본인만 살아서 왔다는 뜻이었다.
그레고리의 상태를 보면 후자 쪽이 더 맞았다.
“하찮은 인간이라 가볍게 생각했는데 한 수가 있다는 건가?”
“제가 가서 확인해 볼까요?”
“네가 직접 확인해 보고 와봐.”
“알겠습니다.”
박은비의 얼굴을 한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뜨려는데.
“그러지 않아도 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두 여자가 경계의 눈빛을 했다.
수풀 사이를 뚫고 이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준이구나?”
“이 산속엔 어쩐 일이냐.”
박은비의 얼굴을 한 여자와 한지유의 얼굴을 한 여자가 친근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역겨운 연기는 집어치우지?”
한지유는 준이라 부르지 않았다.
성을 꼬박꼬박 붙이며 이준이라 했다.
박은비도 마찬가지로 이준을 선생님이라 했다.
그런데 준이라니.
연기를 해도 완벽하게 잘할 것이지.
발연기에 토가 나올 것 같았다.
“무섭게 왜 그래.”
박은비의 가면을 쓴 여자가 정말로 무섭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래도 연기할 테냐.”
이준은 두 사람을 향해 다짜고짜 무극기를 뿜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