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3화
늦은 밤.
사신가의 담을 넘는 이들이 있었다.
그 그림자는 은밀하게 사신가의 각성자에게 접근했다.
그림자와 마주친 각성자가 눈을 부릅뜬 순간.
“난 너의 주인이자 하늘이다. 종 된 자로서 복종하라.”
“으으….”
각사학의 학생들처럼 가볍게 정신이 제압되지 않는 사신가의 각성자들.
그림자들은 마력을 더욱 높여 정신을 지배하고자 했다.
“너의 주인이 돌아왔다. 경배하여라.”
그러자 저항하던 각성자들이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네 주인은 누구냐.”
“제 주인은… 색욕의 군주십니다.”
“잊지 말아라. 너의 주인은 라넬 아데스 님이시다.”
하나, 둘씩 정신을 제압당한 각성자들.
사신가의 경계조가 모조리 정신 지배를 당했다.
다른 인기척이 들리자 그림자들이 각성자의 발밑으로 사라졌다.
“수상한 사람 없어?”
“이상 없습니다.”
“2조는?”
“여기도 이상무입니다.”
“감히 사신가를 넘볼 간덩이 부은 놈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그래도 항상 조심하자고. 금룡황가 때문에 싱숭생숭해.”
금룡황가의 가주인 황바울이 선유도 게이트에서 사신가의 가주인 이준과 격돌했다.
그 여파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백호와 관련된 아티팩트 쟁탈전.
욕심으로 인한 참사라는 기사로 많이 나갔다.
그나마 이준이 한국의 영웅이기도 하고 세계 랭킹 1위 각성자이기도 해서 욕을 덜 먹었으나.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간 사건이었다.
안티들은 이때다 싶어서 이준을 공격했다.
최근 들어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사건.
사신가에서도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금룡황가가 발톱을 감추고 있을 줄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강했습니다.”
“천외천의 마인과 연관이 됐으니 당연하지. 앞으로도 긴장을 늦추면 안 돼.”
그 외 아티팩트 쟁탈전 말고 다른 이유로도 비난을 샀었다.
이번 선유도 게이트에서 금룡황가가 힘을 숨기고 비상하려 했다.
그런데 그 앞을 사신가의 이준이 막은 것이다.
황바울의 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검제와 뇌제, 철혈뇌후도 상대를 못 할 정도.
새로운 강자의 탄생.
한국으로선 축복이었는데 이준이 그걸 꺾어 버렸다.
물론 소문과는 달리 전생을 떠올린 박혁진이 황바울을 죽였지만 사람들은 이준이 그를 죽인 걸로 알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뒤늦게 황바울이 천외천의 마인과 관련이 있다는 게 밝혀져서 욕이 쏙 들어갔다는 것.
그게 아니었다면 아직도 사신가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으리라.
“예 조장! 명심하겠습니다.”
같은 청룡단 후임이 각 잡힌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장이라는 남자가 후임의 어깨를 툭 건드리는데.
후임의 발밑에서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누구….”
“욕망이 가득한 자여. 색욕의 주인께서 너를 쾌락으로 인도할 것이다.”
“…….”
“복종하고 따르면 네가 원하는 포상이 주어질 터다.”
교대하러 온 각성자의 눈이 흐리멍덩해졌다.
그림자에게 한꺼번에 정신 지배를 당해 버렸다.
‘안…돼!’
조장이란 남자가 저항해 보려 했지만 무의미했다.
속으로는 절규했으나 입 밖으로 음성이 새어 나오지는 않았다.
“너희의 주인이 누구라고?”
“색욕의 군주십니다.”
“오, 나의 주인이시여.”
그들은 하나 같이 하늘을 보며 말했다.
멀리서 보고 있다면 광신도 집단 같아 보일 거다.
“그래, 너희의 주인은 색욕의 군주 라넬 아데스 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사신가의 몰락을 원하신다.”
“사신가의 몰락….”
“주인께서 사신가의 몰락을 원하신다.”
“주인님의 뜻을 이루게 해 주는 것이야말로 종으로서 할 일.”
사신가의 각성자들은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 모습에 그림자들은 매우 흡족해했다.
매혹에 잘 걸린 상태.
이대로 사신가를 장악해서 멸문하게 만드는 게 그들의 역할이었다.
* * *
“사부님. 내상이 다 나았어요.”
[큼. 다 이 사부 때문이라는 걸 알거라.]
“혼원신공은 정말 위대해요.”
이준이 활짝 웃었다.
혼원신공의 우주 같은 포용력이 아니었다면 푸른 등불 꽃의 한기를 흡수하지 못했으리라.
혼원신공이니까 푸른 등불 꽃의 한기로 내상을 치료한 것이다.
그것도 6개월 이상은 정양해야 할 내상을 단 며칠 만에 낫게 했다.
이 얼마나 경악스러운 회복력인가.
푸른 등불 꽃에서 흘러나온 한기가 엄청난 치료제 역할을 하긴 했지만 이 모든 건 혼원신공 덕분이었다.
[내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다신 혼원반지를 빼지 말거라.]
“그럴 생각이에요. 아직은 제 몸이 못 버티는 것 같더라고요.”
[못 버티는 것 같은 게 아니고 못 버틴다.]
“예 알겠습니다. 사부님.”
[네놈이 아무리 천재라지만 이 사부와 천극자 사부님의 근골과 정신력만큼은 못 따라가느리라. 그러니 조심 또 조심하라는 것이다.]
무극자 사부의 입은 쉬지 않았다.
걱정하는 건 알지만 그게 계속되면 잔소리였다.
“네네.”
조금만 허투루 듣는다 치면 귀신같이 알아챘다.
[가아아아알! 이 사부의 말을 귀담아듣지 못할까아아!]
무극자 사부의 호통에 골이 흔들렸다.
이번에도 경지가 올랐건만.
사부의 호통은 어째, 더욱 심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사부의 경지를 따라가면 갈수록 그가 얼마나 대단한 위인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큭. 알겠습니다 사부님! 그만하세요.”
[크흠. 제자의 고통을 보니 사부의 마음이 편치 않구나.]
충분히 고통을 주고서야 멈췄으면서 무슨.
말과 행동이 다른 무극자 사부였다.
이준은 무극자 사부가 또 잔소리를 할까 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티틸. SS급 푸른 등불의 꽃 사신가로 가져다 줘.”
“테구르 님이 뚫어 놓은 통로로 가져다 놓을게요.”
“고마워.”
“아니에요. 전 꽃을 피워야 하니 테구르 님한테 운반해 달라고 할게요.”
“그렇게 해. 수고하고.”
“예 주인님.”
이준이 4대 성지의 금역에서 나왔다.
포탈을 타고 낙성각 방 안으로 나왔는데.
“이 엿 같은 냄새는 뭐냐.”
이준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힘을 온전하게 회복하니.
그의 기분에 따라 방 안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냉기가 가득한 방을 나온 이준이 고개를 돌렸다.
“사부님.”
[마족이다. 마계인이 사신가에 있구나.]
무극자도 단번에 파악했다.
“감히 내 영역에 들어와서 가솔을 건드려?”
이준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는 모르지만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구주에 마족까지. 가만히 있으니까 날 얼마나 무시하는 거냐.”
이준이 걸음을 옮겼다.
낙성각 연무장을 지나 가문의 중앙으로 갔다.
“무극단이 없으니까 엉망이네.”
무극단은 현재 사신가를 비운 상태였다.
금룡황가와 같은 놈들이 또 있지 않을까 조사하러 나간 상황이었다.
중앙 정원에 도착하기 전.
이준을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이 있었다.
“가주님? 이 시간에 어인 일이십니까?”
현무각주 이의태였다.
그가 이준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이준은 그를 향해 손을 내리 그었다.
번쩍!
허공이 갈렸다.
아니, 밤하늘에 뜬 달이 갈라졌다.
“헉!”
이의태가 눈을 부릅떴다.
이준의 갑작스러운 공격.
이의태가 아무리 S급 각성자가 됐다 하더라도 이준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니, 반응도 하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의태는 그대로 얼음이 된 채 두 눈을 질끈 감는 게 다였다.
반월의 수기가 이의태의 몸을 훑고 지나가자 어디선가 비명이 들려왔다.
“악!”
비명의 근원지는 이의태의 발밑이었다.
수기를 날린 이준이 어느새 이의태의 뒤에 나타났다.
그리고 비명을 지른 여자의 목을 지그시 밟고 있었다.
“정말 마족이네? 마계인이 왜 사신가에 왔을까 엄청 궁금해.”
“크어어어….”
여자 마족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준의 발에 힘이 들어갔다.
“으어… 내가 알려 줄 억!”
우직!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여자 마족의 목이 꺾이며 절명했다.
“너 따위한테 물어볼 필요도 없다.”
이준에게는 마족과의 협상 따위는 필요 없었다.
[모투술(S)이 발동했습니다.]
[상단전의 힘이 모투술(S)을 제어합니다.]
[지나갔던 과거의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상대를 죽이면 과거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나한테 죽었던 그 마족의 부모가 인계로 내려왔네.”
이준의 입꼬리가 말아 올려졌다.
자신의 손에 죽은 마계의 수문장과 한 여자아이.
실력도 안 되면서 오만하게 굴길래 죽여 버렸다.
마계에서 꽤 직책이 있어 보였으나 무슨 상관인가.
그녀는 마족.
인계에 내려오면 안 되는 종족이었다.
“신주가 제니퍼 가문의 가주 몸 속에 들어가 있는 것까지 내게 알려 주고, 덕분에 아주 좋은 정보까지 얻었어.”
이걸 일석이조라고 하나.
아무튼 뜻밖의 정보도 얻었다.
그것도 마계수를 통해 넘어왔다는 귀한 정보를 말이다.
“날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해 주지.”
이준이 회안을 번뜩였다.
차갑디차가운 겨울이 내려앉은 느낌.
그에게 다가오던 가솔들은 오싹함을 느꼈는지 걸음이 느려졌다.
“가주님…?”
마족에게 정신을 제압당했던 이의태가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신이 드세요?”
“예?”
“아니에요. 여기에 가만히 있으세요.”
이준은 다가오는 각성자들을 향해 기를 발산시켰다.
사신가를 뒤덮은 회색의 마기.
무극기가 위압감을 드러낸 채 먹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음껏 저항해 봐라.”
이준의 말이 끝나자 무극기는 가솔들의 발밑을 향해 파고들었다.
* * *
무극기는 마기 그 자체였다.
자기보다 약한 기운이 있다면 가차 없이 물어뜯어 소멸시켜 버린다.
마족이 가진 마력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의 힘도 마기.
무극기는 마력의 마기라도 약하다 싶으면 공격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컥!”
“아아악!”
“안 돼!”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순….”
“구, 군주시여!”
사신가의 각성자 발밑에 숨어 있던 마족이 바닥에 쓰러져 고통스러워했다.
이준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눈으로 손을 움직일 뿐이었다.
“커허억!”
이준이 허공에 손을 뻗은 채 손을 말아 쥘수록 마족이 제 목을 잡으며 켁켁거렸다.
우득-
천천히 고통을 주며 목을 꺾어 버렸다.
이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음 상대를 정했다.
그가 발로 마족 남자의 가슴을 밟고 입을 열었다.
“딱 너만 살려 줄게. 대신 잘 봐 둬. 나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네 주인한테 똑똑히 전해야 하니까.”
“끄으으….”
이준이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허공에 수백 자루 칼이 떴다.
이기어검술.
그의 경지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손목이 아래로 움직이자.
수백 자루 칼날이 떨어졌다.
퍽-
퍽퍽-
한데 이상한 건 그 칼날이 한 명에게만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통나무에 칼을 꽂는 연습을 하는 듯.
마족의 몸에 하나씩 박히는 게 아닌가.
이준의 발밑에 깔린 남자 마족의 눈동자가 떨렸다.
‘미, 미친놈이다!’
이준의 입가에는 호선이 그려져 있었다.
마족을 죽이면서 즐기는 모습.
악마처럼 보였다.
‘구, 군주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너무 위험한 인간이었다.
인간이 지닐 수 없는 힘을 가진 각성자.
인간이 강하면 얼마나 강할까라고 비웃었으나.
이자는 아니었다.
괴물.
그 옛날 마계를 지옥으로 만들었던 인물이 떠올랐다.
‘군주께서 위험해!’
오직 자신의 주인만 생각하는 남자 마족이었다.
칼춤이 끝나자 그다음은 더욱 잔악무도한 짓을 벌였다.
동료의 신체를 하나씩 터트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럴수록 이준의 미소는 짙어져만 갔다.
“야. 하나만 묻자.”
“…….”
마족 남자는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준은 개의치 않고 물었다.
“네 주인이 색욕의 군주였던가? 존나 약하면서 뭘 믿고 내 영역을 침범한 거냐.”
주인에 대한 모독.
발끈하고 나서야겠지만 남자 마족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준의 무자비한 손으로 인해 이미 공포에 잠식된 상태였다.
“가만히만 있으면 제일 나중에 죽여 줄 텐데 알아서 기어 나와 뒤지려고 하네.”
그의 말이 끝났다.
동시에 사신가에 침투한 색욕의 마족도 모두 죽었다.
단 한 명.
이준의 발밑에 밟혀 있는 남자만이 살아남았다.
그는 발을 치워 남자를 놔줬다.
“가서 네 주인한테 전해. 도망치든 싸워서 뒈지든 하나만 정하라고. 뭐 죽는 건 똑같아. 도망쳐도 얼마 못 가 나한테 잡혀 죽을 거거든.”
이준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미소가 피어나자 남자 마족이 실성했다.
“구, 군주님. 도망치셔야 합니다. 괴물이 옵니다.”
남자 마족은 아픈 몸을 이끈 채 색욕의 군주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참에 귀찮은 것들은 모조리 죽여야겠어.”
이준은 마족 남자가 향하는 곳을 이미 알고 있었다.
색욕의 군주가 숨은 곳.
각사학을 향해 그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