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1화
4대 성지의 금역.
로티틸 앞에는 무수히 많은 꽃이 이었다.
파란 꽃에서 흐르는 불빛.
푸른 등불 꽃이었다.
“또 실패했어.”
로티틸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S등급의 푸른 등불 꽃을 키우고는 있지만, 그 이상의 등급을 탄생시키지 못했다.
주인인 이준이 내어준 숙제.
로티틸은 이 숙제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의 심복인 펠리아스가 옆에서 위로를 했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요정왕이시어. 당신의 마음이 닿으면 푸른 등불 꽃도 응답해줄 겁니다.”
“그래야 할 텐데….”
로티틸은 요정왕.
페어리의 우두머리였다.
꽃을 피우는 건 로티틸의 전문.
그에게 꽃과 관련된 아티팩트의 등급을 올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나 계승의 꽃과 푸른 등불의 꽃은 차원이 다른 아티팩트였다.
요정왕인 그조차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꽃.
그렇기에 로티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어떻게요?”
“이곳에 페어리 필드를 펼치는 겁니다.”
“제가 이곳에 있으니 페어리 필드는 펼쳐져 있는 것과 다름없는데요.”
“요정왕의 영역과 힘을 담아 필드를 만드는 건 다릅니다.”
“마력으로 꽃을 직접 가꿔도 변화가 없는데 페어리 필드를 인위적으로 만든다고 달라질까요?”
“페어리 필드는 그저 첫 번째 시험에 불과합니다. 우선 펼쳐 보시지요.”
펠리아스의 말에 로티틸이 마지못해 페어리 필드를 펼쳤다.
로티틸의 주위로 초록빛이 반짝였다.
[요정왕 로티틸(블랙급 보스 몬스터)이 페어리 필드를 생성했습니다.]
[식물들이 과성장을 이룹니다.]
[페어리 종족의 모든 능력치가 두 배로 상승합니다.]
초록빛에 닿은 나무와 풀잎, 푸른 등불의 꽃에 생명이 가득 맺혔다.
생명력 가득한 페어리 필드가 펼쳐지니.
잡초조차 무성하게 자라났다.
“됐나요?”
“다음은 달빛을 소환하시는 겁니다.”
“네에!?”
로티틸이 화들짝 놀라했다.
달빛을 소환하라는 말은 푸른 등불 꽃을 향해 마력을 뿜어내라는 소리.
잘못하면 푸른 등불 꽃이 쑥대밭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해주시겠어요? 지금 달빛섬광을 사용하라는 말인가요?”
“제대로 이해하셨습니다.”
“미쳤어요? 달의 힘이 푸른 등불 꽃에 닿으면 시들어 죽을 거예요.”
“그러지 않을 겁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시는 거에요?”
“푸른 등불의 꽃은 불속성이 아닙니다. 얼음속성을 지닌 아티팩트입니다. 요정왕께서 잘 살펴보십시오.”
로티틸이 푸른 등불 꽃을 유심히 살폈다.
이름 그대로 파란색 꽃 주변이 불로 가득했다.
영락없이 불속성을 지닌 아티팩트.
블랙급 보스 몬스터인 로티틸이 속성을 잘못알리 없었다.
“이상…하긴 해요.”
푸른 등불 꽃에 손을 가져다 대자.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꽃의 주위에 불이 있으니 당연한 결과.
그런데 이 뜨거움 속에 차가움이 섞여 있었다.
자세히 살펴봐야 느껴질 정도랄까.
물론 이것만으로 얼음 속성도 있다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제가 푸른 등불 꽃을 연구해본 바로는 꽃잎에 비밀이 숨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꽃잎이요?”
“자 보십시오.”
펠리아스가 푸른 등불 꽃의 꽃잎을 하나 땄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꽃잎을 계속 따면.”
펠리아스의 손이 움직일수록.
뜨거운 기운이 더욱 발산됐다.
손을 녹여 버릴 듯한 양기였다.
꽃잎이 반 정도 남게 됐을 때는 펠리아스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엄청난 열기를 발산합니다. 이 과정에서 요정왕과 저희는 꽃의 속성이 불속성이라고 확신한 겁니다.”
그가 다시 하나의 꽃잎을 다는 순간!
그의 손을 얼려버릴 듯한 지독한 냉기로 인해 꽃을 떨어트려 버렸다.
“제 한계는 여기까지입니다. 페어리 필드를 받고도 꽃잎을 반밖에 따지 못했습니다. 요정왕께서 한 번 꽃잎을 따보십시오.”
펠리아스가 푸른 등불 꽃을 하나 꺾어서 로티틸에게 넘겼다.
로티틸은 펠리아스의 제안대로 꽃잎을 따기 시작했다.
그에게 꽃잎을 따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명색에 블랙급 보스 몬스터.
펠리아스처럼 식은땀도 흘리지 않았다.
드디어 절반 가량의 꽃잎이 사라지고 펠리아스가 놓쳤던 구간에 들어왔다.
로티틸은 지체없이 꽃잎을 하나 더 땄다.
그러자 꽃에서 흐른 냉기가 로티틸의 손을 얼려버릴 기세로 공격했다.
“엇.”
로티틸이 흠칫했다.
그조차도 참기 힘든 냉기였다.
“작게 느껴졌던 기운이 이건가요?”
“그런 듯합니다. 더 꺾어보십시오.”
로티틸이 빠르게 꽃잎을 땄다.
꽃잎이 하나씩 떨어질수록 빛을 발하던 불에서 열기는 사라지고 지독한 한기만이 흘러나왔다.
얼마나 기운이 대단했으면 로티틸의 이마에도 식은땀이 흘렀다.
화기는 견뎌냈는데 냉기는 로티틸조차도 버거웠다.
“제가 했던 말이 맞지 않습니까?”
“그러…네요….”
“이제 그만 놓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로티틸은 마지막 꽃잎을 따지 못했다. 이대로 딴다면 그대로 온몸이 얼어버리지 않을까.
아니, 얼어버릴 것이라 확신했다.
“후우우.”
로티틸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마력을 돌려 안정감을 찾았다.
그가 안정되자 펠리아스가 입을 열었다.
“달빛을 소환해도 된다고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제 힘으로는 푸른 등불 꽃을 파괴할 수 없네요.”
“무례한 말이긴 하지만 맞습니다.”
“펠리아스는 달빛을 이용해 푸른 등불 꽃의 얼음 속성을 자극하자는 말이군요.”
“제대로 맞추셨습니다.”
“해 볼 만한 시도예요.”
푸른 등불 꽃의 숨겨진 음기.
무언가 있지 않을까란 기대감이 들었다.
로티틸이 푸른 등불 꽃의 가운데로 날아갔다.
공중에 뜬 그가 팔을 하늘 위로 올렸다.
그의 몸에서 마력이 줄기차게 흘러나왔다.
한곳으로 모여든 로티틸의 마력.
4대 성지의 금역에 작은 진동이 일어났다.
얼마나 튼튼한 게이트면 블랙급 보스 몬스터가 최선을 다해 만든 기운에도 작은 진동이 다였다.
괜히 사신수가 모여 사는 곳이 아니었다.
로티틸의 하늘 위에 동그란 구체가 생겼다.
달 모양의 마력 덩어리.
그 달이 로티틸의 몸을 비추자.
그의 입이 작게 움직였다.
“달빛섬광”
로티틸의 음성이 끝남과 동시에 달에서 빛이 뿜어졌다.
그 빛은 푸른 등불 꽃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공격 스킬이라 꽃이 핀 바닥이 쑥대밭이 되야 정상.
하지만 푸른 등불의 꽃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다만 단번에 꽃잎 절반이 날아갔다.
펠리아스와 로티틸이 지독한 냉기를 느낀 구간에 들어가자 신기한 일이 펼쳐졌다.
“내 예상이 맞았다….”
이를 지켜본 펠리아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꽃잎이 전부 떨어지자 새로운 꽃으로 탄생되고 있었다.
얼마 안 변하지만 분명 S등급의 꽃이 그 윗단계로 진화한 것이다.
“하아아아.”
로티틸의 허리가 반쯤 앞으로 꺾였다.
힘든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가 마력을 회수하자 달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요정왕님 새로운 꽃이 피었습니다.”
“하아. 어떤 가요?”
펠리아스가 새로운 꽃을 유심히 살려보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했다.
“더, 더블S입니다!”
S등급 푸른 등불 꽃이 SS등급으로 변했다.
기어코 꽃의 등급을 상승시켜버렸다.
“주인님께서 좋아하시겠다!”
힘든 와중에도 활짝 웃는 로티틸이었다.
* * *
이준이 사신가에서 정양한 지 한 달째.
지금까지도 내상은 완치가 되지 않았다.
혼원반지가 봉인한 힘의 막강함이었다.
얼마나 강했으면 이리 회복이 더딜까.
이준도 진저리가 났다.
‘사부님 그만하면 안 돼요?’
[매를 버는구나 제자야.]
‘이 정도면 괜찮아진 것 같은데요.’
[고작 그런 머저리 같은 놈들을 상대로 혼원반지를 뺐다는 것이, 네가 약하다는 걸 증명한 것이니라.]
‘아직 제자가 미흡하여….’
[일없다 이놈아! 본좌의 제자라고 어디가서 말하기만 해 보거라. 본좌가 네놈의 다리 몽둥이를 부러트리고 말 것이다. 쯧. 사부님께서 이 사실을 아셨다면 못난 제자가 사신문을 망쳤다고 책망하셨을 것이니라.]
무극자 사부가 눈을 부라렸다.
노인이 눈에 힘을 주니.
괴팍한 성격의 노인이라는 게 한눈에 보였다.
특히 태사부와 관련을 지으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무극자 사부였다.
‘앞으로는 잘 할게요. 그래도 검주와 혈주를 동시에 보냈잖아요.’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네가 죽을 뻔하지 않았느냐.]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네?’
[일 없다. 쯧.]
무극자 사부가 눈을 감아 버렸다.
이준은 하루 빨리라도 운공을 때려 치우고 싶었다.
내상을 치유하는 동안 귀는 열려 있었기 때문.
박정연과 박혁진의 대화를 들었다.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
박정연과 박혁진의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다른 사람이 있는 듯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무극자 사부를 아는 것 같았다.
‘사부님.’
[에잉.]
두 사람에 대해서 물어보려는데 무극자 사부가 들은 체도 안 했다.
‘진천사신무가 뭐예요?’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혁진이랑 정연 누나가 이야기하는소릴 들었어요.’
[그 아이들이!? 진천사신무는 네 태사부님과 나 말고 아는 사람이 없을 건데.]
‘그러면 걔들이 어떻게 아는 거지? 두 분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어요?’
[세 명 정도가 알겠구나.]
‘누구요?’
[뇌전검문의 아이들.]
‘사부님 정도면 뇌전검왕하고 뇌후만 상대하셨을 것 같은데 나머지 한명은요?’
[뇌봉이라고 뇌후 언니가 알고 있다.]
‘뇌봉? 뇌후한테 언니가 있었나?’
의문이 생겼다.
박혁진과 박정연이 특성을 얻을 때 설명란을 보았다.
거기에는 뇌전검왕과 뇌후란 이명은 있었어도 뇌봉은 없었다.
그러니 의아한 것.
그것도 둘째나 막내가 아닌 첫째라는 사실이 더욱 궁금증을 유발했다.
[꽃을 피우기도 전에 죽었지. 그 시절 뇌봉이 죽지 않았다면 뇌가는 첫째에게 멸문당하지 않았을 터다.]
‘평가가 그 정도예요?’
[첫째와 자질이 거의 비슷했느니라.]
‘와, 빨리 죽은 게 안타깝겠네요.’
[그보다 아이들의 정보창을 보긴 해야겠구나. 진천사신무를 아는 거면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을 듯싶다.]
‘새로운 현상이라니요?’
[직접 확인해보거라.]
‘그럼 운기를 끝내도 돼요?’
[그러려무나.]
이준은 무극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 전체로 흘려보냈던 내공을 단전에 몰아넣었다.
이 지긋지긋한 생활에서의 탈출에 신이 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경공을 펼치다가 이내 섰다.
“아. 까먹은 게 있어요.”
[무엇이냐?]
“삼두는 어떻게 됐을까요?”
[염라대왕에게 물어보니 괜찮다더구나.]
“구주가 정말 강하긴 한가보네요. 지옥의 수문장도 패하는 걸 보니.”
[본좌 앞에서는 쥐새끼일 뿐이니라.]
삼두가 괜찮다고 하니 이준은 다시 경공을 펼쳤다.
그의 목적지는 철혈검가였다.
빌딩이 빠르게 지나갔다.
탁-
땅에 내려앉은 이준의 눈앞에는 박혁진이 웃통을 벗고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게 보였다.
“검로가 완벽해졌는데? 내공이 조금 흔들릴 뿐. 다른 건 딱히 건드릴 게 없어.”
이준이 보기에는 그랬다.
너무나도 완벽한 검로였다.
마치 검이 지나가는 곳이 길이라도 된 듯했다.
가르칠 게 있다면 도와주려 했지만.
손 볼 곳이 없자 계속 지켜봤다.
박혁진이 검무를 끝내며 고개를 돌렸다.
“준이? 여긴 왜 왔어? 내상은 다 치료한 거야?”
자신이 알던 박혁진이었다.
다만 내부는 그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껍질은 같으나 내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너 어떻게 된 거냐.”
“직접 봐봐.”
박혁진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모든 짐을 훌훌 털어버린 얼굴이랄까.
저 모습은 자신의 힘에서 나오는 여유였다.
이준은 박혁진의 상태창을 열었다.
그런데 안 보이던 특성이 즐비하게 늘어선 게 아닌가.
무엇보다 등급이 SS에서 SSS+로 올라가 있었다.
“너!?”
“이제 걱정 안해도 된다. 앞으로 내가 널 도울 수 있어.”
전혀 다른 사람이되 예전과 같은 사람.
박혁진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각성자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