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9화
살주가 움직였다.
박혁진의 품으로 파고든 그가 옆구리를 향해 칼을 그었다.
한데 예상과는 다른 결과가 나왔다.
까앙!
쇳소리와 함께 살주의 검이 튕겨 나갔다.
그것도 모자라 단 일 합 만에 검의 이가 나가 버렸다.
“!?”
살주의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
거대한 검압에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이 내가. 살의 주인이 애송이 하나한테 겁을 먹었다는 말이냐!’
믿기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상대는 고작 스무 살밖에 안 되는 꼬맹이였다.
구천옥에서 억겁의 시간을 보내며 자연경의 경지에 오른 자신과 대적하려면 백만 년은 일렀다.
한데!
어떻게 자신의 검을 막아냈단 말인가.
갑자기 변한 저 기도는 뭔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었다.
‘기운이 더 커지고 있다. 정말 위험해.’
살주는 박혁진을 꼭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이상 놔뒀다간 정말 큰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여겼다.
살수로서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저대로 두면 위험하다고.
빨리 걸림돌을 치우라고 재촉했다.
‘죽인다.’
살주가 다시 한번 움직이려 할 때였다.
파직-
그의 얼굴을 훑고 지나간 한줄기 뇌전.
볼을 타고 핏방울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살주의 손이 상처 난 부위를 매만졌다.
“피….”
몸 곳곳에 상처가 나 있기에 대수롭지 않았다.
놀란 건 피가 흘러서가 아니라 반응을 못 해서였다.
살수는 고도의 감각을 지닌 존재였다.
특히 살의 주인에 올라있는 게 바로 자신.
한데 적의 공격에 반응하지 못했다.
더욱 가관인 건 애송이의 말이었다.
“아직 완전하지 못해서 목을 못 따버렸네.”
우득.
우두둑.
박혁진이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무언가 홀가분한 표정.
더 정확하게는 무언갈 깨달은 얼굴이었다.
* * *
[특성 뇌전검왕(진)이 삭제되었습니다.]
[각성을 하였습니다.]
[전생의 기억이 물밀듯 들어옵니다.]
[삭제된 특성 대신 새로운 조건의 특성을 찾고 있습니다.]
[1%………100%]
[새로운 특성을 찾았습니다.]
[특성 뇌제(SSS)가 개화했습니다.]
[특성 뇌검의 주인(SSS)이 개화했습니다.]
[특성 뇌전검문의 가주(SSS)가 개화했습니다.]
[특성 상처 입었던 전생(SSS)이 개화했습니다.]
[잠재 등급이 SSS로 상승했습니다.]
[각성자 등급이 SS에서 SSS+상승했습니다.]
박혁진에게 메시지가 계속해서 날아왔다.
살주의 검을 막고 날려버리기까지 한 그가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전생의 기억을 깨달은 게 좋은 건지 헷갈려.”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그였다.
몸 상태는 뇌신공을 돌려봐서 안다.
내부가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하지만 ‘상처 입었던 전생’의 특성으로 인해 빠르게 회복하고 있었다.
[상처 입었던 전생]
종류: 특성
등급: SSS
설명: 당신은 전생에 크나큰 좌절을 맛봤습니다. 믿었던 사람의 배신, 라이벌에게 패배, 뇌가의 가주로서 지키지 못한 명예 등.
여러 좌절감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이로 인해 상처 입은 사자가 모습을 감춰야만 했습니다.
사자가 이 크나큰 상처를 스스로 깨닫게 된다면 그 어떤 고난과 역경도 극복할 힘을 얻게 될 겁니다.
효과: 뇌전검왕이 가진 모든 무공이 한 등급 상승합니다.
*전생의 기억으로 인해 회복력이 세 배가 됩니다.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집니다.(경험치 획득률 2배.)
뇌신공이 박혁진의 내부를 돌아다니면서 상처를 냄과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회복시키고 있었다.
혈맥이 그 전보다 두 배는 더 커졌다.
내공의 양도 점점 늘어났다.
박혁진이되 박혁진이 아닌 존재.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어 거대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지금은 눈앞의 일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겠지. 저런 버러지 같은 신비선문의 악인은 가볍게 죽일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박혁진의 말에 살주의 눈이 커졌다.
신비선문은 그와 혈루곡 살수만이 아닌 비밀이었다.
신비선문은 도주의 도풍선문과 더불어 오악선문에 속한 문파였다.
고려의 수많은 무문 중에 하나였으며 중원에선 혈루곡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불리었다.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는 것이냐!”
“내 무공을 보고도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 해. 멍청한 건 여전하구나. 점소이.”
“저, 점소이!?”
“큭.”
도주가 웃음을 꾹 참았다.
그러면서 박혁진을 유심히 살폈다.
어떻게 점소이라는 단어를 입에 뱉었을까.
마치 살주의 과거를 다 아는 듯한 눈빛을 가지고 있자 궁금했다.
“백정 너는 여전히 점소이랑 붙어 다니냐.”
“뭐?”
박혁진의 광역 도발에 도주가 어이없어했다.
“많이 컸어. 내 말에 바로 대답도 안 하고 말이야.”
박혁진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살주와 도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모욕적인 언사에 표정이 굳어진 게 아니었다.
다른 느낌.
자신들이 꽁꽁 숨기고 싶어 하는 모습을 알고 있달까.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박혁진이 사라졌다.
기존의 그도 빨랐으나.
현재의 그는 빛 그 자체였다.
심지어 살주와 도주도 그의 움직임을 쫓기 위해 빠르게 눈알을 굴리고 있지 않나.
하나 그는 눈보다 빨랐다.
“절사.”
그의 음성이 끝나기도 전에 허공에 피가 뿌려졌다.
“악!”
살주가 자신의 어깨를 붙잡았다.
있어야 할 어깨가 사라진 상태.
그것도 검을 잡는 오른팔이 잘려 나갔다.
“살주!”
도주가 살주를 크게 불렀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철컥.
살주의 뒤에서 검을 검집에 집어넣는 소리가 들린 순간.
살주의 두 다리가 잘려 나갔다.
“어떻게!?”
도주의 입이 떡 벌어졌다.
반응도 제대로 못 했다.
아무리 지옥의 수문장과 싸워서 기력이 많이 딸린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리 없었다.
자신들은 무려 자연경의 경지에 있는 무인 아닌가.
각성자 따위에게 질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더 가관인 건.
“아직 적응이 안 돼서 한 번에 자르지 못했어.”
태연스럽게 말하는 박혁진이 괴물로 보이기 시작했다.
“네놈! 뇌전검왕의 무공을 이었구나!”
도주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에게 있어서 파천혈신을 제외하고 제일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바로 뇌전검왕 연우였다.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나 언제나 위에 존재하던 자.
개백정인 자신과는 완전 반대의 삶을 사는 도련님이었다.
사람들은 몰랐다.
항상 바르고 올곧은 사람이라고 치켜세워졌던 자가 망나니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검법 연마를 핑계로 얼마나 그에게 맞았나.
도풍선문 가주의 눈에 들고서야 훈련용 목각인형 신세를 벗어날 수 있었다.
강해져서 이 치욕을 반드시 갚겠다고 벼렸건만…
무공을 배우면서 깨닫게 되었다.
뇌가의 도련님.
후에는 뇌전검왕이라 불리는 자는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중원의 신마회를 끌어들여 뇌전검왕을 죽이는 데 일조했다.
그와는 질긴 악연.
한데 저 애송이가 그 뇌전검왕의 무공을 잇고 있었다.
“뇌전검왕의 무공을 이어? 내가? 멍청한 거야 아니면 진짜 눈치가 없는 거냐.”
박혁진이 피식 웃었다.
뇌전검왕은 본인 자신.
그런데 도주는 자기보고 뇌전검왕의 무공을 이었단다.
이 얼마나 웃긴가.
“모르면 가르쳐 줄게. 내가 누구인지.”
검을 집어넣었던 박혁진이 손가락으로 검파를 밀어 올렸다.
“뇌전검왕의 무공을 익힌 걸 후회하게 해주마.”
도주에게 뇌전검왕 연우는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인물이었다.
그의 무공을 익힌 박혁진 또한 죽어야 했다.
그와 관련된 놈은 모조리 죽여야만 분이 풀리는 도주였다.
하나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도주의 몸에서 핏줄기가 솟아올랐기 때문.
오히려 당한 사람은 도주였다.
“크헉!”
도주가 쓰러지면서 피를 울컥 토했다.
안 그래도 내상이 깊었는데 몸에 새로운 검상이 수십 개나 생긴 게 아닌가.
웃긴 건 새로 생긴 검상이 기묘하게 급소를 피해 갔다.
“이래도 나를 몰라?”
박혁진의 음성은 도주에게 들리지 않았다.
도주의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이었다.
검상 때문에 떠오른 옛날의 악몽.
어렸을 적 뇌전검왕에게 당했던 상처와 고통이 숨을 턱 막히게 했다.
“죽여… 버리겠다!”
도주가 이성을 잃었다.
그의 눈동자가 혈안으로 변했다.
마기의 폭주.
아니, 지옥의 기가 폭주한 것이다.
오직 살육만을 갈망하는 악마로 변했다.
“크아아아악!”
도주가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그의 기세가 주변을 뒤덮었다.
“미쳤네. 쯧. 광인이 됐으면 죽여야지.”
박혁진은 대수로워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죽이면 그만이니까.
전이었다면 몰라도 지금은 도주를 죽일 힘이 있었다.
“천월아. 오랜만에 날아볼까.”
우웅!
그의 무기인 천월이 전보다 더욱 웅장하게 울었다.
마치 옛 주인을 만나 기뻐하는 모습이랄까.
그도 천월의 대답에 응답했다.
천월을 공중에 띄우자.
그의 손에는 무형검이 생겨났다.
무형검을 뒤로 당기며 눕히자.
천월도 덩달아 검신을 수평으로 눕혔다.
웅웅!
천월의 떨림이 박혁진에게 전해졌다.
“은사격.”
그의 목소리와 함께 무형검이 일식적으로 뻗어갔다.
그 속도는 가히 빛을 연상케 했다.
천월 또한 무형검을 따라 날아갔다.
목표는 도주.
정확히는 도주의 얼굴이었다.
도주가 무형검을 향해 무형도를 휘둘렀다.
무형검은 너무도 쉽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여전히 멍청해.”
하나 그건 무형검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퍼벅!
무형도에 잘린 무형검이 그대로 도주의 가슴팍에 박혔다.
“큭. 크르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주는 쓰러지지 않았다.
고통을 못 느끼는 대신 광기를 택한 것.
박혁진을 향해 반격을 하려는데.
퍽-
천월이 도주의 얼굴에 박혔다.
천월에서 흐른 뇌전이 도주의 얼굴을 타고 전신으로 흘렀다.
그 때문에 도주의 신형이 부르르 떨렸다.
“백정 놈 치고는 꽤 강해졌지만 나한테는 안되지.”
박혁진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월에서 강한 뇌기가 발산됐다.
그러더니 도주의 몸을 그대로 터트려 버렸다.
“그러게 날 왜 깨워.”
도주를 순식간에 해치운 박혁진이 몸을 돌렸다.
그가 살주를 보았다.
“으으….”
살주가 신음을 토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넌 내가 누군지 알았지?”
“연… 우.”
짝-
살주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내가 네 친구냐. 도련님 붙여야지.”
“사, 살려줘…”
“날 죽이는데 일조한 놈을 내가 왜 살려줘야 하지?”
“잘못했, 아악!”
살주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박혁진이 살주의 남은 팔마저 잘라 버렸기 때문.
살주는 사지를 전부 잃어버렸다.
“오악선문 이 새끼들 전부 살아 있지? 지옥에 가서 똑똑히 봐 둬라. 내가 남은 놈들을 어떻게 죽이는지 말이야.”
박혁진이 살주의 심장에 천월을 박아 넣었다.
살주가 죽자 고요해졌다.
그토록 강한 두 명이 순식간에 사라진 게 아닌가.
아군은 박혁진의 달라진 모습에 입을 열지 못했다.
* * *
지옥계 사자전.
그곳 침상에는 죽은 듯 일 사자가 누워있었다.
“일 사자의 상태는 어떠하냐.”
염라대왕의 물음에 지옥계 소속 의원이 대답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다행이구나.”
“오랜 요양이 필요할 겁니다.”
“지옥환이라도 내어줄 터이니 예전 그대로 돌려놓거라.”
지옥환은 지옥계에서 가장 귀한 영약이었다.
가장 열심히 일한 관리자에게나 주어지는 보상.
이것도 몇백 년에 한 번씩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그토록 귀한 걸 단번에 내준다고 하니.
염라대왕이 얼마나 일 사자를 생각하는지 아는 대목이었다.
“성심을 다하겠나이다.”
“대왕!”
“환자가 있는데 목소릴 낮춰라.”
“급한 보고이옵니다.”
“말하거라.”
“사자서각에 보관되어 있던 뇌전검왕의 책이 사라졌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각성했구나.”
“놀라지 않으십니까?”
“예상하고 있었다. 혹, 뇌봉의 기억은 안 사라졌느냐?”
“책이 희미해지고 있긴 합니다.”
“뇌봉도 곧 각성을 하겠구나. 본왕이 눈여겨보라고 한 책들을 한 시도 허투루 보지 말라.”
“명심하겠나이다.”
사자서각의 관리자가 고개를 조아렸다.
사자서각은 말 그대로 죽은 자들의 기억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그곳에는 뇌전검왕과 뇌봉, 검후와 투존 등의 기억이 있었다.
이들은 이미 환생한 존재들.
그저 전생의 기억은 떠올리지 못할 뿐이었다.
지금처럼 각성한다면 사자전각의 책이 사라지고 전생의 기억을 되찾게 된다.
“머지않아 많은 이들이 각성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