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7화
“일 사자. 정말 이대로 싸우실 생각이십니까?”
적의 전력은 저승사자들만으로 어찌 해 볼 수준이 아니었다.
지옥의 야차와 나찰까지 모두 합세해야지만 상대가 가능했다.
“살주와 도주는 나와 수문장이 막으면 된다. 나머진 너희가 해결할 수밖에.”
적은 최소 현경에 있는 죄인들이었다.
강한 죄인은 대부분 생사경.
자칫하다가는 저승사자 대부분이 죽을 수 있었다.
“저자가 깨어나면 판은 뒤집어질 것이다.”
일 사자는 결계 안에 있는 이준을 가리키며 말했다.
상황을 반전시킬 힘을 가진 인물.
그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 알기에 모습을 드러낸 거다.
저승사자는 성공하지 못할 일에는 나서지 않는 게 원칙이었으니까.
멋지게 등장한 것과는 달리.
사자들이 잔뜩 움츠러들어 있다는 걸 인지한 살주가 비릿하게 웃었다.
“무엇을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앞에 나타난 건 실수다.”
살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혈루곡의 살수들이 움직였다.
“대응하라!”
이에 저승사자들도 검을 빼 들고 맞섰다.
“여기가 인계라곤 하나 너희들쯤은 잡아들일 수 있다.”
일 사자와 살주가 붙었다.
두 사람의 검이 교차했다.
쾅-
부딪혀서 생긴 기파가 주위로 퍼졌다.
두 사람의 검이 어지럽게 얽혔다.
귀를 연신 때리는 쇳소리.
기파와 함께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검격이 난무했다.
서로 실력이 비슷한지라 상처도 입지 않았다.
“크큭. 그 무섭다는 일 사자의 실력이 고작 이 정도라는 말이냐.”
살주가 일 사자를 비웃었다.
일 사자는 지옥의 사신.
구천옥의 죄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한데 지금은 자기와 동수를 이루고 있으니.
살주의 입장으로선 얼마나 통쾌하겠나.
구천옥에선 일 사자의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싸움을 입으로 하나?”
까강!
손을 나눈 게 꽤 됐음에도 결판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많이 다급한 모양이군.”
살주가 도발했다.
그의 미소에는 여유가 있었다.
느긋하게 검을 계속 나눠도 좋다는 표정.
그의 미소에 일 사자의 미간이 구겨졌다.
살주와 검을 겨루고 있음에도 일 사자의 눈동자는 바빴다.
분전하는 저승사자들.
오대가문과 마벽의 아이들도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불안했다.
언제 저 균형이 깨질지 몰랐으니까.
보는 것만으로도 위태롭게 느껴졌다.
“전력을 다해 날 쓰러트려 보아라. 그래야 네놈의 수하들을 한 명이라도 구하지. 큭큭.”
“너 따위가 걱정할 건 아니다.”
평온한 말투와는 달리 검격에서 다급함이 느껴지는 일 사자였다.
그가 무리하게 저승의 기운을 높였다.
살주를 빨리 처리하려고 힘을 더 사용했다.
하나 그건 살주가 바라던 바.
강한 힘을 사용하는 건 준비 동작이 크다는 뜻.
고수끼리의 대결에서는 아주 작은 틈도 커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살주는 동작이 커진 일 사자의 틈을 파고들었다.
자세를 낮춰 일 사자의 품으로 파고든 살주.
그의 검이 아래에서 위로 그어졌다.
푸확-
일 사자의 앞섶이 베였다.
검은 무복이 잘린 자리에는 피가 흥건하게 물들어 있었다.
“큽!”
“내 앞에서 한눈판 대가다.”
일 사자가 뒤로 몸을 뺐다.
살주는 여전히 여유로운 자세를 취했다.
먼저 상처를 입은 쪽은 일 사자.
외상과 내상을 한꺼번에 입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는 악화될 거다.
싸움을 빨리 끝내는 게 최선.
그렇지 못하면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게 될 터였다.
한편.
삼두와 도주도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살주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일 사자를 본 삼두가 혀를 찼다.
[쯧. 멍청한 놈. 정신을 한곳에 집중해도 모자랄 때.]
구천옥의 주인들을 상대함에 있어 한눈을 파는 건 자살행위였다.
지옥계라면 몰라도 온전한 힘을 사용하지 못한 사자로선 치명적인 실수.
이미 전세는 기울어져 버렸다.
삼두는 도주와 최대한 거리를 벌리며 공격했다.
지옥의 기운을 이용해 도주가 다가오는 걸 막았다.
“치사하게 싸우는 건 여전하구나!”
[네놈에게 치사하다는 말을 들으니 뿌듯한데?]
삼두는 도주의 도발에도 걸려들지 않았다.
마음만 급하면 일 사자처럼 당한다.
자기까지 당하면 끝장이었다.
[살주보다 네가 더 강한 게 아니었어? 왜 살주가 더 강해 보이지?]
오히려 도발은 삼두가 걸었다.
구천옥의 주인끼리는 경쟁자의 관계.
서로 같은 편이기도 하나.
언제든 기회가 되면 자빠트리려는 관계이기도 했다.
“오냐. 너를 본보기 삼아 내 강함을 증명해 보이마.”
도주의 몸에서 폭발적인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속에는 세 가지 기운이 섞여 있었다.
하나는 마기, 다른 하나는 지옥의 기운.
그리고 나머진 백호의 힘이었다.
[사신수의 힘까지 있는데 영 형편없어.]
삼두는 계속 도발하며 자리를 옮겼다.
“죽어엇!”
화가 머리끝까지 난 도주가 무형도를 사선으로 그었다.
무형의 도기였다.
형태가 보이지 않지만 기운으로 느낄 수 있었다.
수십 가닥이 아닌, 한 가닥의 줄기.
거대한 반월 모양의 무형도기였다.
계속 움직이던 삼두가 가만히 있는 게 아닌가.
이를 본 도주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지옥의 수문장이 내 힘에 짓눌려 몸이 안 움직이나 보구나.”
도주가 호탕하게 웃을 때였다.
반월의 무형도기가 삼두에게 닿으려고 하는 순간, 몸이 사라졌다.
“억.”
“미친!”
두 사람의 눈동자가 동시에 커졌다.
삼두의 뒤편에 있던 이는 바로 살주였다.
일 사자를 정신없이 몰아치고 있는데 뒤에서 거대한 기운이 느껴져서 뒤를 보았다.
그런데 웬걸.
도주의 무형도기가 자신에게 날아오는 게 아닌가.
피하는 것도 늦어서 맞받아쳐야 했다.
쾅-
“저 병신 새끼가 큭!”
무형도기가 살주에게 폭사했다.
그 장면을 본 도주가 부들거렸다.
삼두에게 농락당했다고 여겼다.
“감히 나를 가지고 놀았단 말이냐!”
[도발에 넘어가 공격한 건 너인데 나에게 웬 지랄?]
삼두는 굉장히 깐족거렸다.
흑염마조와 같이 위엄 있는 목소리를 내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싸움이 시작되니 위엄은 어디다 버리고 입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이익!”
[꼭 실력도 없는 것들이 발작을 잘해요. 도의 주인? 대체 어떤 놈이 저놈보고 도의 주인이라고 한 건지 쯧쯧. 갖다 버려라.]
“으아악!”
도주가 무형도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무형도에서 뿜어지는 도기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애꿎은 땅과 나무를 때려 댔다.
[쳇. 너무 도발했나.]
아이들에게 폭사하려는 무형도기에 삼두가 빠르게 움직여 막았다.
[애들은 괜찮나?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삼두는 박정연과 아이들을 걱정했다.
옷은 너덜너덜.
그 사이로 보이는 피.
피로 가득한 얼굴.
바닥을 보이는 내공 등.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긴장감도 배로 들 것이고 자기보다 한참은 강한 이들을 상대했으니.
심력 소모가 두 배는 훌쩍 넘을 터.
서 있는 것만도 용했다.
[조금만 더 버텨 봐라.]
* * *
시간이 꽤 흘렀다.
선유도 게이트는 거친 숨으로 가득했다.
“허억….”
“…후욱….”
박정연은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숨을 가쁘게 쉬며 벽운을 지팡이 삼아 간신히 버텼다.
“하악… 지안아, 괜찮 하악… 아…?”
“네 허억… 괜찮아요… 허억.”
현재는 소강상태였다.
누구 하나 죽지 않았다.
대신 남선호와 박은비, 홍엽상이 많이 다쳤다.
박혁진 또한 마찬가지.
그가 다리를 절뚝거렸다.
그럼에도 검을 세우며 적을 경계하고 있었다.
“…누나 후욱 여기서… 준이를 데리고 빠져나가 후욱… 자….”
“운기 중인 준… 이를 데리고?”
“여기서 죽을 순 없잖아. 저분들이 도와줄 때가 기회야.”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갑자기 나타난 검은 무복의 인물들 때문이었다.
새로 나타난 적을 거의 잡아 준 사람들.
경이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한계에 부딪힌 듯 보였다.
“파랑이가 금역 게이트를 열 수 있지 않아?”
[못 해. 여긴 절대종의 영역이라 주인의 힘이 필요해.]
“그럼 입구로 가는 방법밖에 없어.”
박정연이 모두와 눈을 마주쳤다.
“파랑아, 준이랑 부상자들을 부탁해.”
[응. 걱정 마.]
그들은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적의 위험함을 알게 됐으니 어쩔 수 없었다.
비록 백호가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사람이 있었다.
이준.
패색이 짙어 이준을 지킬 수 없었다.
그러니 그를 데리고 게이트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래야지만 목숨을 살릴 수 있을 테니까.
파랑이가 이준이 있는 결계로 갔다.
[주인. 운기 멈출 수 있지?]
[…무리야.]
[그럼 내가 손을 대는 건 가능해?]
[그건 가능해. 왜?]
[게이트를 탈출하기로 했어.]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거야?]
[응. 그래도 애들은 한 명도 안 죽었으니까 안심해.]
[다행이네. 조금만 더 버틸 수 있어?]
[그럴걸? 사자들이 도와줘서 가능해.]
[조금만 더 부탁해.]
[응! 맡겨 줘.]
파랑이가 검은 아지랑이를 이용해 이준을 등에 태웠다.
원래 운기 중에 건드리면 주화입마에 빠지는 게 다반사.
하지만 이준은 혼원신공이라는 희대의 무공을 익혔다.
움직이는 상태로도 운기가 가능한 내공이라 파랑이가 건드려도 주화입마에 빠지지 않은 거다.
이준을 등에 태운 파랑이가 아이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나머지도 올라타.]
남선호와 박은비까지 파랑이 등에 올라탔다.
[가!]
박정연의 전음에 파랑이가 출구를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박춘식과 정심호가 맨 뒤에 서려고 하자.
“뒤는 제게 맡기세요.”
박정연이 먼저 선수를 쳤다.
“같이 가자꾸나.”
“당연히 갈 거예요.”
그녀 또한 마지막으로 경공을 펼치자.
“어딜 도망가는 것이냐!”
“저 잡것들을 잡아!”
살주와 도주가 버럭 소리쳤다.
[너희 상대는 나다.]
삼두가 지옥의 불꽃인 암화를 활활 태웠다.
남은 저승사자들도 비장하게 앞을 가로막았다.
그때였다.
“이제야 생각났어! 저놈 파천혈신과 무슨 관계냐!”
도주가 삼두를 향해 물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갑자기 파천혈신은 왜 나와?”
“무공이 비슷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수문장과 사자들이 기를 쓰고 돕는 걸 보면 저 녀석 파천혈신과 관련 있는 걸로 보인다.”
이준은 도주를 상대할 때 딱 한 번.
패친이공인 진천을 사용했다.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진천을 사용하니.
본래의 위력보다 훨씬 약했으나.
그래도 패천이공이었다.
도주가 겪은 파천혈신의 무공도 패천이공.
이준이 어설프게 따라 해 헷갈렸지만 이제 알게 됐다.
그가 파천혈신과 연관이 있다는걸.
조금만 일찍 깨달았다면 이준부터 잡았을 것이다.
“정말이냐!”
“구천옥에서 파천자가 쓴 무공과 비슷했다. 확실하지 않아도 확인해 볼 가치는 있다.”
“그걸 이제야 알아차리면 어쩌자는 거냐. 도망치기 전에 말해야지!”
“나도 긴가민가하다가 저놈들의 태도를 보고 알게 됐어.”
[싸우다 뭐 하는 거냐. 내가 무서워서 도망치려는 거냐.]
삼두가 일부러 살주와 도주의 대화를 막았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더욱 확신할 터.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됐다.
[야. 일승아. 너 곧 뒈지겠다?]
[무…슨 소리! 아직 싸울 수 있다.]
[그래? 쟤들이 이준의 정체를 알아 버렸으니까 단단히 붙들어 매야 해. 무슨 말인지 알지?]
[내가 너처럼 이해력이 딸리지는 않는다.]
[다 죽어 가면서도 할 말은 하네. 그런데 네 수하들 어떡하냐.]
사자들은 살주의 수하들과 싸우다 거의 죽었다.
고참들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
그들 또한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염라대왕의 수호대가 구천옥 죄인들에게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것.
염라대왕의 귀에 들어가면 노할 일이었다.
[제 할 일을 하다 간 것이다.]
[이 대가는 신선제에게 받아 와.]
[가능할 거라 보는 거냐.]
[나야 모르지.]
[누굴 바보로 취급하려고. 네 속셈에 당할 것 같으냐.]
[아쉽군.]
위급한 상황에서도 농담이나 하는 일 사자와 삼두였다.
[죽지 마라. 일승아.]
[너나 당하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마지막 일전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