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7화
“혀, 혈주!”
“혈주를 보호하라!”
혈주의 수하들.
구천옥의 죄인들이 이준을 향해 쏟아졌다.
“네 힘, 감사히 먹어 줄게.”
[흡성공의 흡자결을 사용했습니다.]
[상대의 기운을 흡수합니다.]
[지옥의 기운을 흡수했습니다.]
[지옥의 기운을 흡수했습니다.]
……
……
……
[지옥의 기운을 흡수했습니다.]
“크허억!”
이준이 혈주의 기운을 빨아들였다.
눈이 까뒤집힌 혈주.
가슴이 뚫렸음에도 죽지 않고 비명을 질렀다.
탱탱하던 피부가 급격하게 주름지기 시작했다.
“놓…지 못할…까…!”
혈주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하지만 이준은 혈주를 비웃기라도 하듯.
“천살.”
이준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속임수가 아닌 진짜였다.
세상의 소음이 사라졌다.
구천옥의 죄인들이 다급하게 뛰어오는 소리도.
혈주를 구하라고 독촉하는 소리도.
그들이 흔드는 종소리도.
전부 사라졌다.
무음이 된 세계에 빛이 내려앉으며 검은 비가 떨어졌다.
작은 빗방울은 점점 소나기로 변했다.
비와 함께 몰아치는 폭풍.
정적이던 세계가 끝나자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이준을 향해 달려오던 죄인들이 동시에 혈수가 되었다.
“…무…슨!?”
혈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제일 약한 수하가 현경 끝자락.
대부분이 생사경에 있는 이들.
저렇게 한 줌 혈수가 되어 쉽게 죽을 만한 이들이 아니었다.
구천옥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이들이니까.
“네 힘 쓸 만하네.”
원래 패천삼공인 천살을 사용하면 탈진 상태가 되어야 했다.
아직까지 완벽하게 사용할 수 없는 무공이었으니까.
이를 보완하려고 혈주를 이용했다.
정확히는 혈주에게서 흡수한 기운으로 천살을 사용한 것.
혼원신공으로 사용하는 것보다는 파괴적인 면에서는 부족하나.
죄인들을 몰살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이렇…게 죽을… 순….”
“뭐라는 거야. 그냥 뒤져.”
퍼석-
이준은 혈주의 머리통을 부숴 버렸다.
졸지에 머리를 잃어버린 몸통.
그도 모자란지 이준은 손으로 단전까지 꿰뚫어 버렸다.
어떻게 보면 시체를 훼손하는 모습.
악독하고 사이코패스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오해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페니모어와 파스콜 가주가 침을 삼키며 말했다.
“저, 저게 인간이 낼 수 있는 힘이란 말인가!?”
“왜 사람들이 파천자를 무서워하는지… 이제야 알겠어.”
“괴물….”
“천외천급이라더니….”
“공포스러울 정도입니다.”
페니모어의 마법 각성자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모두가 파천자를 어려워한다는 건 안다.
그는 세계 랭킹 1위에 있는 각성자였으니까.
하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의 무력을 실제로 접하지는 않았기에 얼마나 대단한지는 실감하지 못했다.
한데 오늘 이준의 무력을 직접 보았다.
세상 사람들이 떠들어 대던 강함.
최고이자, 최강이란 표현이야말로 진정 이준에게 너무도 잘 어울리는 수식어라 느끼게 됐다.
페니모어와 파스콜이 놀라고 있을 때.
이준은 누군가를 불렀다.
“영혼 수거해 가세요.”
“혈주를 이리 빨리 제거할 줄 몰랐다.”
[누구의 제자인데 당연한 일을 가지고 그리 놀라는지 끌끌.]
갓을 쓰고 나타난 남자.
저승사자의 우두머리인 일 사자였다.
그의 곁에는 수많은 사자가 함께했다.
죽은 이들의 영혼 수거는 그들이 몫.
죄인들의 영혼을 쇠사슬로 꽁꽁 묶어 봉인했다.
일 사자가 혈주의 영혼을 몸에서 분리시켰다.
끼아아악-
괴상한 비명과 함께 주변 공기가 요동쳤다.
“죽어서도 지랄 발광을 하네.”
이준은 무극기를 담은 주먹으로 혈주의 영혼을 틀어쥐었다.
끼아아악!
괴상한 비명은 더욱 커졌다.
마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이준의 도움 덕분인지 일 사자는 수월하게 혈주의 영혼을 수거했다.
“다음은 누구를 목표로 할 생각이냐.”
일사자의 질문에 이준이 고민에 빠졌다.
혈주를 죽이고 나서 얻은 기억.
거물을 잡아서 그런가 유용한 정보가 많았다.
마주가 마계로 간 건 똑같았다.
하나 검주는 마계에 아닌 인계를 선택했다.
그것도 이준이 찾고 있는 놈의 몸에 들어간 것이다.
대륙 육좌 그로가.
칠좌와 오좌를 먹어 치운 괴물.
그의 몸을 검주가 차지해 버렸다.
“가까운 놈부터 죽어야겠어요.”
“가까운 놈?”
“검주. 스페인에 있어요.”
“마계가 아니라?”
“네.”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일 사자가 경악했다.
마주와 함께 마계로 간 줄 알았던 검주가 인계에 있다고 하니 많이 놀란 거다.
* * *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금발의 젊은 청년이 허공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몸이 매우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검주.”
“이만한 몸이 있을 줄 생각지도 못했다.”
검주가 들어간 몸의 주인은 그로가.
대륙 육좌라 불린 괴물이었다.
특히 마계의 대리인으로서 힘을 부여받아 죽은 칠좌와 오좌의 힘을 흡수한 상태였다.
검주의 빙의에 그로가는 저항하려 했으나.
그의 힘만으로는 검주를 몸 밖으로 쫓아낼 수 없었다.
결국 그로가의 영혼은 소멸됐고 대신 검주가 몸을 차지하게 됐다.
“마법이라는 게 이리 매력적이라니.”
“저도 신세계를 보는 느낌입니다.”
“아이들은 어떻더냐.”
“전부 만족스러워하는 눈치입니다.”
“나도 흡족한데 아이들이라고 좋아하지 않을까.”
“그렇습니다, 주군.”
검주가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게이트가 열렸다.
그 안에는 몬스터 군단이 있었다.
일반 몬스터가 아닌, 카오스 몬스터.
그중에서도 최상위 종에 속한 마물이 득실거렸다.
“이놈은 고약한 취미를 가지고 있어.”
그 외에도 두 개의 게이트가 더 있었다.
방금 연 게이트와 비슷한 규모였으나 숫자는 적었다.
하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몬스터 수가 점점 늘어났다.
“상대의 능력을 흡수할 수 있지. 이렇게 말이야.”
검주가 손을 뻗자 구천옥 죄인 중 한 명이 날아와 그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어느새 해골이 된 죄인.
털썩.
양기를 다 빨아먹은 검주가 해골을 옆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에 상처를 냈다.
다른 손을 상처 부위에 가져가니.
초록색 빛이 맺히며 상처가 도로 나았다.
해골이 된 남자의 능력은 치유.
검주가 남자를 먹으니 치유 능력을 얻게 된 거다.
“무적에 가까운 능력이지 않나?”
“감축드립니다.”
“내가 마계에 있지 않고 인계를 택한 이유지.”
분명 검주는 마주와 함께 마계에 들었다.
마계는 지옥계와 마찬가지로 황폐한 곳이었다.
어둡고 음침했다.
마음속에 비수를 감추고 있는 악마들이 호시탐탐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여길 벗어나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인계로 내려보낸 대리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대륙 육좌가 칠좌와 오좌를 먹어 치웠다는 이야기를.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악마들이라면 화를 낼 법도 했으나.
그들은 오히려 육좌를 칭찬하기 바빴다.
육좌가 어디까지 먹고 클까 내기도 걸었다.
육좌의 능력을 들은 검주는 이거다 싶었다.
마계는 틈이 보이면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인계라면 한결 편해질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육좌의 흡수 능력이 탐났다.
인계에서 가장 강한 놈을 먹어 치운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재밌었다.
“인계에서 제일 센 놈은 알아봤나?”
“파천자라는 놈입니다.”
“파천자? 광오한 이명을 쓰는 놈이구나. 내가 없는 사이에 세상이 많이 변했어.”
“검주에게나 어울리는 이명입니다.”
“큭. 파천은 함부로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괜히 우리 때 파천이란 이명이 없었던 게 아니야.”
“검주의 시대는 파천이란 단어를 이명에 붙이지 못했습니까?”
“당연하지. 파천혈신이 버젓이 눈을 뜨고 있는데 어떤 놈이 감히 파천이란 단어를 쓰겠나.”
“못… 쓰겠군요.”
“그때만 떠올리면 이가 갈려.”
검주가 어금니를 뿌득 갈았다.
굉장히 분해했다.
파천혈신 때문에 쓰지 못한 자신의 이명.
파천검선이란 이명을 쓴다고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살수를 펼쳤다.
그에게 검을 쓰는 팔이 잘려 졸지에 좌수 검수가 됐던 게 떠올랐다.
“그래서 더 화가 나. 어떤 놈이기에 파천자란 이명을 쓰는지 보고 싶군.”
검주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심기가 많이 불편한 모습.
조금 전까지 그로가의 흡수 능력 때문에 좋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날아간 느낌이었다.
“검주께서 파천자란 놈을 죽여 세상 사람들에게 천외천이 있다고 알려 주십시오.”
“그래야지. 나 말고 누가 또 파천이란 단어를 쓴단 말인가. 파천이란 이명을 되찾아 오겠다.”
검주는 마계의 문을 여는 일에 동참하지 않아도 된다.
마계의 문을 여는 건 다른 이들이 할 일.
검주는 그냥 몸을 숨기고 있어도 되고 각성자로서 활발히 활동해도 된다.
모습을 드러내는 건 어디까지나 그의 의지였다.
“파천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그의 수하가 사라졌다.
혼자 남은 검주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파천혈신만 흡수할 수 있다면 4대 왕도 나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검주의 마지막 목표는 파천혈신이었다.
* * *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일 사자가 무극자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영혼만 있으나 신선제.
심지어 위해를 가하는 게 가능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는 꼰대.
예의 바른 걸 좋아했다.
만약 할 일만 하고 그냥 갔다면 다음에 왔을 때는 지옥이 펼쳐질지 몰랐다.
그랬기에 지옥계로 떠나기 전 예의를 다한 것이다.
[염라대왕에게 안부나 전해 주거라.]
“알겠습니다.”
일 사자가 고개를 숙인 후 황급히 사라졌다.
이 자리에 한시라도 있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준이 몸을 돌리자 페니모어와 파스콜 가주가 다가왔다.
“다… 끝난 겁니까?”
“네. 제가 말했던 마인은 사라졌어요. 그래도 그들이 남겨 놓은 잔재들은 있을 테니 청소를 해 주세요.”
“무, 물론입니다. 그런 것까지 파천자 님께 맡길 순 없습니다. 파스콜 가문이 나서서 처리하겠습니다.”
“믿을게요. 혹시나 마인이라 의심되는 놈들이 있으면 계속 연락 주세요.”
“예!”
“작은 것도 전부 보고드리겠습니다.”
두 가주의 태도에 생긴 작은 변화.
전에도 이준을 어려워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지금은 거의 수하의 느낌이었다.
이준의 무력.
그들이 생각했던 그 이상이었다.
아니, 세계인들이 그의 강함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고 여긴 페니모어와 파스콜 가주였다.
이준이 두 사람을 지나쳐 갔다.
“어디 가십니까?”
“할 일도 끝냈으니 다음 일을 하러 가려고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페니모어와 파스콜 가주가 이준의 뒤에 붙으려고 했다.
“스페인으로 갈 거예요.”
“가깝군요.”
“제가 포탈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페니모어는 마법 가문이었다.
어느 나라든 승인만 있으면 이동이 가능했다.
“스페인으로 넘어갈 포탈만 열어 주세요.”
“아닙니다. 제가 일정이 끝날 때까지 모시겠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스페인에 사는 친구를 만날 생각이거든요.”
“파천자 님의 친구가 스페인에 있었습니까?”
“누구입니까?”
두 가주의 눈이 빛났다.
이준의 친구.
파천자가 친구라 인정한 사람은 누굴까.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친구라는 사람도 대단하지 않을까.
두 가주의 눈이 반짝이는 이유였다.
그들은 이준의 입술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두 사람의 얼굴을 본 이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암흑대제를 만나 볼까 해요.”
“에엑!?”
“아, 암흑대제가 파천자 님의 친구였습니까?”
“저희보다 나이가 많을 텐데….”
“나이가 중요한가요. 마음이 맞으면 모두 친구가 될 수 있어요. 가주님들도 저와 친구가 아닌가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어서 그런가.
두 가주의 얼굴이 얼빠진 듯 멍해졌다.
“치, 친구요?”
“제가 파천자 님과 친… 구…?”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이들의 얼굴에 흥분이 맺혔다.
“내가 파천자 님과 친구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아닌가요? 저만 친구로 생각했나?”
이준의 말에 두 사람이 격렬하게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친구 맞습니다.”
“그럼요. 마음만 맞으면 친구입니다, 하하하.”
감격스러운 표정은 덤.
그들은 하늘을 날 것 같은 얼굴을 했다.
호탕한 웃음을 멈춘 페니모어가 이준을 가문으로 이끌었다.
지잉-
가문 내의 포탈이 열렸다.
이미 오면서 스페인에 포탈 개방 허가를 받은 상태.
이준이 조금이라도 불편하지 않게끔 일을 처리해 놨다.
“다음에 봐요.”
“항상 조심하십시오.”
“연락 드리겠습니다.”
두 가주가 90도로 인사를 했다.
이준이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힌 순간 두 사람이 서로를 격하게 끌어안았다.
“파천자 님과 친구가 됐소.”
“역사적인 날이오.”
그들에게는 또 다른 역사적 순간이었다.
원수같이 지내던 두 가주가 서로를 끌어안은 날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