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1화
하지만 진무열은 이준의 뜻을 곧바로 간파해 버렸다.
“내 파천멸기의 불완전함을 노리고 있구나.”
그럼에도 그는 이준의 생각대로 행동해 주었다.
파천멸기를 줄기차게 내보냈다.
파천멸기가 무극기를 뒤덮으며 잡아먹었다.
“사부에게 무공을 배운 지 150년은 훌쩍 넘었다. 본좌가 그동안 가만히 있었을 거라 생각한 게냐.”
파천멸기는 더욱 이준을 압박해 왔다.
‘대사형의 파천멸기는 불안정해.’
이준의 눈에 마기의 흐름이 잡혔다.
완전한 무공은 기의 파동이 일정했다.
그런데 천주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파동은 어떤가.
기파가 요동쳤다.
저 파동으로 인해 파천멸기가 강하게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도 강하기도 했고 말이다.
‘완전히 허세는 아니야.’
이준이 천주를 폭주시키려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 - 1위]
[천살신 진무열 – 2위]
[파천자 이준 – 3위]
2위의 정체가 밝혀진 것.
처음에는 저 랭킹의 정체가 백마존이라 생각했다.
그들을 직접 만나지 않았으니.
물음표로 나왔다고 생각했다.
하나 예상과는 달랐다.
백마존이 위에 있는 게 아니었다.
대사형 진무열이 랭킹 2위에 있었던 거다.
1위가 누군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천주만을 생각했다.
‘대사형은 나보다 강해. 그걸 알기에 저리 무모하게 행동하는 거야.’
파천멸기가 폭주하기 전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진무열에게 있었다.
‘드래곤 하트를 먹으려는 것도 파천멸기의 불안정성을 보완하기 위해서고.’
그리고 파천멸기가 완벽하다면 사부가 무극기를 만들었을까.
무극기는 파천멸기의 강함을 조금 덜어내고 안정성을 택한 무공이었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는 무극기가 파천멸기보다 강한 건 맞으나.
오직 파괴력만 놓고 보면 파천멸기가 무극기보다 우위에 있었다.
‘이대로 계속 내공 대결을 해야 해.’
이준은 혼원신공을 극성으로 운용했다.
파천멸기에 잡아 먹히던 무극기가 힘을 얻었다.
회색 기운과 검붉은 기운이 허공에서 엉켰다.
그 모습은 사뭇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물어뜯는 모습이었다.
“본좌를 상대로 객기를 부리는군.”
“백년을 훌쩍 넘게 산 노괴를 상대하려면 객기 정도는 있어야죠.”
“사부는 너처럼 말 많은 놈을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시던데요?”
진무열의 눈 옆 근육이 실룩였다.
상당히 기분 나빠 하는 표정이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이준.
입꼬리를 올렸다.
“대사형은 사부님을 잘 모르시는 것 같네요.”
“뭐라?”
“사부님 외로움 잘 타세요. 옆에서 계속 떠들어 줘야 한다고요.”
“되도 않는 소리! 그분은 조용한 걸 좋아하신다!”
진무열이 일갈을 터트렸다.
파천멸기가 용이 되어 검은 불을 뿜어냈다.
무극기를 아예 소멸시키려는 듯한 화염이었다.
“헐. 사부님이 TMT라 엄청나신 것도 모르겠네.”
“그건 또 뭐냐.”
“투 머치 토커요. 안 해도 될 말까지 전부 할 정도로 말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단어예요.”
이준은 무극기를 유지하면서도 입을 쉬지 않고 놀렸다.
이건 그냥 도발이 아니었다.
천주가 어느 순간에 이성이 흐트러지는지.
알아보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럴 리 없다! 그분은 세상에 홀로 군림하는 존재였다. 우리 같은 놈들과는 상대하지 않으려 하셨단 말이다!”
“그건 그쪽이 사부를 외롭게 만든 거겠죠. 저랑 있을 때는 되게 말 많이 하셨거든요.”
이준의 말에 천주의 기가 흔들렸다.
천주가 동요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이 정도면 애증 관계인데? 사부에게 인정받지 못해 눈이 돌아가서 암습을 강행한 대사형? 말 되네. 그러니까 저런 반응을 하는 거겠지.’
좋아하면서도 싫어하는 사람의 음성이라고 해야 할까.
목소리에 서운한 감정이 서려 있기도 했다.
도발의 효과가 주요했는지.
“닥쳐라! 네가 날 농락하고 있구나.”
천주가 극도로 흥분했다.
“흡.”
파천멸기가 집요하게 무극기를 파고들었다.
제대로 집중을 안 했다간 이준이라도 큰 내상을 당할지 몰랐다.
‘애증이 맞다니까.’
정확한 내막을 모르는 이준은 무극자와 천주의 사이를 애증 관계로 결론을 내렸다.
사실 천주가 이토록 흥분한 건 이준이 말한 부분도 맞긴 했다.
파천혈신은 한 번도 천주와 사형제들을 향해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주지 않았으니까.
언제나 과묵하게 있었으며 냉혹하게 대했다.
작은 실수도 용납 따윈 없었다.
그에 합당한. 아니, 더한 벌을 내리는 게 그였다.
그런데 막내 제자라는 놈에게는 자신들에게 보여 주지 않았던 모습을 보였던 건지.
굉장히 친밀해 보였다.
천주가 꿈꿨던 사제 관계가 저 애송이한테는 있었다.
‘여우 같은 늙은이.’
한때는 마음이 약해졌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죽인 원수라 하더라도…
사부는 자신을 보살펴 준 은인이었다.
무공도 고금제일을 논한다는 파천신공을 주기까지 했다.
또한 사부가 이끌었던 신교도 물려주지 않았던가.
이 때문에 파천혈신의 후계자가 된 것이다.
부모의 얼굴도 모르는 자신에게 사부는 스승이자 아버지였고, 원수이기도 했다.
이 사실을 떠나 그를 위해 노력했다.
어떻게든 기쁨을 주려고.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가 쌓였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사부는 그저 자신을!
거둬들인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이라 여긴 것이다!
남들은 자신을 파천혈신의 후계자라 하지만.
단 한 명, 사부만은 자신을 후계자라 말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에게 난 자기 손으로 멸문시킨 생존자 중 한 명이라고만 여겼던 거다. 그의 진정한 전인을 키우는 먹잇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거야.’
알고 있었다.
몇 번이고 이 상황을 회피해 보기도 했다.
부모를 죽인 원수란 생각을 가슴 깊이 새기며 살았으나.
사부에게 칭찬을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의 마지막 부탁이자 명령을 들어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 인생도 참 비참하군.’
허무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었다.
“하하.”
천주가 목청을 드러낸 채 웃었다.
하늘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웃음이 멈추더니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본좌가 알던 그와 네가 아는 그가 다르다는 걸 인정하마. 하나만 묻지. 너는 그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
뜬금없는 물음에 이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웬만한 건 다 안다고 생각하는데요. 전 사부님의 과거까지 알거든요.”
이준이 또 한 번 도발을 걸었다.
하나 이전과는 천주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렇담 그가 왜 널 키운 것인지도 알겠구나.”
“당신을 저지시키려고 절 키우신 거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이번에는 이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천주의 얼굴에 그려진 미소가 꺼림직했다.
“무슨 말이죠?”
“본좌를 쓰러트리면 답을 알려 주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이준은 찜찜한 기분이 계속 들었다.
천주를 도발해서 폭주시키는 건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얻는 것이 없지는 않았다.
천주가 한 마지막 말.
안 들으면 후회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 * *
쉘터에 있는 사람들은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여러 개의 모니터가 걸린 벽 쪽을 보고 있었다.
“좋아! 그거야!”
“그대로 밀어붙여!”
“천외천 별거 없잖아?”
오대 가문과 마벽은 천외천과 몬스터를 상대로 잘 싸웠다.
아군의 우세에 사람들이 환호했다.
“와아아아!”
“독 안개가 몬스터를 녹여 버렸어.”
“샤크로아들은 어떻고. 싸움 광이야.”
“다재다능한 페어리가 아군이라 천만다행이다.”
몬스터와 합심해서 싸우는 오대 가문과 마벽이었다.
오대 가문, 마벽 대 천외천.
몬스터 대 몬스터.
이 싸움으로 인해 인간에게 우호적인 몬스터도 있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그런데 저쪽은 뭐 하냐.”
조용한 화면도 있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조용한 화면을 보았다.
그 화면에는 이준과 천주가 나왔다.
“기 싸움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빨리 끝내고 다른 각성자를 도와줘야지!”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때 한 여자가 보급품을 쾅 하고 바닥에 놔뒀다.
“지금 저게 장난 같아 보여요?”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조폭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대꾸했다.
“우리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나, 듣기론 내공 대결은 오래가지 않는다고 하던데.”
“저 장면에 대해서 모르면 가만히 있으세요. 사람 화나게 하지 말고.”
“당신은 얼마나 안다고 나한테 그래?”
“적어도 아저씨보다 많이 알아요.”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쉘터에 있으면 항상 일어나는 일.
특히 주둥이로만 싸우는 사람은 언제나 있었다.
“아, 아저씨?”
“내공 대결은 큰 리스크를 안고 시작하는 싸움이에요. 상대의 내공이 더 강하면 치명적인 내상을 입고 말죠. 한마디로 목숨을 걸고 상대의 전의를 꺾는 기술이라고요.”
각성자들도 내공 대결은 본격적인 싸움 전에 하는 전초전이라 여겼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공이 약한 각성자에 한해서였다.
내공이 강한 자들끼리의 싸움일수록.
내공 대결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각성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내공.
내공 대결의 결과는 내상으로 직결됐으니.
싸우기도 전에 승리할 수도.
패배할 수도 있었다.
이런 리스크를 감수하고도 시도하는 게 바로 내공 대결이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기술이었으니까.
“저런 사람을 왜 목숨을 걸고 구해 줘야 하는 거야.”
여자가 짜증을 내며 말하자 조폭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일반인인 척하려면 조용히 입 닥치고 있어요.”
험악한 여자의 말투에 조폭 남자가 뜨끔했다.
남자는 각성자였다.
뿔뿔이 흩어진 사마련 출신의 C급 각성자.
낮은 등급의 각성자는 보급이나 후방을 맡았다.
남자도 돕는 게 맞지만 사마련 범죄자 출신답게.
일반인들 사이에 숨어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고 싶지 않아 쉘터에 가장 빨리 들어와 숨어 있었던 거다.
곳곳에 이런 놈들이 많았다.
일일이 찾는 일도 번거로울뿐더러 분란만 일어날 수 있으니.
그냥 눈감아 준 것.
남자를 무시하고 있었는데 그가 이준을 욕하는 것 같아 여자가 나선 거다.
그녀는 암상 회장의 손녀, 한주인이었다.
A급인 그녀는 쉘터의 보급과 경비를 맡았다.
쉘터는 사람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공간.
몬스터나 전쟁을 대비해 마련된 은신처였다.
그런 곳에 분란이라도 생기면 사람들에게 큰 위협이 된다.
분란이 일어나지 않게 경계하는 게 그녀의 역할.
직접 싸우는 것도 중요했지만, 내부의 적을 제압하는 것도 중요했다.
“낭야대주.”
“네. 아가씨.”
“저런 놈 있으면 경고하지 말고 바로 밖으로 내보내 버려요.”
“알겠습니다.”
한주인이 조폭 남자를 노려보더니 다시 보급품을 들어 올렸다.
“저….”
한 여자가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자.
“무슨 일이신가요?”
“제가 잘 몰라서 그런데요. 내공 대결이 그렇게 위험한 거예요?”
한주인이 다시 보급품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여자의 순수한 질문에 그녀가 대답해 주었다.
“앞서 말했듯이 내공 대결은 상대를 쉽게 무너트릴 수 있는 기술이에요. 반대로 자신 또한 쉽게 패배할 수 있죠. 화면에는 쉽게 보일 수 있지만 웬만한 최상위 각성자 아니면 저렇게 하지도 못해요.”
“그렇게 위험한 거구나.”
이곳에 있는 모두가 이해했다는 눈치였다.
그들도 내공 대결을 쉽게 생각했다.
그저 눈싸움이라 여겼는데 목숨을 내놓고 하는 기 싸움이라니.
기본 지식이 있다지만 각성자의 입에서 직접 들으니 확실히 이해가 갔다.
“그러니까 화면을 보면서 응원만 해 주세요. 여러분이 안전하게 쉘터에 있는 것도 저분들이 싸워 주는 덕분입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각성자들이 사람들을 지켜 주니.
일반인들은 보호를 당연시하게 여겼다.
보호가 권리인 줄 아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항상 명심해 주세요. 저분들이 있기에 저희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각성자들은 일반인들을 목숨까지 잃어 가면서 지킬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저 한국인이란 이유로.
나라를 지킨다는 이유로.
적들과 싸우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