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1화
쩌어억-
바닥의 얼음을 타고 한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얼마나 지독한 한기였으면 내공을 두르고 있음에도 다리를 얼려 버릴까.
“밖으로 나가.”
“눈 앞에 깃발이 있는데요?”
“여기선 싸움이 안 돼. 한기에 몸이 얼어붙고 말 거야.”
동굴 안에는 차가운 기운이 가득했다.
사방이 트여 있다면 몰라도 이렇게 막힌 공간에선 하나의 기운을 증폭하기 쉬웠다.
“쳇.”
나혜원과 빨강 팀이 몸을 돌려 동굴을 나갔다.
동굴 바깥.
나혜원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파랑 팀이 거점으로 삼은 산이 하얗게 얼어붙어 있는 게 아닌가.
지독할 정도로 극음의 기운이었다.
동굴에서 이지안이 나왔다.
‘저게 AA급 완숙이라고?’
나혜원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이지안을 보았다.
이지안의 주위로 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AA급이라곤 보이지 않는 기의 파장.
강렬해도 너무 강렬했다.
‘말도 안 돼. 나보다 더 강해 보여.’
나혜원의 등급은 AA급 끝자락이었다.
그녀보다 강하다는 건 그 위 등급이라는 소리.
AA급 완숙과 S급의 격차는 너무도 컸다.
‘등급을 속인 걸까? 아니야. 학교에 들어올 때 각성자 등급 증명서를 제출해야만 해. 그걸 조작할 순 없어.’
제아무리 사신가의 각성자라 해도.
파천자가 챙기는 아이라 해도 규칙을 무시할 순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조심해야 해.’
나혜원은 자신의 팀이 이길 방법을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려 본 결과.
자신이 이지안을 붙잡고 있는 사이.
나머지들이 파랑 팀을 제압하는 것뿐이었다.
만약 이지안을 놓친다면 빨강 팀이 위험에 빠질 확률이 높았다.
“안 오시면 제가 갈게요.”
나혜원이 고민하는 사이.
이지안이 땅을 박찼다.
이곳에는 이준이 있었다.
그에게 거점 점령전을 이긴다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지면 얼마나 민망할까.
무엇보다 실망할 것이다.
이준의 사전에 패배란 단어는 없었으니까.
이지안의 신형이 환영을 남기며 움직였다.
“온다!”
나혜원이 소리치며 검기를 뽑아냈다.
쌔애액-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검기가 이지안을 두 동강 내려고 했다.
하나 이지안은 이미 그 자리를 벗어나 있었다.
나혜원은 계속 검기를 뿌렸다.
이지안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파랑 팀원들을 조준했다.
“컥!”
나혜원의 검기는 B급이나 A급 각성자가 막을 만한 위력이 아니었다.
학생들의 평균 등급에 맞춰 내공을 사용하고 있으나.
내공에 담긴 깨달음이 달랐다.
같은 등급의 내공이라도 그 깊이에서 차이가 있기에 학생들은 그녀의 검기에 맞고 속절없이 쓰러지는 것이다.
“젠장!”
“검기를 막을 생각하지 말고 피해.”
“피할 수 있어야 말이지.”
“붙어 있지 말고 거리를 벌려! 그러면 우릴 공격하는 게 쉽지 않을 거야.”
파랑 팀 학생들이 소리쳤다.
이에 서로 거리를 벌리는 학생들이었다.
나혜원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맺혔다.
“복호지.”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퍽 소리가 나며 파랑 팀 학생들이 동시에 쓰러졌다.
복호지는 아미파의 지법.
손가락을 튕겨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무공이었다.
만약 손에 염주와 비슷한 크기의 암기가 있었다면 큰 살상력을 보였으리라.
B급 무공인 것치고는 최상위 위력을 자랑했다.
“이, 이 교수님!”
“저희만으로는 무리예요.”
파랑 팀 학생들은 이지안을 불렀다.
나혜원보다 이지안이 먼저 움직였지만 성과를 낸 건 나혜원이었다.
이지안은 그저 나혜원의 검기를 피한 게 다였다.
그때였다.
“설빙옥.”
이지안의 목소리가 모두의 귀에 또렷이 들렸다.
그와 함께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
차가운 바람은 수십 개의 얼음 기둥을 만들어 냈다.
나혜원과 빨강 팀을 둘러싼 얼음 기둥.
그 안에는 이지안 한 명밖에 없었다.
“이제 저를 상대하셔야 할 겁니다.”
이지안이 백설을 들고 나혜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서걱-
살이 갈리는 파육음이 들렸다.
이지안이 백설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으으….”
“마, 마녀.”
빨강 팀 학생들은 각자의 무기를 잡은 채 떨리는 눈으로 이지안을 봤다.
그녀는 설빙옥을 펼치고선 가차 없이 살수를 가했다.
창으로 복부를 꿰뚫는가 하면 종아리를 노려 이동 불가 상태로 만들었다.
그도 아니면 아예 심장을 찔러 시험에서 탈락시켰다.
통각이 100% 느껴져서 그런지.
학생들의 눈에 두려움이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도와주세요. 나 교수님….”
나혜원도 학생들과 다를 바 없었다.
더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나혜원 자신.
높은 등급을 지닌 그녀가 이지안에게 속절없이 밀리는 게 아닌가.
학생들과 합공을 해도.
홀로 이지안을 공격해도.
상처를 내는 게 다였다.
지금도 봐라.
이지안의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다.
하지만 고통이 안 느껴지는지.
얼굴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시간이라도 끌어야 돼. 시간만 벌면 우리의 승리야.’
거점 점령전은 갖은 무력도 뛰어나야 했지만, 전략을 보는 평가였다.
무엇보다 교수들은 깍두기.
전략을 위한 장기 말 중에 하나였다.
‘남은 시간은 2분. 얼마 안 남았어.’
이지안의 예상 밖의 무력에 나혜원이 놀라 했으나.
특수 권한도 곧 끝이었다.
학생들끼리만 남으면 승자는 빨강 팀일 터다.
나혜원은 난피풍검법을 극성으로 펼쳤다.
그녀의 검이 투명한 빛에 의해 길어졌다.
검강.
난피풍검법에 펼쳐진 검강이 허공에 난무했다.
난피풍검법은 쾌검.
잔상을 남기며 이지안의 사방을 점해 갔다.
나혜원은 단 2분만 이지안을 붙잡고 있으면 된다고 여겼다.
그 때문에 남아 있는 내공을 전부 끌어다가 공격한 것.
하지만 이게 나혜원의 패착으로 이어졌다.
쾅-
거대한 폭발음이 일어났다.
설빙옥이 나혜원의 검강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하악… 하악….”
나혜원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누군가를 벤 느낌은 없었지만 설빙옥을 무너트렸다는 건 확신했다.
시간도 계속 흐르고 있었다.
특수 권한이 사라지는 것도 시간문제.
나혜원은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이 승리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헉!”
하얀 뭉게구름이 사라지고 나타난 광경은 그녀를 놀라게 했다.
파랑 팀이 삼은 거점만 빼고 초록색으로 가득했던 곳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세상이 온통 하얬다.
“어떻게 된 일이야?”
나혜원은 커다란 눈을 한 채 상황 파악을 했다.
이지안은 백설을 잡은 채 서 있었다.
다리가 떨리는 게 나혜원의 눈에 보였다.
이지안도 한계가 분명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걸까.
도무지 어떤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교수님. 몸이 안 움직입니다!”
“저, 저도요.”
나혜원을 비롯한 빨강 팀 전원의 다리가 묶였다.
바닥과 발이 한 몸인 상황이었다.
“내공을 사용해도 몸이 안 움직여!”
아군, 적군 가릴 것 없이 전부 얼어붙었다.
이지안의 설빙옥 때문.
파랑 팀은 특수 권한을 방어에 사용했다.
그녀가 나혜원과 빨강 팀을 방어한다 해도 질 가능성이 높았다.
상대는 최정예들이 거점을 방어하고 있었으니까.
빨강 팀과 파랑 팀의 무력 차이도 날뿐더러.
상대의 최정예와 맞닥트린 게 하필 파랑 팀의 에이스였다.
그들이 상대의 최정예와 싸워서 진다면 파랑 팀은 무조건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지안은 설빙옥을 펼친 거다.
설빙옥은 현무 계열 무공.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에 특화된 무공이었다.
설빙옥은 말 그대로 얼음 감옥.
특징이 있다면 그건 바로 설빙옥이 무너졌을 때였다.
설빙옥 안에 있는 자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주변을 얼음 지옥으로 만들었다.
그 반경은 시전자의 내공이 많을수록 효과가 컸다.
이지안의 내공은 구음절맥으로 인해 엄청난 양을 자랑했다.
이준에 비하면 적었으나.
그의 나이 또래나 같은 등급에 있는 각성자와 비교했을 때는 무한에 가까웠다.
그만큼 극음의 기운을 많이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극음지기를 설빙옥과 같이 전부 소모한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과 같은 기막힌 장면이 연출될 것이다.
세상이 온통 얼어붙어 버린 광경 말이다.
* * *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울렸다.
저 멀리서부터 보이는 하얀 뭉게구름.
조금 있으면 구찬기와 최한결이 있는 곳으로 저 구름이 덮칠 것만 같았다.
[선배. 위험해 보이지 않습니까?]
[위험해 보이는 게 아니고 위험해.]
[뒤로 빠질까요?]
[저놈들은 구름이 위험해 보이지 않는 모양인데?]
두 사람을 계속 몰아붙이고 있는 빨강 팀의 정예들.
하얀 구름이 몰려오건 말건.
신경 쓰지도 않았다.
[안 빼면 저 구름에 휩쓸릴 것 같은데. 심상치 않아요.]
[피부가 아려 올 정도로 따끔거리긴 하다.]
[공격을 맞든 말든 피하고 보죠.]
[그러자. 피하고 보, 아!]
[왜 그러십니까?]
[너 강의 초반에 이 교수님께 받은 깃털 있지?]
[네.]
[한 번 써 볼까?]
[여기서요?]
[저 정도 한기면 써 볼 만하지 않아?]
[그렇긴 하지만 지금 타이밍이 맞습니까?]
[나도 모르지.]
두 사람은 강의 초반에 이지안에게서 하나의 아티팩트를 받았다.
수업 태도가 좋고 적극적인 사람에게만 줬던 보상이었다.
선물을 주면서 이지안이 했던 말.
그 어떤 극음의 기운에도 깃털만 가지고 있으면 무사하다 라는 말이었다.
[써 보자. 밑져야 본전이잖아.]
구찬기는 이미 결심했다.
최한결도 마지못해 그를 따랐다.
하얀 구름이 순식간에 두 사람이 있는 곳을 덮쳤다.
‘지금!’
두 사람은 동시에 주머니에서 깃털 하나를 꺼냈다.
그리곤 내공을 사용해서 깃털의 능력을 발동시켰다.
“흡!”
“억!”
“무, 뭐야?”
빨강 팀의 정예들이 당황해했다.
하얀 구름은 지독한 한기를 품고 있었다.
뼈가 얼어 버릴 지경.
내공으로 몸을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목숨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물론 가상 공간.
통각은 100% 느껴지지만 여기서 죽을 일은 없었다.
빨강 팀 거점도 곧 하얀 구름이 걷혔다.
이곳 또한 설원으로 변해 버렸다.
“몸이 왜 그러지?”
“통제가 안 돼.”
“내공이나 마력을 일으켜 봐.”
“그래도 소용없어.”
빨강 팀 최정예도 몸이 얼어붙어서 꼼짝하지 못했다.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구찬기와 최한결뿐이었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깃털 때문.
일반 깃털이 아닌 주작의 깃털이었다.
물론 가짜.
테구르가 만든 복제품이었다.
복제품이긴 하나 흑염을 품고 있는 아티팩트였다.
지금과 같은 한기의 폭풍이 몰아쳤을 때는 생명을 보호해 주기도 했다.
“크윽… 몸이 타는 줄 알았어.”
“두 번 다신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독한 한기를 보호하는 대신 극양의 기운을 참고 견뎌야만 했다.
구찬기와 최한결은 몸을 잘게 떨곤 고개를 돌렸다.
“쟤들 못 움직이는 것 같지?”
“그래 보입니다.”
두 사람은 씩 웃고는 깃발이 꽂힌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 어디 가!”
“거기 못 서?”
“우릴 무시하는 거냐.”
“주둥이는 잘도 움직이네? 큭큭.”
구찬기가 꺽꺽거리면서 비웃음을 흘렸다.
그와 최한결이 빨강 팀의 깃발 앞에 섰다.
그러다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너 깃털 하나 더 있냐?”
“당연히 없죠.”
두 사람은 깃발을 뽑아 보려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상대 팀 깃발 또한 얼어붙어 있었다.
보통의 양기로는 얼음을 녹이지도 못했다.
“이거 어쩌냐?”
* * *
그 무렵.
어느 게이트에선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망자들이 발을 들이민다는 말이냐!]
몬스터의 외침에 주변이 꽁꽁 얼어붙었다.
그도 모자라 바닥에서 얼음 가시가 하늘로 솟구쳤다.
몬스터의 위협에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죽여라! 현무를 놓쳐선 안 돼.”
사람들에게서 무지막지한 공격이 쏟아져 나왔다.
이기어검술.
무형장.
권강 등.
보기 힘든 무공이 무수히 펼쳐졌다.
몬스터, 현무는 얼음벽을 만들어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했지만.
모든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 막강한 방어력을 자랑하던 현무의 등껍질이 깨졌다.
현무의 피부에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허공을 가르던 검이 현무의 다리에 박혔다.
[음…]
무형장은 연신 현무의 등껍질을 파냈다.
쿵.
계속된 공격에 거대한 몸집을 자랑한 현무가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