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2화
“파르가의 서요!?”
“예?”
이준의 놀란 목소리에 페니모어 가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에요. 잠깐만요.”
이준은 곧바로 표정을 수습했다.
‘이게 사부님이 말씀하신 책이에요?’
[그러니라. 인계에 있어서는 안 될 책이거늘.]
‘사부님이 그렇게 놀랄 만한 물건인가요?’
[마법의 근간이라고 보면 되느니라. 루트 창을 열어 보겠느냐.]
무극자 사부의 말대로 루트 창을 열었다.
-신살의 운명을 받은 파천의 길 루트(EX)
무공 - 패천기공 사공 파천멸진(0/999,999,999)
마법 - 용의 심장(4가지 중 선택)(0/999,999,999)
능력치 - 마나+15(200,000,000)
‘어? 마법 항목의 봉인이 풀려 있어요.’
메시지 창을 확인해 보니.
[계승할 마법서 중 하나를 찾았습니다.]
[제한 시간이 주어집니다.]
[한정된 시간 내에 계승하지 않으면 마법 항목이 다시 봉인되고 파르가의 서는 두 번 다시 계승할 수 없습니다.]
[제한 시간 - 24:00:00]
다시 마법 항목을 눌렀다.
마법 - 용의 심장(4가지 중 선택)(0/999,999,999)
1. ???
2. ???
3. ???
4. ???
5. 파르가의 심장
딱 하루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이건 뭐예요?’
[천계에서 장난질한 것인가?]
무극자 사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젊었을 때 사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전율스러운 공포를 기본으로 깔고 가는 분위기.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음성이었다.
‘천계요?’
[이건 사부가 알아보마. 우선 파르가의 서를 손에 넣거라.]
‘네’
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 손에 넣어야 할 아티팩트.
그렇다고 똥줄 탄 얼굴을 페니모어 가주에게 보일 순 없었다.
“음….”
“마음에 안 드십니까?”
“등급 측정 불가 물건이라면 보물급 아티팩트긴 하지만 물건의 가치를 끌어내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아티팩트가 아닌가요?”
“아티팩트를 감정만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보다 값어치가 나갈 겁니다.”
“꼭 제게 골칫거리를 처분하고 싶어 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는 겸 아드님도 잘 봐달라는… 일석이조를 얻어 가려는 느낌인데요?”
“하, 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페리모어 가주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정확하게 꿰뚫어 본 이준이었다.
어찌 저 나이에 사람의 마음을 잘 아는 걸까.
마치 헐벗은 느낌이었다.
“전 거짓말하는 사람을 극도로 싫어해요. 페니모어 가주님과 관계가 좋은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 생각이 틀린 건가 싶네요.”
“아, 아닙니다.”
“정말 아드님을 위해 등급 측정 불가 아티팩트를 제게 주시려 하는 건가요?”
“그건….”
페니모어 가주가 잠시 망설였다.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자칫하다가는 역풍을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페니모어가 파천자에게 골칫덩어리 물건을 선물로 위장해 보내려 한 것이다.
파천자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화가 날 터.
그 때문에 망설여졌다.
기꺼이 쌓아 올린 관계가 와르르 무너질까 봐.
“전 거짓말하는 사람을 극도로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예요. 두 번은 없어요.”
이준의 목소리에 페니모어 가주는 이실직고했다.
“죄송합니다. 파천자께서 생각하는 게 맞습니다.”
“…….”
이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페니모어 가주를 지그시 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한 페니모어 가주가 고개를 돌렸다.
굉장히 맑은 눈동자였지만 두려웠다.
저 눈이 적대감으로 변하면 어쩌지하고 말이다.
“사실대로 말했으니 봐드리죠.”
“가, 감사합니다.”
“다신 제게 거짓말하려 하지 마세요.”
“무, 물론입니다.”
“페니모어 가주님을 봐서 등급 측정 불가 아티팩트는 제가 가져가 드리지요.”
“그래 주시겠습니까?”
“어려운 이웃이 옆에 있는데 모른 척할 수 없죠.”
“가, 감사합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사람은 이준이었다.
그런데 반대로 페리모어 가주가 고맙다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한 상황.
이준을 대하는 상대방 입장에선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불만을 표출하기도 애매했다.
딱히 걸고 넘어질 게 없으니까.
그냥 기분이 좀 이상했다.
보물급 아티팩트를 주는 건데 고맙다고 하는 사람은 페리모어 가주였으니까.
“지금 당장 움직일까요?”
“예?”
“골칫덩어리는 빨리 처리하는 게 좋습니다. 귀환 포탈 여실 수 있죠?”
영국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포탈을 여는 건 불가능했다.
대륙간 이동 포탈을 만들어 놓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페니모어 가문이 있는 영국으로 가는 건 가능했다.
가문 내에 각인된 마법진 덕분이다.
“이사장의 승인이 필요한지라.”
“현이야. 들었지?”
“예 가주. 이사장에게 페니모어 가주가 귀환 포탈을 열었다고 통보하고 오겠습니다.”
허공에서 떨어진 심현이가 할 말을 다 하고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제 귀환 포탈을 여세요.”
“저들은 어떻게 합니까?”
페니모어 가주는 다른 학부모들을 가리켰다.
“기다리라고 하죠 뭐.”
이준은 학부모들을 향해 말했다.
“잠시 갔다올 곳이 있으니 마인들을 어떻게 찾을까 고민하고 계세요.”
그가 이렇게까지 하자 페니모어 가주는 귀환 포탈 마법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있는 곳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돌풍이 불었다.
미친 듯이 흩날리는 머리카락.
두 사람이 있는 가운데에 하나의 포탈이 열렸다.
“절 따라오십시오.”
페니모어 가주가 먼저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이준이 그 뒤를 따라가자 포탈이 닫혔다.
미친 듯 불었던 바람도 언제 불었냐는 듯 조용해졌다.
* * *
지잉-
페니모어 가문의 중앙 정원 앞에 포탈이 열렸다.
그 안에서 페니모어 가주와 이준이 나왔다.
“저희 가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사신가보다 훨씬 크네요.”
“어찌 세계 제일 가문인 사신가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넓기만 할 뿐입니다.”
페니모어 가주는 아부를 끈임없이 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부끄럽지 않았다.
나이는 한참 어리나 세계 랭킹 1위.
랭킹 2위와의 차이는 압도적.
독보적인 랭킹 1위에게 아부쯤은 일도 아니었다.
정원 한 가운데에 포탈이 열리자.
페니모어 가문의 가솔들이 몰려왔다.
모두 로브를 입은 이들.
마법 각성자였다.
“가주님의 무사 귀환을 환영합니다.”
“가주님의 무사 귀환을 환영합니다.”
기강이 잔뜩 잡혀 있었다.
기사 각성자만 절도 있는 동작을 할 거라 생각했지만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
마법 각성자도 행동에 절도가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페니모어 가주의 위엄 있는 음성이 저택에 울려 퍼졌다.
그의 말에 마법 각성자들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옆에 있는 분은…?”
“파천자 님이시다. 모두 인사를 드려라.”
“파천…자?”
마법 각성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저희가 아는 파천자 말씀이십니까?”
“세계 랭킹 1위 각성자?”
“그렇다. 추태 부리지 말고 정신들 차려.”
페니모어 가주가 버럭 소리치자 그제야 그들이 다시 한번 인사를 했다.
“파, 파천자를 뵙습니다.”
“영광입니다.”
“저도 여러분을 봐서 영광이네요. 이제 볼일들 보러 가 보세요.”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라.”
그럼에도 페니모어의 가솔들은 쉽사리 자리를 뜨지 않았다.
파천자를 직접 보니 신기한 것.
그들의 눈동자는 호기심, 경외감으로 가득했다.
고작 스무 살.
굉장히 어린 나이에 세계에서 제일 강한 남자가 됐다.
듣기로는 혈족 계승도 실패했다고 하던데.
그런 암울한 상황을 뚫고 세상에 우뚝 섰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무공 각성자이긴 하나 한계를 깨부수고 올라간 게 존경스러웠다.
“이것들이.”
“됐어요. 시간 없으니 빨리 아티팩트나 보러 가죠.”
이준이 페니모어 가주를 재촉했다.
무극자 사부가 말한 파르가의 서가 이곳에 있다고 하니 마음이 급해진 것이다.
빨리 보고 싶었다.
어떤 아티팩트길래 사부가 놀란 걸까.
인계에 있으면 안 될 고서라고 했다.
왜 페니모어 가문에 있는지는 사부가 알아본다고 했으니.
자신은 파르가의 서를 회수만 하면 됐다.
“모시겠습니다.”
페니모어 가주가 길 안내를 했다.
그가 데리고 간 곳은 페니모어 가문 내에 있는 대성당.
웅장했다.
경건한 마음이 저절로 들 정도.
그러면서 동시에 성당 안에서 마기와 비슷한 성질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부님. 이 기운 파르가의 서에서 나오는 거죠?’
이준이 무극자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걸까.
‘사부님?’
다시 불러 보았지만 이번에도 똑같았다.
‘파르가의 서에 대해서 알아보러 가셨나 보네.’
봉인된 아티팩트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밖에서 느껴지는 게 이 정도인데 가까이서는 얼마나 대단할까.
이준은 페니모어 가주를 보았다.
페니모어 가주는 이 지독한 마기를 못 느끼는 것 같았다.
강하고 높은 경지에 있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기운.
확실히 특별한 아티팩트였다.
두 사람은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대성당이라 그런지.
복도가 엄청 길었다.
거대한 문 앞에 당도한 두 사람.
문이 자동으로 열리더니 성모마리아 상이 떡 하니 보였다.
“설마 저거 아니죠?”
“맞습니다.”
“보물급 아티팩트인데 이렇게 대놓고 보관하시다니 대단하시네요.”
이준이 혀를 내두른 이유는 파르가의 서가 성모마리아 상 앞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인간이 보물을 사람들이 다 보는 공간에 보관하겠나.
지하나 금고에 보관하지.
이건 제발 가져가 달라고 사정하는 게 아닌가.
멋모르는 도둑조차도 저게 보물일지 의심할 거다.
그 정도로 성의 없이 보관되어 있었다.
“가지고 가고 싶어도 못 가져가서 저렇게 두었습니다. 뭔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네 있어 보이네요.”
가솔들에게 위엄 있게 행동하던 페니모어 가주는 어디 가고 엉뚱한 사람이 이곳에 있었다.
이준은 파르가의 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지독한 마기, 아니 흑마력이 몸을 압박해 왔다.
피부가 저릿했다.
혼원신공이 몸을 보호해 주지 않았더라면 흑마력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바로 취해 보시겠습니까?”
“그러죠.”
이준이 손을 뻗었다.
파르가의 서가 보관된 투명한 유리가 와장창 깨졌다.
흑마력이 오지 말라고 이준에게 경고했다.
만약 선을 넘는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하나 이준이 그 말을 들을까.
파르가 서가 협박하든 말든 무시하고 책을 잡았다.
그러자 흑마력이 이준의 팔을 타고 올라와 전신을 압박했다.
* * *
천계.
인계를 보던 한 여자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저래도 될까요?”
“마계가 파천혈신을 마계 왕 후보로 뒀는데 이게 틀어지자 지옥계에서 탈출한 죄인을 후보로 선출했소.”
“그건 파천혈신, 아니 신선제가 처리할 사항 아닐까요?”
“염라대왕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파천혈신이 신선제에 오른 이유가 바로 주경아란 죄인 때문이라 하오.”
“왕의 권한을 쓰려고?”
“그렇소. 신선제는 절대 주경아를 죽이지 못하오. 그런데 하필 그녀가 마계왕 후보로 올라간 것이오. 마계 놈들이 이번에는 머리를 잘 굴린 듯싶소.”
“그래서 파천자를 신선제만큼 키울 생각이신 거네요.”
“신선제만큼 강해질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힘들지만 파르가의 서가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오.”
“그랬다면 신선제가 마법서를 찾을 때 쥐여 주고 생색이라도 내시지 그러셨어요.”
“그자의 행동을 보지 못했소? 아주 안하무인이오.”
젊은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신선제의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이 풀리지 않았다.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신계를 엉망으로 만든 자였다.
그런 자가 좋게 보이겠나.
“신선제의 신경만 건드리는 꼴은 아닌지….”
“파천혈신 때처럼 행동할 순 없을 것이오. 그도 신계의 한자리를 차지한 왕. 엉덩이가 무거울 수밖에 없소이…”
쿠우웅-
“…다.”
천계가 진동했다.
남자와 여자가 있는 곳은 천계의 왕이 있는 거처.
맨 안쪽에 위치한 곳이라 이 정도 진동이 느껴지려면 엄청난 충격을 받아야만 가능했다.
“누가 침입이라도 했나?”
남자의 말에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천계의 왕이여! 시, 신선제가 쳐들어왔습니다.”
“뭐!?”
남자, 천계의 왕은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