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4화
박정연 쪽에서 탈리아 파스콜이 나왔다면.
박혁진 쪽에서는 토비 파스콜이 나왔다.
닮은 듯 닮지 않은 두 사람.
탈리아는 당찬 성격을 가졌고, 토비는 소심함의 극치를 보였다.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으나.
탈리아는 개의치 않아 했다.
오히려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더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반면 토비의 몸은 잔뜩 움츠러들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 선 것은 처음.
모두가 자신을 보는 것 같자 긴장이 온몸을 감싼 토비였다.
박혁진은 토비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토비야.”
“네? 네 교수님….”
“쫄 것 없어. 나와 검을 나눴을 때를 떠올려 봐.”
박혁진의 첫 수업은 파격적이었다.
교수 대 학생간의 대결.
일 대 일 비무가 아닌 일 대 다수의 싸움.
박혁진이 학생들에게 한 첫 마디가 다 함께 자신을 공격해 보라는 말이었다.
그는 내공을 일절 사용하지 않는 다는 조건까지 걸었다.
학생들은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SS급 각성자라고는 하지만 내공을 봉인한 채 오직 초식만으로 수 백의 각성자를 어떻게 이기겠나.
걔 중에는 AA급 각성자도 있었다.
그들의 상식선에는 이건 자신들의 승리였다.
결과는 처참한 패배.
괜히 SS 등급을 단 게 아니었다.
학생 중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바로 토비 파스콜.
그가 박혁진에게 가장 격렬히 저항했다.
비록 AA급 초입에 있는 각성자지만 등급 값을 못하는 이가 토비였다.
모두가 기대를 안 할 정도.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혼자 살아남으니 긴장이 최고조가 된 것.
그 때문인지 토비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했다.
주변이 보이지 않게 되자 토비의 진면목이 나왔다.
파스콜 가의 현란한 검술이 펼쳐지면서 박혁진을 몰아세운 것이다.
파스콜 가의 검은 화려함 속에 날카로움을 숨긴 검술.
쾌검이 극에 달했다.
수세에 몰린 상대를 마무리하기 좋은 검술이었다.
박혁진을 끝까지 몰아붙이다가 막판에 고꾸라졌으나.
토비의 실력은 상당히 뛰어났다.
“네 긴장을 장점으로 바꿔 봐. 날 몰아세울 때처럼 말이야.”
박혁진의 어깨동무에도 흠칫하는 토비였다.
토비의 소심함이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실력만 제대로 발휘하면 네가 이길지도 몰라.”
“저, 정말이요?”
“어. 최선을 다해 봐.”
박혁진은 토비에게 한 어깨동무를 풀곤 뒤로 빠졌다.
운동장 중앙에는 탈리아와 토비 두 사람만이 남았다.
스르릉-
탈리아가 먼저 검을 꺼냈다.
“빨리 끝내 줄게.”
“…안 질 거야.”
탈리아의 등급은 AA급 완숙.
토비의 등급은 AA급 초입이었다.
한 단계나 차이가 나는 등급.
안 봐도 뻔한 승부였다.
토비가 검을 꽉 잡았다.
박혁진의 응원에도 몸이 잔뜩 굳어 있었다.
‘모두가 날 보고 있는 것 같아.’
주목받는 걸 가장 싫어하는 토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자신을 보자 긴장이 전신을 지배했다.
심지어 이곳엔 파천자까지 있는 게 아닌가.
신권 사형준의 주인.
자신을 이 외진 나라까지 와 유학하게 만든 자의 가주가 보고 있었다.
‘저, 정신… 차려야 해.’
토비가 검을 꽉 쥐었다.
그러자.
웅웅.
그의 검이 울었다.
검이 토비를 불렀다.
“시작 안 할 거야? 아니면 내가 선공한다?”
탈리아의 말에 토비가 검을 뽑아 들었다.
“해.”
그가 짧게 대답한 후 검에 마력을 담아 사선으로 그었다.
그의 검에서 쏘아진 검기가 탈리아를 향해 폭사했다.
탈리아도 검에 마력을 주입해 날아오는 검기를 막았다.
허공에 날린 먼지가 가라앉으려 하는 그때.
먼지를 뚫고 탈리아가 토비를 향해 날아갔다.
그녀의 검이 허공에서 여러 번 번쩍였다.
그 번쩍임이 끝나는 순간.
토비의 옷자락이 잘렸다.
한 군데가 아닌 팔, 다리, 배, 목 부분이었다.
다른 곳은 괜찮았지만 목 부위에선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 * *
“상당히 빠른데?”
파스콜 가의 검술은 무공의 쾌검과는 사뭇 달랐다.
마치 공간을 건너뛰고 날아가는 느낌이랄까.
격공의 검술이었다.
“저것만 보면 서양의 검술이 무공보다 한 수 위란 말이야.”
“그 정도입니까, 선생님?”
진경수가 이준의 옆에서 찰싹 붙어 있었다.
허수와 조용석도 마찬가지였다.
세 명이 이준의 수발이라도 들려는 듯.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AA급 각성자는 무림의 등급으로 초절정이에요. 저렇게 완벽하게 격공류를 사용하려면 초절정의 끝을 앞에 두고 있어야만 가능해요.”
“탈리아 파스콜의 등급은 AA급 완숙이니… 선생님의 말씀보다 더 빨리 격공류를 구사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진경수가 이해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생겼다.
“저희처럼 검술의 등급이 높은 게 아니겠습니까?”
“파스콜 검술은 S급. 여러분의 무공보다 등급이 낮아요.”
이준의 설명에 모두가 놀랐다.
S급도 높은 등급에 속했으나 그들의 무공과 비교하면 흠이 있었다.
S급과 SS급은 천지 차이.
SS급과 SSS급은 그보다 훨씬 차이가 났다.
이준의 각성자 등급이 낮을 때 가문연맹을 찢어발겼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파천혈신의 무공.
그것도 SSS급 내공을 지녔다.
이 등급의 무공을 가지고 진다는 게 말이 안 됐다.
각성자의 등급이 높아도 무공 등급의 한계는 어쩌지 못했으니까.
혈족 계승이 중요한 이유.
파스콜 검술은 S급이나 같은 등급의 무공보다는 윗줄에 있는 듯했다.
“서양이 왜 고평가받는지 이해했습니다.”
“우리 무공이 S급에 있었다면 위험했겠어요.”
“저희도 더 노력해야 할 듯싶습니다.”
만약 탈리아 파스콜의 검술이 SS급이면 어떻게 되는 걸까.
세계의 군주는 한국이 아니라 서양이 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아니, 이준이 나타나기 전까지 세계 군주는 서양의 차지였다.
그만큼 서양과 동양의 무력 차이는 심했다.
“암흑대제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이지안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그녀를 바라봤다.
“암흑대제를 봤어?”
“남자야 여자야?”
“얼마나 강해?”
이지안을 향해 질문이 쏟아졌다.
“스페인에 혼돈의 나무가 피었을 때 잠깐 봤어요.”
“대박!”
“그때 우린 각자 가문에서 수련하고 있을 때였는데.”
“가주 오빠 말처럼 무공보다는 서양의 검술이나 마법이 한 차원 위에 있는 것 같아요.”
냉정한 이지안이 내린 결론이었다.
등급이 높아져 우쭐하던 특별 1반 출신에게 경각심이 생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극자는 홀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준이 넌 전혀 상관이 없느니라. 이미 이 사부가 옛날에 색목인 놈들을 교육시켜 놨느니라.]
‘그래서 사부님한테 원한이 많잖아요.’
무림에만 있으면 될 텐데 그란투스 대륙까지 가서 힘자랑한 무극자 사부였다.
대륙 칠좌가 나타나 세상을 혼돈에 빠트린 것도.
자신을 적대시한 것도 모두 무극자 사부 때문이었다.
파천혈신의 무공을 익힌 자신은 대륙 칠좌의 경계 대상.
이대로 놔두었다간 칠좌의 계획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을 터다.
그래서 크기 전에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이다.
물론 어림도 없는 소리.
되레 죽임을 당한 건 대륙 칠좌였다.
칠죄종인 줄 알았건만 그들은 대리인.
악마, 마족의 노예일 뿐이었다.
[고금제일인이면 원한 관계가 많을 수밖에 없느니라. 무튼 제자는 걱정할 필요 없다.]
‘제가 걱정하는 걸로 보이세요?’
[아니냐?]
‘칠죄종이 와도 저한테는 안되죠.’
[홀홀홀. 당연하지. 누구의 제자인데.]
‘파천혈신의 제자가 접니다.’
두 사제는 또 자기들 자랑을 늘어놨다.
무극자에게 완전히 물들어 버린 이준이었다.
두 사람 다 성격이 오락가락했다.
어떨 때는 진중하면서 무게가 있었고.
어느 때는 지금처럼 철딱서니가 없었다.
혼원신공을 대성한 부작용이랄까.
아무튼 정상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토비가 수세에 몰렸다.
탈리아는 반격할 틈도 주지 않고 공격을 가했다.
그녀가 검강을 길게 뽑아 토비의 머리 위로 내려쳤다.
쾅!
토비는 막는 걸 포기하고 뒤로 넘어졌다.
“왜 그걸 사용 안 하지?”
이준이 홀로 중얼거렸다.
“무엇을 말입니까?”
허수의 물음에 이준이 대답했다.
“파스콜 가문의 광기.”
“예?”
“남자들만 타고난 미친 스킬이 있어.”
파스콜은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 가문이었다.
행동에 있어 언제나 조심했으며.
누구에게나 예의 바르게 했다.
기사의 고결함을 몸소 지키는 이들이 바로 파스콜 가였다.
하나 싸울 때만은 고결함은 집어 치웠다.
전장에서 빛나는 하나의 투지.
광기야말로 파스콜 가를 지탱하는 힘 중 하나였다.
“혁진이는 저 녀석의 힘을 알아서 내보낸 것 같은데 말이야. 내가 자극해 볼까?”
이준은 팔짱을 낀 상태 그대로 토비에게 살기를 보냈다.
* * *
넘어진 토비에게 은밀하고 진득한 살기가 다가왔다.
‘누, 누나가 보낸 사, 살기?’
아니었다.
탈리아 파스콜은 앞에 있었다.
살기의 방향은 뒤쪽.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살기는 여전히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대체 누구야?’
“어딜 한눈팔아.”
탈리아가 토비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의 턱 끝에 닿은 그녀의 검.
“그만 포기할래?”
탈리아가 토비를 압박했다.
앞에선 탈리아가 뒤에선 알 수 없는 살기가 토비의 전신을 휘감았다.
‘죽을 거야.’
누나인 탈리아가 자신을 죽일 리는 없었다.
문제는 어디선가 느껴지는 살기.
마치 자신의 목숨을 노리며 다가오는 듯했다.
이래로 가만히 있다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토비의 몸에서 피가 빠르게 돌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러다가 이내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창백하던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자.
탈리아는 이상함을 곧바로 인지했다.
“설마!?”
탈리아는 동생이 변하지 못하게 검을 그대로 찔렀으나.
척-
토비가 손가락으로 탈리아의 검 끝을 붙잡았다.
그의 피부가 붉어졌다.
탈리아가 뒤로 멀찍이 물러났지만.
토비가 곧바로 따라붙었다.
이전과는 다른 움직임.
상황 판단이 정말 빨랐다.
“버서커 모드?”
사람들은 이를 광전사 모드라 불렀다.
버서커를 컨트롤하기 전까지는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만 발휘되는 힘이었다.
토비는 여태 버서커 모드를 사용해 본 적이 손에 꼽았다.
그런데 오늘 목숨의 위협을 받자 버서커가 발동한 거다.
“크으….”
토비의 입에서 거친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가 검을 휘둘렀다.
탈리아는 검을 세워 토비의 공격을 급하게 막았다.
쿵-
“악!”
토비의 검격을 버티지 못한 탈리아가 뒤로 처박혔다.
얼마나 강하게 부딪혔는지 그녀가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끝났네.”
“이제 반격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준의 말에 진경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세가 역전된 건 알겠지만 저 한 번의 공격에 탈리아가 무력화되진 않을 거라 여겼다.
“버서커 모드일 땐 1분 1초가 중요해요.”
“스킬을 사용한 사람이 말입니까?”
“아니요. 상대가요.”
“예?”
“버서커 모드가 끝날 때까지 시간을 최대한 끌어야 하는데 저렇게 일어나는 것에 시간을 소비하면 절대 못 이겨요.”
토비는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아는지.
탈리아에게 정신을 차릴 시간을 주지 않았다.
오로지 근접전.
검에 불이 차오른 상태 그대로 탈리아를 베어 갔다.
일말의 자비도 없는 살검이었다.
쾅!
탈리아가 마력을 올려 막아 보려 했으나.
광분 상태가 된 토비의 마력을 감당하지 못했다.
연이 끊기듯 뒤로 날아가는데.
어느새 토비가 그녀의 위에 나타났다.
화염검을 역수로 잡아 그대로 탈리아의 몸에 밀어 넣으려 했다.
[위험한 상태이니라.]
‘그런 것 같네요.’
박정연과 박혁진도 이를 알고 대결을 중단하려 했다.
두 남매가 토비를 막으려 뛰어드는데 이준이 더 빨랐다.
회색의 아지랑이가 허공을 격하며 토비와 탈리아 사이에 끼어들었다.
토비의 화염검이 회색의 아지랑이에 부딪힌 순간.
끼이이익!
쇳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무극기에서 토비의 화염검을 튕겨냈다.
탈리아를 쉽게 상대했던 버서커 모드도 이준의 무극기 앞에선 무용지물.
무극기에 의해 튕겨 나가 하늘로 치솟은 토비가 잠시 후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구경하던 이들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