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1화
무극자가 딴청을 피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 너를 생각해서 한 행동이니라.]
“개고생 확정인데요?”
[구천옥 죄인 전부가 탈출하지는 못했다. 이 사부가 모두 죽여 버린 탓이지. 놈들 전부가 탈출해서 인계로 내려오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
무극자는 놈들이 인계로 도망치려는 걸 알지 못하고 죽였다.
그저 자신의 앞을 가로 막았기에.
주경아를 만나는 걸 방해했기에.
죽인 것이다.
다른 뜻은 없었다.
“재앙이 펼쳐지겠죠?”
[대재앙이니라. 생사경에 달한 놈들의 숫자만 천 명이 넘느니라. 이 사부가 아무 생각 없이 죽인 게 아니야.]
이준이 자신의 턱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씀이세요.”
이준의 반응에 일 사자가 뜨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 저 말을 믿어? 바보인가?’
일 사자는 두 사제의 대화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정상인들의 대화가 아니었다.
심지어 이준이란 놈은 신선제를 치켜세워 주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역시 사부님이세요. 몇 수를 내다보시는 거예요? 제자가 힘들까 봐 적당히 죽이셨네요.”
[홀홀홀.]
무극자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허허롭게 웃었다.
이준이 손쉽게 넘어와서 만족한 얼굴이었다.
이에 일 사자가 경악했다.
‘시, 신선제가 웃었어…. 신선계와 지옥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파천혈신이!’
일 사자는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파천혈신의 미소를 본 자는 죽는다.
신계에 떠도는 소문이었으나 그 진위를 이번에 신선계와 지옥계에서 직접 목도했다.
어찌 공포란 감정이 안 올라올까.
뒷골이 땅기기까지 했다.
신계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신선제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일 사자였다.
‘염라대왕께 보고할 사안이다.’
신선제를 제어할 사람 중 하나로 이준이 추가됐다.
“그런데 사부님.”
[말하거라.]
“놈들이 탈출하기 전에 싹 죽여 버리지 그러셨어요. 사부님 실수한 척 죽이는 거 잘하실 거 아니에요? 저보곤 맨날 그러라면서.”
[앞서 말했다시피 중간에 경아가 끼어드는 바람에 놈들을 죽이지 못했느니라. 경아만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놈들은.]
무극자의 목소리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렀다.
[모두 소멸됐을 것이니라.]
최대한 억제를 했지만 이준과 일 사자에게까지 그 살기가 전해졌다.
이준은 무극자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으나 개의치 않아 했다.
어차피 저 살기가 자신에게 향할 일은 없을 테니까.
“후우. 어쩔 수 없죠. 제가 고생을 해야지. 그렇지, 파랑아?”
[응. 주인님이 수고해.]
“너도 도와줄 거지?”
[당연하지.]
파랑이가 주머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종인 파랑이도 도와주면 구주를 찾기 훨씬 쉬워질 터다.
파랑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그때였다.
“어?”
[왜 그러는 게냐.]
“사부님. 파랑이도 사신수와 같은 절대종이잖아요. 탐은 구주의 냄새를 못 맡나요?”
[흠….]
무극자가 파랑이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구천옥의 죄수들은 신계나 인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불완전한 존재.
그들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는 건 오직 사신수밖에 없었다.
무극자가 파랑이를 불렀다.
[파랑아.]
[네.]
[저 창백한 놈의 기운을 맡을 수 있겠느냐.]
[잘 모르겠어요.]
[모르면 연습해 봐야지. 일 사자. 네가 파랑이의 시험 대상이 되어야겠다.]
[예!?]
[기척을 감추고 몸을 숨겨 봐.]
일 사자는 지옥의 명부에 관리자로 이름이 올라 있는 자다.
구천옥의 죄수와는 다른 존재지만, 그들과 비슷한 지옥의 기운을 지녔다.
파랑이가 일 사자의 기척을 감지할 수 있다면 구주의 기도 찾는 게 가능했다.
물론 엄청난 훈련을 거쳐야겠지만.
“제가 말입니까?”
[여기 너 말고 지옥의 기를 풍기는 놈이 또 있나?]
“제 수하들도 있는….”
[구주를 찾아내는 일이니 네가 해라.]
신선제의 말이었다.
일 사자는 지옥계의 소속이었으나.
신선제의 명령을 무시할 배짱은 없었다.
무극자가 신선제가 되기 전, 그에게 맞은 기억도 있고.
염라대왕이 신선제에게 최대한 협력하라고 했으니.
명령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일 사자는 자신의 체면도 버린 채 몸을 숨겼다.
대낮인 데도 불구하고 기척과 함께 감쪽같이 사라진 일 사자.
파랑이는 이준의 주머니에서 나와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리곤 코를 킁킁거리며 일 사자를 찾기 시작했다.
* * *
[저기에 있나?]
파랑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앙증맞은 발로 바닥을 때렸다.
쩌어억!
바닥을 타고 앞으로 전진하는 냉기.
냉기가 지나간 자리에는 얼음이 만들어져 있었다.
[아니다. 저쪽!]
이번에는 냉기가 아닌 암화였다.
파랑이의 몸에서 검은 불꽃이 일어나더니 얼음이 내려앉은 곳과는 반대편으로 폭사했다.
[흠.]
“못 찾는 것 같죠?”
[될 듯 말 듯 하는구나.]
파랑이가 절대종이긴 하나 완전히 성장한 상태는 아니었다.
탐으로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사신수와는 다른 절대종이기도 했고 자연경에 있는 일 사자의 기척을 알아내는 건 어려웠다.
“포식을 사용하면 어떨까요?”
포식은 SSS급 스킬.
상대를 없애는 기술뿐만 아니라 정보도 알아낼 수 있었다.
물론 여태껏 한 번도 포식으로 상대에 대한 정보를 뺏은 적은 없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준에겐 과거의 기억과 모투술이란 스킬이 있었으니까.
[포식이라면 가능성은 있을 듯싶구나.]
“일 사자 님 잠깐 실례할게요.”
이준의 손이 일 사자를 향해 벼락같이 움직였다.
“무슨!?”
일 사자의 몸에서 흘러나온 연기가 이준의 손을 통해 빨려 들어갔다.
흡성공이었다.
이준은 일 사자의 기운을 뽑았다.
“파랑아, 먹어.”
그는 흡성공한 기운을 파랑이에게 뿌렸다.
파랑이가 입을 활짝 벌려 포식을 사용했다.
[파랑이(탐)가 포식(SSS)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지옥의 기를 흡수합니다.]
일 사자의 기운을 먹자 파랑이의 눈이 검게 빛났다.
파랑이는 맛을 음미한 듯.
혀를 할짝거렸다.
“쉽게 가자.”
이준이 간절히 빌었다.
이도 안 되면 앞으로 고생길이 훤했다.
흑염마조라는 사신수가 곁에 있으나.
사신수의 힘을 완전히 사용하려면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가 힘을 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때가 제일 골치 아플 터.
이 사실을 구천옥의 죄인들이 모를 리 없었다.
사신수가 가장 약해진 상태일 때를 노리지 않을까.
그래서 파랑이가 꼭 필요했다.
파랑이는 탐이 되고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가 힘을 충전할 필요가 없어졌다.
포식으로 기운을 먹어치면 그만.
사신수와는 다르게 행동에 제약이 없으니.
활동을 편하게 할 수 있었다.
파랑이가 구주를 찾아 주기만 한다면 사신수를 찾는 고생도 불필요하고.
사신수가 영역 밖으로 나오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 구주도 사신수를 찾는 게 힘들 터.
차라리 다 같이 개고생하는 게 나았다.
혼자 힘든 것보다는 말이다.
이른바 물귀신 전략.
구주를 찾을 시간도 벌고, 사신수도 보호하고 얼마나 좋나.
일석이조의 전략이었다.
[준비됐어!]
파랑이가 이준에게 신호를 보냈다.
다시 시험을 해 보라는 눈빛이었다.
“일 사자 님 부탁드릴게요.”
일 사자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강탈당한 내공이 미미하다고는 하나.
그래도 기분이 나빴다.
무인에게 있어 내공은 제2의 목숨.
그런 걸 허락도 구하지 않고 강탈한 게 아닌가.
하지만 불만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이준의 곁에는 신선제가 있었으니까.
신선제가 자신의 제자에게 반말을 허용해 준 것도 크나큰 아량.
그의 성격이라면 존대를 안 한다고 개처럼 팼을 것이다.
‘사제지간이 날강도가 따로 없다! 지옥계 서열 2위인 내 체면이 말이 아니야.’
염라대왕에게 말해 인계에서 철수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설마 인계에 내려와서까지 이런 대접을 받을 줄 상상이라도 했겠나.
염라대왕의 곁이 그리웠다.
염라전으로 오는 망자들을 관리하는 게 가장 편했다.
“일 사자 님?”
“알았다!”
일 사자는 차마 불평은 못 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갑자기 왜 그러시지?”
[원래 저런 놈이니 신경 쓰지 말거라.]
“많이 예민한 분이구나. 알겠어요.”
이준과 무극자의 말에 일 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희 때문이다. 이 날강도 놈들아!’
일 사자가 사라지자 파랑이의 몸에서 검은 불꽃이 올라왔다.
파랑이가 코를 킁킁대더니 이내 앞발로 땅을 짚었다.
화르륵-
땅에 암화의 기둥이 솟았다.
기둥은 임의대로 생기는 게 아니었다.
마치 보법을 사용한 무인이 이동한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듯.
불기둥이 올라왔다.
그러다가 이내 길이 끊겼다.
[여기서 사라졌어.]
파랑이가 아쉽다는 목소리로 이준에게 말했다.
“사부님 어때요?”
[괜찮구나. 작은 기운만으로 일 사자의 경로를 알아내는 건 꽤 큰 성과지.]
“죄인들의 물건으로 연습해 보면 되겠네요. 일 사자 님 죄인들의 물건 좀 빨리 구해다 주세요.”
‘내가 네 부하냐! 너희가 싼 똥이니 알아서 해!’
일 사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최대한 엮이고 싶지 않은 두 사람.
이 일이 끝나면 지옥에서 평생 있을 거라 다짐한 일 사자였다.
“조금만 기다려라.”
그 말을 남기고 일 사자가 사라졌다.
“참 퉁명스러운 저승사자네요.”
[무게를 지키고 싶은 모양인데 내 앞에선 어림도 없지 끌끌.]
“체면 좀 세워 주세요. 명색이 저승사자들을 이끄는 우두머리라면서요.”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구나.]
“네? 제가 왜요? 전 최대한 정중히 말했는데. 파랑이 그치?”
[주인님 말투치고는 착했어.]
“내 말투가 어떤데?”
[싸가지 없어.]
“뭐?”
[사실이야.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 봐. 다 파랑이처럼 말할걸?]
“사부님.”
[사실이니라.]
“에엑!?”
이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만 모르는 눈치였다.
[그보다 제자야.]
“왜요?”
[이제 그만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느냐?]
“어디를요?”
[학교로 말이다.]
“뜬금없이요?”
[방황은 충분히 했느니라.]
“방황이 아니고 몬스터 토벌인데요. 사부님께서 벌인 일을 제가 수습하고 있는 거죠.”
[큼. 곧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무공을 계승한 각성자가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저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리고 이제 학교는 안 가도 되지 않아요? 애들은 충분히 키워 줬잖아요.”
[네 말도 맞다. 그런데 이상한 걸 느끼지 못했느냐?]
“이상한 거요?”
이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메시지 창을 보거라.]
이준은 무극자의 말대로 메시지 창을 꺼내 보았다.
[레드급 카오스 몬스터 아켄을 잡았습니다.]
[보상으로 테크트리 포인트 2,500,000p가 지급됩니다.]
……
……
[블랙급 카오스 몬스터 게라간을 잡았습니다.]
[보상으로 테크트리 포인트 5,000,000p가 지급됩니다.]
[블랙급 카오스 몬스터 데란을 잡았습니다.]
[보상으로 테크트리 포인트 5,000,000p가 지급됩니다.]
“어? 왜 테크트리 포인트가 올라가 있지?”
이준이 화들짝 놀랐다.
무극자 사부의 무공을 전부 찍고부터 테크트리 포인트가 주어지지 않았다.
한데 이게 무슨 일인가.
영문을 몰라 멍을 때리다가 혹시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천천히 손을 들어 홀로그램을 눌러 봤다.
만에 하나 자신의 생각이 맞으면 테크트리 창에 새로운 항목이 생기지 않을까.
눈을 질끈 감고 홀로그램을 눌렀다.
그리고 서서히 눈을 떴다.
“아.”
이준의 입에서 짤막한 탄성이 나왔다.
그의 눈에 여러 항목이 보였다.
“사, 사부님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앞으로 네가 새롭게 배울 무공이니라.]
“사부님의 무공은 전부 계승했잖아요?”
[홀홀홀. 내가 인계에 있었던 때, 네게 전부 전해 주지 못한 게 있었느니라.]
이준은 뜨악했다.
대체 이 사람 뭐지?
지금의 무공도 지구상에선 적수가 없는데 더 있단다.
실제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심지어 친절히 예시 동영상까지 있는 게 아닌가.
자신이 게임을 하고 있는지 의심마저 들었다.
예시 동영상은 하늘 위에 존재하는 무공.
입이 떡 벌어졌다.
괜히 사부가 패천기공이 고금제일의 무공이라고 자부한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