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0화
“안녕하세요. 검법 강의1을 맡은 박정연이라 해요.”
그녀의 소개에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휘이익!”
“예쁘다!”
“누나 나 죽어!”
박정연이 미소를 짓자 남자들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녀가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자 대다수가 쓰러졌다.
“듣기 좋은 말은 감사하지만 전 임자가 있는 몸이라 자제해 주세요.”
“에엑!?”
“정말입니까?”
“그 개자식은 누구인가요!”
“제가 당장 그놈의 상판을 봐야겠습니다.”
남학생들이 분노를 터트렸다.
자신들만의 여신을 건드리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감히 누구를 넘본 건지 주제 파악을 시키고 싶었다.
남학생들이 불타오르는 눈동자를 지니고 있을 때.
여학생들은 호기심이 들었다.
검화의 마음을 빼앗은 남자가 누굴까 궁금했다.
강의를 듣는 이들 중에 검화의 말을 인지한 사람은 무사고 출신뿐.
그녀가 누구를 바라보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제 속을 썩이는데 여러분이 처리해 줄래요?”
“제 앞에 데려만 오십시오. 제가 참교육이 뭔지 보여 주겠습니다.”
“살수를 고용해서 협박하는 건 어떨까요? 말 잘 듣게 성격을 고쳐 놓을 수 있어요.”
“누군지 모르겠지만…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분명해. 분하다!”
남학생들의 반응에 박정연이 빙그레 웃었다.
난 임자가 있으니 건드리지 말라는 철벽.
저들은 다르게 해석했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이준이라고 저보다 한 살 연하인 애가 있는데 제 속을 썩이네요.”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무사고 출신들만 숨죽이며 웃었다.
무사고에서 박정연과 이준의 관계는 유명했다.
사귀는 사이는 아니지만 서로 끔찍이도 아끼는 사이.
무사고 학생들의 우상이었던 박정연이 이준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누구나가 알았다.
다만 대외적으로는 많은 부분이 가려져 있었다.
“참교육 해 주실 거죠?”
“예, 예!? 저 그게….”
“살수를 고용하신다는 분은 어디 갔을까요?”
박정연의 농담 덕분인지.
모두가 웃으며 가볍게 이야기를 나눴다.
첫 한 시간은 웃고 떠들며 지나갔다.
남은 시간은 앞으로 배우게 될 방향을 설명했다.
“간단하게 수업을 설명할게요.”
“옙!”
쓰러진 이들이 오뚝이처럼 일어나더니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 어느 때보다 초롱초롱한 눈.
그들의 집중력은 최상이었다.
“제가 여러분께 가르칠 내용은 기초 검법 수련이에요. 말이 기초지. 등급을 높이려면 꼭 필요한 수련법이죠.”
학생들의 눈이 다른 의미로 빛났다.
높은 등급으로 올라가는 수련법.
그들이 각성자 사관 학교에 들어온 이유였다.
“제 수업에 이론은 따로 없어요. 몸을 직접 움직여서 깨달아 보세요. 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볼까요?”
박정연이 박수 치며 모두를 일으켜 세웠다.
“무기 진열대에서 수련용 철검을 뽑아 오세요.”
“가지고 있는 무기로 하면 안 되는 겁니까?”
“수련용 철검은 특별 재료로 만들어진 검이에요. 여러분이 사용하는 무기와는 다르니 철검을 사용하세요.”
그녀의 말에 학생들이 수련용 철검을 뽑아 들었다.
“억!”
“이 무게는 뭐야?”
“팔 빠지는 줄.”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수련용 철검을 뽑으려다가 식겁했다.
아무리 힘을 줘도 철검이 뽑히지 않았다.
내공을 사용해도 간신히 반쯤 들어 올릴 정도였다.
“들기 힘든가요?”
“철검의 무게가 너무 나가는 것 같은데….”
“이러다 수련은커녕 팔이 먼저 나가지 않을까요?”
“5톤은 되지 않습니까?”
“수련용 철검의 무게는.”
그녀가 무기 진열대로 가서 수련용 철검을 뽑았다.
스르릉-
너무도 쉽게 뽑히는 철검이었다.
“1톤밖에 되지 않아요.”
“예에!?”
“내가 못 들어 올릴 일은 없는데.”
학생들이 눈동자를 크게 뜨곤 다시 철검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여전히 철검은 뽑히지 않았다.
모든 내공을 사용해야지만 간신히 뽑혔다.
그마저도 얼마 가지 못하고.
쿵.
철검을 놓치고 말았다.
“여러분이 검을 뽑지 못한 이유를 알려 줄까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검에 무슨 짓을 해 놨길래.
자신들이 못 뽑는 건지 궁금했다.
박정연은 학생들에게 이유를 말해 주었다.
“이 철검에는 비밀이 있어요. 바로 사용자의 내공을 빨아들이는 기능이죠.”
내공을 사용하지 않아도.
내공을 끌어 올려도 잘 뽑히지 않은 이유였다.
“철검을 잡는 순간 여러분의 내공이 철검으로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들어 올리지 못하는 거예요.”
“교수님. 질문이 있어요.”
한 여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녀의 이름은 탈리아 파스콜.
검은 머리에 웨이브를 넣은 그녀가 박정연에게 질문했다.
“말하세요.”
“각성자의 신체는 일반인과는 다르잖아요. 그러면 내공이 없어도 1톤의 무게 정도는 들어 올릴 수 있지 않아요?”
“맞는 말이에요. 힘이 강한 각성자라면 내공이 없어도 1톤의 무게쯤은 들 수 있겠죠. 하지만 철검에는 내공을 흡수하는 기능만 있는 게 아니에요. 사용자의 신체 능력을 떨어트리는 기능도 함께 있어요.”
“아.”
일반적인 수련용 철검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막 만들어진.
흔해 빠진 철검으로 보이나.
기능만 보면 마검류에 속했다.
“이 철검은 사용자에게 내공을 뺏지만 여러분의 내공을 잃게 하지는 않아요. 이걸 만들어서 각사학에 보급한 사람이 바로 파천자거든요.”
“파천자!”
“그분께서 만든 수련용 철검이라니….”
“보통 물건이 아니었어.”
파천자의 이름이 또다시 나오자 너도나도 웅성거렸다.
그가 각사학에 철검을 그냥 보급했을까.
수련에 도움이 되니 보급했을 터.
철검을 뽑아 휘두르는 연습만 해도 실력이 급상승할 거다.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게 맞아요. 이 철검을 휘두르면 지금보다 두 배는 강해져 있을 겁니다.”
물론 본격적인 훈련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이준에게 배웠던 수련법을 실행할 차례.
그때부터는 지옥이 펼쳐질 것이다.
“철검을 뽑고 휘두르는 학생부터 수련을 시작할 테니 열심히 해 보세요.”
그녀의 말에 학생들이 철검을 뽑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 * *
“사부님.”
[오냐.]
“점점 카오스 균열이 늘어나는 것 같지 않아요? 꼭 큰 일이 일어나기 전 같은데.”
일반 블랙급 몬스터를 죽이자 레드급 카오스 몬스터가 나왔다.
그래 봤자 이준의 상대가 안 되겠지만.
몬스터를 죽일수록 균열의 빈도가 늘어나고 있었다.
[차원이 불안정해서 그러느니라.]
“다 사부님 때문에 그런 거네요.”
[큼큼.]
“그러게, 그냥 살지 왜 죽으려 하셨어요.”
[네놈이 이 백 년을 넘게 살아 보거라. 지겨워서 못 살겠다고 지랄발광을 했을 것이다.]
“전 아닌데요.”
[흥. 스무 살까지 여자도 없는 놈이 말이 많구나. 여자 손은 잡아 봤느냐.]
무극자가 아픈 곳을 찌르자 이준이 버럭 소리쳤다.
“제가 마음만 먹으면 여친은 바로 만든다고요!”
[끌끌끌. 이 사부를 웃겨 줘서 고맙구나. 기특한 제자인지고.]
무극자의 웃음에 이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무언가 비웃는 것만 같았다.
‘너는 평생을 가도 연애는 못 한다.’라는 느낌이랄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때였다.
싸한 기분이 들었다.
‘죽음의 기운?’
갑작스레 찾아온 소름.
뒷목이 뻐근했다.
무극자 사부만큼은 아니나 그와 비슷한 위험이었다.
이준이 육성으로 소리쳤다.
“누구냐.”
그의 몸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
무극기가 움직였다.
죽음의 향기가 나는 곳을 향해.
쾅!
무극기가 조금 떨어진 바닥에 폭사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죽음의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준은 무극기를 사용하여 계속 공격했다.
허공을 빠르게 가로지르는 무극기.
허공에서 여러 번 꺾이더니 변칙적으로 바닥에 폭사했다.
하나 그뿐이었다.
죽음의 기운이 곁에 머물고 있는 게 느껴졌다.
[됐다. 나와라.]
무극자 사부가 입을 여니.
그제야 죽음의 기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무복에 삿갓을 쓴 남자.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는 이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신선제를 뵙습니다.”
창백한 남자는 정확히 무극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사부님을… 봤어?”
누구도 사부의 존재는 알아채지 못했다.
사신수와 파랑이만 빼고 말이다.
그런데 자신 이외의 인간이 사부님을 알아본 것이다.
[염라대왕의 최측근인 저승사자이니라.]
“저승사자요?!”
이준은 왕방울만 한 눈으로 창백한 남자를 유심히 관찰했다.
소설이나 TV에서 봤던 저승사자의 모습과 판박이였다.
다른 게 있다면 간지였다.
멋이랄까.
과묵한 분위기.
창백한 얼굴이나 흠잡을 곳 없는 잘생김.
키도 190에 육박한 장신.
마치 옛날 조선 시대의 선비와 같았다.
이게 바로 조상들의 옛 멋이랄까.
[무슨 일이냐.]
“역시나 구주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인장은 염왕의 곁에서 떨어질 수 없으니 당연하겠지. 결국 이 방법뿐이군.]
저승사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무극자가 이준에게 말했다.
[준아.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생겼다. 아니, 해야만 한다.]
무극자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하니.
이준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뭔데요?”
[사신수를 찾아 보호해야 할듯싶구나.]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지옥에서 죄인이 탈출했다. 무림에서 악명이 자자했던 놈들이지. 놈들이 인계로 숨어들었는데 찾는 방법이 사신수밖에 없구나. 놈들은 저승사자들이 자신을 찾지 못하게 사신수를 제거하려 들 것이다.]
“얼마나 강해요?”
[너와 동률. 최상위에 속한 놈들은 너보다 강하다.]
“위험한 놈들이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얼굴엔 전혀 긴장감이 없었다.
이준은 강했던 이들을 모두 쓰러트리고 이 자리에 섰다.
지금은 사부도 옆에 있으니.
상대가 자연경이라 하더라도 겁나지 않았다.
“카오스 게이트가 출몰하고 있는 것도 지옥과 연관 있는 거예요?”
[그렇다고 볼 수 있느니라. 놈들이 구천옥을 탈출하면서 세상에 구멍이 생긴 것이지.]
“조용해지려고 하면 사건이 생기네요. 어쩐지 사부님께서 계속 수련 이야기를 꺼낸다 싶었어요.”
[큼큼.]
무극자가 헛기침을 하는데 일 사자가 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마주가 마계로 간 듯싶습니다.”
[사부님께서 하셨던 말이 맞았구나. 왜 하필 마계에….]
무극자의 음성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묻어나 있었다.
사부의 우울한 목소리에 이준은 최대한 맑게 말했다.
“사부님이라 하시면 사조님?”
[내가 아직 말 안 했구나. 사부의 사부님인 천극자 님을 지옥계에서 만났느니라.]
“신선계가 아니고요?”
[이 사부도 자세한 건 듣지 못했지만, 전대의 신선제가 바로 천극자 님이셨다.]
“오오!”
이준은 일부러 반응을 크게 했다.
무극자 사부가 죽으려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주경아 때문.
사부는 평생을 사랑한 여자 때문에 고금제일인도 포기하고 신선계에 오르려고 했었다.
물론 제어하지 못하는 살기 때문도 있었으나.
궁극적인 이유는 주경아였다.
사부의 목소리만 듣고도 예상할 수 있었다.
마주란 사람이 누군지 말이다.
흑염마조에게 들은 정보를 토대로 생각하면.
주경아는 신교의 금지옥엽.
교주의 딸이기도 했고, 재능이 뛰어나 천마신공을 이었다고 했다.
마주는 마의 주인.
천마신공을 익힌 자가 마주가 아닐까 추측했다.
[그분께서는 이 사부가 신선제에 오르길 원하셨느니라.]
“그래서 사부는 사조님의 말씀을 듣고 신선제에 올랐다는 말이죠?”
[그러느니라.]
“쫓겨난 게 아니셨네요. 아깝다.”
[뭬야?]
“농담이에요.”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사부는 지옥과 연계해서 구천옥에서 도망친 구주를 잡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나는 인계에 강림하지 못해. 신선제인 내가 강림하게 된다면 차원은 더욱 비틀릴 게다.]
“결국 이곳에 숨어든 놈들은 제가 잡아야 한다는 소리네요?”
[잘 이해했구나.]
“그분은 제가 안 잡아도 되죠?”
[누구 말이냐?]
“마주요. 사부님이 사모하는 분.”
[녀석. 눈치챘느냐.]
“제가 사부님에 대해 모르는 게 어딨어요.”
[경아는 사부가 해결할 것이니라. 준이 넌 사신수를 보호하면서 죄인들을 잡거라.]
“알겠어요.”
이준은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사부는 어디에서 얽매이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사조께서 사부에게 신선제를 권유해도 싫다고 할 위인.
그런데 사부는 신선제의 자리에 앉았다.
‘아마도 마주 때문일 거야.’
신선제는 높은 자리.
사랑하는 여자의 죄가 아무리 중하다 하더라도 신선제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사부가 신선제에 앉은 거라 생각했다.
“저기 저승사자님?”
“일 사자라 불러라.”
“혹시 구주의 쫄따구를 구해 올 수는 없어요?”
“그놈들은 왜?”
“제가 사람의 기억을 읽는 능력이 있거든요. 놈들을 통해서 구주가 어디로 숨어들었는지 알아보려고요.”
“좋은 방법이긴 한데 난감하군.”
“왜요?”
“신선제께서 모두 죽이셨다.”
“아.”
이준은 고개를 돌려 무극자를 보았다.
무극자는 괜히 무안한지 이준의 눈동자를 피해 딴청을 부렸다.
“내가 사부님 때문에 못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