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제12화
염라대왕의 이마에 내 천 자가 그려졌다.
저 허허로운 웃음 속에 속으면 안 된다.
신선제.
신선계의 왕이 되려면 자격이 필요했다.
고집불통인 신선들을 휘어잡을 힘.
이 힘이 없다면 신선들의 왕이 될 수 없었다.
최단기간에 신선제가 된 인물이 바로 천극자.
마계의 왕까지 죽인 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 자였다.
염라대왕은 난감했다.
천극자와 충돌하게 된다면 구주를 놓치게 된다.
자신이 천극자를 맡는다하더라도 남은 사람은 파천혈신.
사자와 나찰만으로 파천혈신을 뚫는 건 무리였다.
“대왕! 이러다 구주를 놓치겠나이다.”
일 사자의 재촉에도 염라대왕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만에 하나 천극자에게 밀리기라도 하는 날엔 염왕의 위신이 바닥을 칠 터.
그때는 염왕의 자리를 내려놓고 은퇴할 때였다.
그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천극자의 전음이 들려왔다.
[염왕. 내게 해결책이 있네.]
[무슨 해결책?]
[구주와 함께 마계를 쓸어버릴 방법 말이네.]
천극자의 말에 염라대왕의 눈이 반짝였다.
[들어는 보자.]
[구주를 놓아주는 대신 극이를 신선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는 거네.]
[그게 구주를 놓아주는 것과 무슨 연관이라는 말이냐.]
[머리를 굴려 보게나. 마계는 천계와 신선계, 구천옥에 첩자를 잠입시킨 상태 아닌가.]
[그렇지.]
[구주를 미끼로 진마를 끌어내는 게 어떻겠나.]
[그 담당을 신선제에 오른 네 제자에게 맡긴다?]
[그렇다네.]
염라대왕은 생각에 잠겼다.
정말 괜찮은 의견이었다.
사대 신계에 기묘한 기류가 흐르는 상황.
어쩌면 신마대전이 아닌 신계대전으로 번질지도 모른다.
마계의 움직임만 보자면 확률은 9할.
구주가 탈출하면 확률은 거의 10할에 가까웠다.
신계대전이 일어나는 건 기정사실화였다.
‘주경아가 엮여 있으니 파천혈신이 제안을 받아들일지도 모르겠구나. 제 사부도 곁에 있으니 거절은 못 할 거다.’
새로운 신선제의 탄생으로 신선계를 재정비할 명분도 생기고.
천극자와 싸우지 않아도 됐다.
손을 거둘 이유가 생겼다.
나쁘지 않았다.
단 하나의 문제만 빼고.
[신계는 얼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만 인계가 문제 아니냐.]
[극이에게 제자가 있다고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이준이란 아이에게 인계를 맡기자?]
[자네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제안은 없을 거네.]
[큼. 맞는 말이라 반박을 못하겠군. 좋다. 네 뜻대로 하자.]
염라대왕이 흔쾌히 허락했다.
인계의 각성자 이준이라면 믿고 맡길 만했다.
그보다 적임자는 없었다.
파천혈신과 얼마나 닮았던지.
뒤처리가 굉장히 깔끔했다.
손을 씀에 있어 한치의 망설임이 없는 인간.
천극자의 사손이자 파천혈신의 제자답게 자연경에 오른 각성자였다.
[자네가 곧바로 수락하는 걸 보니 사손이 꽤 강한 것 같네.]
[네 제자와 똑 닮았다. 판박이라 해도 될 정도다.]
[역시, 결국 찾아냈구나.]
천극자의 말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염라대왕도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해했다.
[네 제자니 설득은 확실히 해라.]
[알겠네.]
천극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염라대왕이 한발 물러섰다.
천극자는 그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꼈다.
염라대왕이 작정한다고 싸운다면 어떻게 될까.
천극자는 몰라도 파천혈신은 영영 지옥에 갇힐 수도 있었다.
지옥이 위험에 빠졌을 때 발동하는 지옥염왕진은 신계의 왕일지라도 위험했으니까.
어떤 방법이 최선인지.
염라대왕은 주판을 굴려 계산했다.
차라리 협상하는 게 지옥으로서 많은 이득을 취한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극아. 염왕과 이야기를 나눴다. 구주를 놓아주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느니라.”
“사부님.”
“네 상태가 심상치 않으니 다른 곳으로 가자꾸나. 염왕 뒤를 부탁하네.”
“알겠으니 꺼져라.”
천극자가 무극자를 데리고 사라졌다.
그러자 일 사자가 소리쳤다.
“대왕! 저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 구주를 놓아주기로 했다.”
“당치도 않습니다. 구주가 구천옥을 탈출하는 건 지옥의 수치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이라도!”
“그 입 다물라!”
염라대왕의 목소리가 구천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저 두 놈만 있어도 지옥은 쑥대밭이 된다. 네가 막을 수 있겠느냐.”
“사자와 나찰, 그도 모자라면 야차까지 대동해서 싸우면…”
“신마대전을 눈으로 보았다면 그딴 소리는 하지 못할 것이다.”
지옥의 왕인 염라대왕조차도 마계의 왕과는 양패구상.
누구 하나 앞서지 못했다.
천계의 왕도 마찬가지.
하지만 신선계의 왕이었던 천극자는 달랐다.
마계의 왕을 죽여 공석으로 만들 만한 무력을 가진 남자.
저 허허로움은 여유였다.
자신의 뜻에 따라 신계의 왕도 죽일 수 있다는 여유 말이다.
천극자가 전력을 다한다면 염라대왕의 필패.
그를 막을 수 있는 건 지옥의 결계인 지옥염왕진뿐이었다.
“저 혼자 마계의 왕뿐만 아니라 진마군단을 쓸어버린 놈이다. 괜히 벌집을 들쑤시는 것보다 협상하는 게 우리의 위신을 살릴 방법이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본왕이 거짓말할 이유가 있느냐. 그리고 저놈들이 모든 짐을 떠안는다고 하니 우리 지옥으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지. 우린 인계와 신선계 그리고 마계의 첩자들을 잘 살펴보면 된다.”
지금부터 모든 책임은 천극자와 무극자에게 있었다.
‘본왕이 주경아를 살려 줄 명분도 생기는 거지. 신선제의 권한 중 하나를 사용하면 말이야.’
파천혈신이 신선제에 꼭 올라야 하는 이유기도 했다.
신선제의 권한을 사용하지 않으면 천극자가 보호한들 그녀를 살려 줄 순 없었다.
지옥의 율법을 어기는 건 딱 한 번뿐.
더는 지옥의 위신을 떨구면 안 됐다.
* * *
천극자는 무극자를 데리고 구천옥을 빠져나왔다.
구천옥을 벗어나자 무극자를 괴롭혔던 살의가 사라졌다.
천극자는 무극자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넌 어찌 이 사부를 걱정시키는 게냐.”
“죄송합니다.”
“미안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니라.”
그의 눈에는 무극자가 여전히 애로 보였다.
나이를 먹었어도, 겉모습만 예전 그대로라도.
천극자에게 무극자는 항상 챙겨야 하는 제자였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염라대왕에게 제자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제자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어디부터 말씀을 드려야할지…”
“여자아이를 만났을 때부터 말해 보거라.”
천극자의 말에 무극자는 주경아를 어떻게 만났는지.
옛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했다.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며 말하니 무극자의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그 아이가 그리 좋을꼬.’
천극자는 제자가 해맑게 말하는 걸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무극자는 주경아를 동정호에서 만나 첫눈에 반했다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애교가 많았고.
지고지순했으며.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는 아가씨 등.
주경아에 대한 인상을 상세히 설명했다.
“정말 많이 사모했나 보구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와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답다.”
그리고 주경아와 헤어지게 된 이유를 말했다.
하필 천극자에게 전서를 보낼 때 주경아가 잡혀간 것.
그때부터 무극자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사부 앞이라고 살기를 최대한 갈무리하고 제어하려 했지만.
이야기 함에 있어 살의가 묻어 나오는 건 어쩌지 못했다.
무림맹주의 간계에 빠졌다는 걸 알았을 때가 살의의 절정이었다.
천극자가 무극자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 사부가 너를 너무 억압해서 키워서 그리된 것이다. 자책하지 말거라. 사부의 잘못이니라.”
천극자는 무공도 배우지 않았던 제자의 살기가 짙다는 걸 느꼈다.
악인의 손에 큰다면 분명 대살성이 될 거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산속에 처박혀서 세상과 단절시켰다.
순박한 아이로 기르려다 보니.
예의범절을 최우선시했다.
이게 사단이 된 것.
몸에 밴 오만은 자신에게서 비롯된 특징.
이건 고칠 수 없었다.
이립(30살) 동안 봐 온 사람이 사부인 자신밖에 없으니.
당연히 행동을 저절로 따라 하게 되는 게 아닌가.
다만, 문제는 너무 순수했다는 것이다.
특히 어른들에게 항상 깍듯이 하라는 말이 제자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처음 본 사람을 의심도 하지 않고 믿은 게 실수.
그로 인해 제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를 제 손으로 죽이게 됐다.
“너를 세상 물정 모르게 키우는 게 아니었거늘.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사부님. 제자가 어리석어서 생긴 일입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더욱 처참했다.
사모하는 여자가 자살한 일.
그녀의 배 속에 아기가 있었던 사실.
그리고 평생 그녀를 그리워하다가 찾은 해법까지.
길고 길었던 이야기가 끝났다.
“많이 힘들었겠어.”
“이제 사부님의 이야기를 해 주시겠습니까?”
“내 이야기는 별것 없다.”
“그래도 듣고 싶습니다.”
괴로웠던 과거의 이야기를 해서 슬플 법도 할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극자는 천극자가 어떻게 지냈는지 되물었다.
“내 이야기는 다음에 해 주겠다. 네 일이 더 급하지 않더냐.”
사부인 천극자가 말하길 꺼려하자 무극자는 그의 뜻을 따랐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허허, 녀석. 제자를 챙기는 건 사부로서 당연한 일이다.”
무극자의 행동에 천극자가 허허롭게 웃었다.
여전히 사부에 대한 공경이 넘쳐났다.
변한 게 없는 제자를 본 그가 염라대왕과 했던 거래를 입에 올렸다.
“네가 사모하는 아이를 염라대왕에게서 벗어나게 할 방법이 있다. 그리고 네가 알던 아이로 되돌릴 방법 또한 있지.”
“정말입니까?”
“대신 네가 해야 할 게 있다.”
“그녀가 염라대왕에게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 어떤 것도 말이냐.”
“예.”
무극자의 눈은 결연에 차 있었다.
얼마나 주경아를 사모하는지 천극자에게도 느껴졌다.
“좋다. 방법을 말하마.”
무극자는 천극자의 말을 경청했다.
“네가 나 대신 신선제에 오르거라.”
“예!?”
“신선제에 올라 왕의 권한을 염왕에게 행사하면 네가 사모하는 아이를 놓아줄 것이다.”
“사부님이 계시는데 제자가 어찌 그 자리를 탐내겠습니까.”
“나는 신선제에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네가 신선제에 오르거라. 지금 신계의 상황이 좋지 않아. 그 아이가 마계와 연관이 됐다.”
“마…계와도 말입니까.”
“그래. 그 아이는 구천옥을 탈출한 것도 모자라 마계와 야합을 하려 하는 모양이다.”
“아.”
“이 사부가 네게 신선제의 자리에 오르라고 한 이유를 알겠느냐.”
주경아는 선을 넘어 버렸다.
그것도 많이.
그녀의 죄를 덮으려면 왕들의 막강한 권한뿐이었다.
왕의 권한은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데 그 어떤 왕이 주경아의 죄를 사하는데 권한을 쓸까.
스스로 왕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인계도 위험할 수 있으니 네가 수고를 많이 해야 할 것이야. 염왕에게 들으니 네 제자가 널 닮아 뛰어나다더구나.”
이준의 이야기가 나오자 무극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인계에선 이길 놈이 없습니다.”
“누구의 사손인데 당연한 일이니라.”
천극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해 했다.
무극자의 자화자찬이 누구에게서 이어졌는지 잘 드러났다.
“극이 네가 신선의 능력을 사용해서 사손을 도와주기도 하거라. 신선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무극자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신선제가 되는 건 한쪽에 몸이 묶이는 것과 같다.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신선제가 되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가장 우선인 건 주경아를 염라대왕에게서 구하기 위해.
신선제의 권한을 발휘해서 주경아가 지은 죄를 사하기 위해.
신선제에 올라야 했다.
또한 인계에 혼자 남은 자신의 제자.
이준을 위해서도 자신이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야 했다.
“사부님의 뒤를 이어 보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사부님.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이냐.”
“신선제가 되면 인계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습니까?”
“사손을 보려는 것이냐.”
“네.”
“염왕이 그러더구나. 네가 제자를 끔찍이 아낀다고.”
“사부님께 받았던 은혜를 제자에게 돌려주는 것뿐입니다.”
“그게 사부로서 기쁨인 것이지. 하나 신선제가 인계에 강림하는 건 공간의 왜곡을 불러온다. 되도록이면 인계에 강림하지 않은 게 좋다.”
천극자의 대답에 무극자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제자를 다시 만날 생각에 들떴는데 안 된다고 하니 기분이 내려간 것이다.
“하나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신계에서 인계에 부여한 능력이 있지 않더냐. 신선이나 천족은 자신이 지정한 인간과 소통을 할 수 있다. 그걸 활용해 보거라. 신선제라면 자신이 지정한 인간에게 영혼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무림에서 사손과 소통했던 방법이니라.”
신계로 올라 제자와 소통을 못 할 줄 알았건만.
천극자 사부가 제자와 소통할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무극자는 기쁜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신선계로 가거라. 가서 사부와 마찬가지로 신선제의 자리에 앉아 네 뜻을 펼쳐라.”
“사부님도 같이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 자리는 구천옥의 금지다. 네 일이 끝나면 경아라는 아이와 함께 찾아오거라.”
천극자가 손을 휘젓자 허공에 공간이 나타났다.
신선계로 가는 통로였다.
“사부님. 그동안 강녕하십시오.”
“오냐.”
무극자가 신선계로 갔다.
“이제부터 사손의 역할이 중요해지겠구나.”
천극자는 자신이 기거하던 동굴로 가면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