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제11화.
“혈신! 저들이 구천옥을 탈출하려한다는 게 사실입니까?”
“……”
일 사자의 물음에도 무극자는 멍하니 앞만을 보았다.
그는 주경아를 잡지 못했다.
오해로 인해 빚어진 일이었으나 주경아의 입장에서 무극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였다.
그것도 사랑하던 사람의 손에 아버지가 죽었다.
얼마나 원통할까.
거기다가 아이까지 잉태했으니.
그 원한은 배가 되었을 것이다.
뿐인가.
이곳은 구천옥.
염라대왕이 죄인들을 영원히 소멸시키려고 만든 감옥이었다.
구주나 죄인들이 온전한 정신을 가졌으나 하나.
온전한 이성을 지니지는 못한다.
살육, 분노, 욕망, 시기, 질투와 같은 감정을 극대화 시키는 곳.
구주가 자연경의 경지에 있다지만 이성을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할 터다.
그 예로 무극자만 봐도 안다.
-따라가서 모두를 도륙해라.
-널 무시하는 놈들을 한 놈도 남겨두지 마.
-저 여자를 가지고 싶다면 죽여서라도 네 옆에 두어라.
-아니면 뒤에 있는 저승사자를 죽여.
-지옥에 피를 뿌려 파천혈신의 위엄을 만천하에 떨쳐라.
구천옥의 특성으로 인해 역천이 계속 속삭였다.
무극자도 이럴진대 구주는 오죽할까.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는 걸로 보일뿐.
저들의 감정은 분노와 살육으로 가득하리라.
“혈신!”
일 사자가 무극자를 크게 불렀지만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자들은 죄인들의 뒤를 쫓아라!”
“예!”
저승사자들이 일제히 경공을 펼쳐 죄인들을 쫓으려는 그때였다.
검회색의 아지랑이가 빛나더니.
그들의 발아래를 일자로 갈라버렸다.
“억!”
헉!”
경공을 펼치려던 저승사자들이 기겁했다.
피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다리를 잃었을 것이다.
“파천혈신, 뭐 하는 짓입니까!”
일 사자가 버럭 소리쳤다.
파천혈신이 무서운 건 별개로 그는 사자로서 직무를 다해야 했다.
그가 부여받은 임무는 파천혈신과 구천옥의 죄인을 감시하는 것.
구주가 구천옥을 탈출하는 걸 막아야 했다.
“그 선을 넘지 말거라.”
“파천혈신!”
“경아를 따라가게 할 순 없다.”
무극자는 자신이 멍청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잘 안다.
죄인들이 구천옥을 탈출하면 어떻게 될까.
저들이 새로운 몸을 찾던지.
현재의 몸과 영혼 그대로 인계에 강림하든지.
둘 중 하나만 해도 재앙이었다.
죄인들의 최소 등급은 생사경.
인계의 몬스터보다 훨씬 더 큰 위협이 인간들에게 가해질 테다.
하나 무극자는 주경아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신계에서 그녀를 만나고 처음 받은 부탁.
그게 잘못된 길이라도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순 없었다.
자신은 그녀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였으니까.
“저들은 죄인입니다. 이대로 놓아주면 정말 큰 일이 날지 모릅니다.”
“안다.”
“그러니 저희를 보내주십시오.”
“그럴 순 없다. 부인이 지아비에게 한 부탁이다. 내 체면을 봐서라도 네가 양보해라.”
“염라대왕께서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모든 건 본좌가 감당하겠다.”
무극자는 너무도 담담히 말했다.
슬픔이 덕지덕지 묻어 나오는 음성.
그 속에는 여전히 주경아에 대한 미안함이 가득했다.
“당신 혼자 감당할 무게가 아닙니다. 무려 구주가…헉!”
일 사자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무극자의 몸에서 보이는 파멸적인 패기.
드넓은 구천옥이 무너질 듯 진동했다.
동시에 무극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본좌의 이름이 그리 가볍게 여겨지는가.”
무극자는 저승사자들이 주경아를 쫓아가지 못하게 만들려고 작정하고 기운을 풀었다.
신선계에서 최상위급 신선을 학살할 때도 운용하지 않았던 내공을.
12성 극성으로 운용했다.
이에 역천이 옳다구나 하고 동조하며 나섰다.
-죽여라.
-너를 무시한 놈들을 응징하란 말이다.
-나 역천이 함께하겠다.
-지옥의 왕이 온다면 그조차도 죽일 힘을 네게 주겠다.
역천의 등장에 구천옥에서 가한 금제가 풀리고 말았다.
지옥의 왕인 염라대왕도 구천옥만큼은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이유가.
무극자의 역천에 의해 풀린 것이다.
원래의 경지였던 탈신경 완숙으로 돌아가니.
무극자에게 염라대왕만이 보이는 위압감이 뿜어졌다.
“본좌는 너희에게 부탁하는 게 아니다. 본좌가 모든 걸 감당하겠다면 그리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대신 역천이 그의 몸을 집어삼키려 했다.
힘을 주는 대신 대가를 바라고 있었다.
역천의 속삭임은 더욱 커져만 갔고, 혼원신공은 그만 기를 거두라고 경고를 하였다.
하나 무극자는 여전히 혼원신공을 극성으로 펼쳤다.
아직 주경아의 기가 구천옥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저승사자들을 막을 방법은 이뿐이었다.
저들만이 아니라 염라대왕의 시선도 돌려야 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지옥의 위험을 감지한 건지.
염라대왕이 직접 구천옥에 행차했다.
“뭐 하는 짓인 거냐.”
“내게 사정이 생겼소.”
“또 주경아 때문이겠군.”
“그렇소.”
“후우… 어쩌다 일이 이 지경까지 흘렀는지.”
“날 이해해 주시오.”
“그러고 싶다만 지옥에도 율법이라는 게 있다. 네가 벌인 짓은 지옥의 율법을 완전히 망가트린 일. 본왕은 염왕으로서 널 벌해야 한다.”
“그렇게 하시…오.”
무극자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입 사이로 피가 고였다.
“네 안의 괴물이 미쳐 날뛰는구나. 그 상태로 본왕을 이길 수 있다고 보느냐.”
“길고 짧은 건 대봐야지.”
무극자의 몸에서 검회색의 아지랑이가 줄기차게 흘러나왔다.
염라대왕도 자신의 무기인 인장 망치를 소환했다.
“사자들은 들으라.”
“지옥의 왕이시어 하명하시옵소서.”
“구천옥의 죄인을 모두 잡아들여라. 반항한다면 소멸도 허하겠느니라.”
“명을 받드나이다.”
지옥의 사자들이 움직이자 무극자가 막아서려 했다.
하지만 그의 앞에 염라대왕이 나타났다.
“네가 아무리 강해도 이곳은 본왕의 영역. 지옥에선 본왕을 이기지 못한다.”
염라대왕이 직인인장을 찍었다.
무극자의 사방에 직인인장이 깔리려는 순간!
그의 앞에 백색무의를 입은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의 손이 염라대왕의 직인인장에 닿자.
무적의 방어벽이 와장창 깨졌다.
* * *
정적이 흘렀다.
염라대왕의 직인인장이 너무도 쉽게 깨졌다.
신선계에서 펼쳐졌던 직인인장은 불완전 그 자체.
염라대왕의 힘이 닿지 않은 곳이었다.
여기가 구천옥이긴 하나 염라대왕의 영역.
직인인장이 타인의 손에 쉽게 깨질 무공이 아니었다.
일 사자를 포함한 모든 저승사자.
그리고 염라대왕과 함께 나타난 나찰까지.
모두가 굳어 있었다.
이 모든 게 한 노인 때문이었다.
염라대왕도 노인의 등장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이 함지박만 하게 커진 상태였다.
“넌!?”
“오랜만이네. 염왕.”
“드디어 나왔구나.”
“내 제자가 아파하고 있는데 금지에만 있을 순 없지. 잠깐만 기다리시게.”
노인의 말에 염라대왕이 무기를 거둬들였다.
“염라대왕?”
일 사자가 놀란 얼굴을 했다.
대체 저 노인이 누구길래 염라대왕이 무기를 거둘까.
염라대왕은 일 사자의 궁금증을 곧바로 풀어주었다.
“왕소. 무극자를 만든 장본인이다. 신선계에선… 신선제로 불리었지.”
“신선제!?”
“헉!”
“저분이?”
“파천혈신의 사부가 신선제였다니!”
모두가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신선계의 왕 자리가 공석이었던 건 신선제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소문으로는 마계의 왕과 싸우다가 함께 죽었다거나.
신선계의 암투로 인해 제거됐다 등.
별의별 이상의 소리가 돌았다.
“신선제에 가장 어울리는 자가 금지에 있다고 하셨는데… 저분을 말하는 것이었습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마계의 왕과 싸운 후 신선계로 귀환하지 않고 지옥의 염왕을 만났다.
신선제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팔대지옥의 벌을 받는다는데.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과거의 일로 신선제가 스스로 벌을 받는단다.
사대 신계의 왕은 신계의 율법을 무시할 권한이 있었다.
신선제는 이 권한을 지옥계에 쓴 것.
염라대왕이 새로운 신선제를 뽑자고 의견을 내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전대의 신선제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 차기 신선제를 뽑을까.
그가 보기에 천극자만큼 강한 자는 보지 못했다.
하물며 파천혈신이라도 말이다.
그나마 가장 천극자의 무위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눈 후 천극자는 스스로 구천옥의 금지에 들었다.
금지는 구천옥과 지옥의 경계에 있는 곳이며.
인계로 내려가는 숨겨진 통로이기도 했다.
오직 사대 신계의 왕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신선제께서 지옥에는 왜?”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천극자를 보고 있었다.
천극자는 몸을 돌려 제자인 무극자에게 호통을 쳤다.
“멍청한 놈! 어쩌자고 제어도 안된 괴물을 데리고 구천옥에 든단 말이냐!”
사신후였다.
사마를 제압하는 목소리가 천극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역천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무극자의 정신이 또렸해졌다.
“사… 부님?”
“그래도 이 사부는 알아보는 모양이구나.”
“…사부님께서 지옥에는 어떻게…?”
무극자는 믿기지 않은 얼굴로 천극자를 보았다.
무극자는 신선계에 오르고 주경아만 찾은 게 아니었다.
그의 사부인 천극자도 같이 찾았다.
하나 사부의 소식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마치 증발한 듯.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자신의 사부라면 응당 신선제가 되고도 남았을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사부는 흔적 없었다.
“네 안에 살귀가 산다고 누누이 말했건만.”
천극자는 호통을 친 것과 달리.
무극자의 등을 자상하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토록 날뛰던 역천이 심연 깊은 곳에 갇혀버렸다.
“극아. 제발 이 사부의 말 좀 듣거라. 사부가 죽어서도 평생 널 걱정해야 쓰겠느냐.”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염왕이 사부를 잡아놓고 있었던 겁니까?”
“사부가 누구의 손에 잡혀 있을 위인으로 보이느냐.”
무극자의 오만이 어디서 유전됐는지 명확하게 보였다.
자신의 위에 그 누구도 두지 않은 말투는 사제지간이 똑같았다.
“그건 아니지만.”
“너 못지않게 사부에게도 사정이라는 게 있다. 그러니 더는 묻지 말아다오.”
“예. 사부님.”
공포의 대명사인 파천혈신이 천극자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었다.
파천혈신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단 두 명.
천극자 왕소와 주경아밖에 없었다.
천극자는 신선제라 다른 왕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
그가 움직이지 않으면 강제하지 못했다.
그러니 주경아를 통해 파천혈신을 통제하려 했던 것이다.
“우선 구천옥에서 나가자꾸나.”
“아, 사부님! 경아가 구천옥에 있었습니다.”
“안다.”
천극자는 인계에서 주경아의 존재를 몰랐다.
제자가 사랑했던 여자가 있다는 걸 염라대왕을 통해서 들었다.
무극자가 대륙에서 고려로 연통했을 때는 천극자가 이미 운명을 다했을 때였으니까.
“경아가… 절 많이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 또한 알고 있다.”
천극자가 무극자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야기는 여기서 나간 후에 하자꾸나.”
“경아가 제게 부탁했습니다. 저들을 막아달라고.”
“그건 사부가 해결할 터이니 우선 네 상태부터 생각하거라.”
천극자는 무극자를 다독였다.
그리고는 염라대왕을 향해 말했다.
“염왕. 나찰들을 물리게.”
“지금 나보고 지옥의 율법을 행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냐.”
“잠시 집행을 미뤄달라는 거네.”
“네 부탁이라도 들어줄 수 없다. 이건 지옥의 위신 문제도 있어.”
“천극자가 아닌 신선계의 왕으로서 부탁한다면 어떻겠나.”
“미친놈.”
“지옥의 죄인이 인계로 탈출하는 건 흔히 있는 일 아니겠나.”
“구주는 다르다! 인계로 강림한다면 인간들이 얼마나 죽어 나갈지 불 보듯 뻔하다.”
“극아. 염왕은 죄인들을 놓아줄 생각이 없나 보구나.”
“제가 막겠습니다.”
“네 짝만 살려서 데려오는 건 어떻겠느냐.”
“경아가 처음 하는 부탁입니다.”
“여전히 외골수로구나.”
천극자가 피식 웃었다.
제자는 옛날과 똑같았다.
자신이 한 말은 꼭 지키는 성격.
나이만 먹었지 하는 행동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었다.
“염왕, 내 제자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네.”
“그렇담 형을 집행할 수밖에.”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네. 제자가 다치는 꼴은 볼 수 없으이.”
“율법 행사를 방해하겠다는 것이냐.”
“난 그저 제자를 보호하려는 것뿐이네.”
천극자가 염라대왕을 향해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내 허락 없인 누구도 내 제자를 핍박할 순 없으이. 그게 사대 신계의 왕이라도 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