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부 10화.
당현의 눈이 부릅떠졌다.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니 몸에 선이 잔뜩 그어져 있었다.
“이건… 어떤 무공이… 냐?”
“네게 가르쳐 줄 만큼 본좌의 무공은 하찮지 않다.”
“빌… 어먹….”
당현의 몸이 조각으로 갈라지면서 죽었다.
구주 중 독주의 허무한 죽음.
그의 수하들과 함께 지옥에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다음은 누구, 음….”
무극자가 앞으로 걸어가다가 이내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죽여라.
-살겁을 일으켜라.
-네 운명을 거부하지 마라.
-혈신의 위엄을 왕들에게 보여라.
-죽여!
-살인은 즐거운 일이다.
순간 역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극자의 뒤에 검은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그 그림자는 무지막지한 살의를 보이고 있었다.
‘네가 나올 때가… 아니다.’
그는 역천을 심연 깊은 곳에 잠들게 하려 했으나.
-구천옥에선 네 힘이 나에게 닿지 않는다. 큭큭.
역천은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제힘을 과시했다.
무극자의 몸을 차지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시간이 없어. 빨리 경아를 찾아야 해.’
그는 혼원신공으로 역천을 최대한 잠재웠다.
역천은 쉽사리 심연으로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벌였던 살육으로 인해 힘이 가득한 상태.
역천을 잠재우려면 구천옥을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역천을 간과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혼원신공으로 잠재우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역천의 힘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
그도 모자라 역천의 힘은 더욱 커져만 가고 있었다.
“나와!”
무극자가 일갈을 터트렸다.
구천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자가 파천혈신이오?”
“완전 괴물이 따로 없군.”
“독주가 그리 쉽게 죽을 놈이 아니건만.”
새로 나타난 이들은 하나같이 자연경 완숙에 있었다.
걔 중에는 자연경 끝자락도 존재했다.
“저자를 어떻게 하지?”
“싸워 봤자 우리에게 득 될 게 없소.”
“염라대왕만 좋은 일을 시키는 거지.”
“무시하고 우리 일을 합시다.”
구주의 목표는 구천옥을 탈출하는 일.
그들은 이곳에 있으면서 탈출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했다.
오늘로써 준비는 끝냈으니.
이제 탈출하는 일만 남았다.
한데 방해꾼이 나타났다.
파천혈신이라는 괴물이.
독주를 단숨에 죽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무시한다고 될 일이 아니야. 저놈이 우리 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다면? 염라대왕이 가만히 있겠어? 저놈 뒤에는 저승사자들도 있는 것 같은데.”
구주의 눈에 들어온 삿갓을 쓴 이들.
염라대왕의 최측근인 저승사자였다.
저들이 구천옥에 있다는 건 염라대왕이 구천옥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파천혈신을 막아야 한다는 말이군.”
치렁치렁한 장발을 늘어트린 사내, 혈주가 말했다.
누구 하나 먼저 막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구주 모두가 경쟁 상대.
경쟁자를 위해, 독주를 단숨에 죽인 상대를 막는 역할을 누가 하려 하겠나.
구천옥만 나가면 황제 부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터.
타인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생각 따위는 없었다.
“이러다 탈출도 못 하겠다.”
“애들을 던져 주고 도망칠까?”
“그게 가당키나 하는 말인가?”
“그러면 뾰족한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난 남을 생각 없!”
“온다!”
구주는 말을 하다 말고 뒤로 몸을 빼야만 했다.
파천혈신은 구주 전체를 상대하려는 듯.
다짜고짜 살수를 펼쳤다.
그들이 서 있던 대지가 갈렸다.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면 몸이 반으로 쪼개졌을 것이다.
“너희들에게 물을 게 있다. 주경아 라는 여자가 어딨는지 아는 사람이 있나. 알고 있다면 본좌에게 말하라. 그녀가 어딨는지 알려 준다면 그놈만은 살려 주마.”
구주를 아래로 보고 하는 말에 혈주가 발끈했다.
“오만방자한 놈 아닌가!”
혈주는 발끈은 했지만 싸우려 하지는 않았다.
그는 약삭빠른 인간.
괜히 괴물과 싸워서 경쟁자들에게 시간을 벌어 주긴 싫었다.
“차라리 우리가 힘을 합쳐 저놈을 빠르게 처리하고 구천옥을 빠져나가는 게 어떻겠소?”
모두가 서로 눈치를 봤다.
신뢰가 전혀 없는 눈빛들.
현재는 동맹이었지만 언제든 쉽게 깨질 수 있는 아주 얇은 관계였다.
“또 온다!”
“이러다 탈출도 못 하겠소.”
“어서 선택해.”
“에이씨! 난 찬성.”
“나도.”
구주는 수하들을 던져 주면서 시간을 끌고 있었다.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각자의 무공을 꺼냈다.
비록 구주 중 두 명이 모자라나.
저 한 명을 어쩌지 못할까.
일곱 명의 절대자가 무극자를 향해 쇄도했다.
* * *
칠 인의 절대자는 호기롭게 무극자에게 덤볐다.
각자 최고의 무공을 사용했다.
상대는 독주를 죽인 자.
그걸 떠나서 구천옥을 빠져나가려면 이 장애물을 치워야 했다.
염라대왕이 눈치채기 전에 무극자를 처리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컥!”
구주 중 신주가 쇄도했던 속도보다 배는 되어 보이는 속도로 바닥에 처박히는 게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헉!”
의주의 손에서 암기가 날아가려는 찰나.
그보다 더 빠른 무형기가 의주의 손목을 훑고 지나가려 했다.
기에 굉장히 민감한 그였기에 손을 재빨리 거둘 수 있었다.
의주가 아니었다면 손목이 절단 나고도 남았을 터다.
“네가 여기서 제일 약하군.”
손을 거둔 의주의 귀로 무극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얼굴을 뒤덮은 무극자의 손바닥.
그는 그대로 바닥으로 패대기쳐졌다.
쾅-
의주의 몸이 바닥에 파묻혔다.
그의 입에서는 피거품이 흘러나왔다.
무극자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이래도 주경아가 어디에 있는지 말하지 않을 생각인가.”
순식간에 구주 중 두 명을 제압해 버린 무극자.
나머지 구주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특히 구주에서 3강에 속한 검주와 혈주는 현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염라대왕이 특급 관리 대상으로 분류한 이유가 있었구나!”
“검주. 차라리 저놈에게 그녀에 대해 말해 주는 게 어때?”
“그녀에 대해?”
“주경아만 찾고 있잖아.”
“그렇긴 하지만.”
검주는 주경아에 대해 말하기가 꺼려졌다.
그녀의 정체는 마주.
구천의 주인 중에서도 첫 번째 손가락에 들 정도로 강했다.
여자의 몸으로 이 지옥 같은 곳을 견딘 유일한 인간.
그녀의 독기는 구주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검주가 고민하는 사이.
“아악!”
파천혈신에 의해 권주의 팔이 옆으로 꺾였다.
팔뿐인가.
파천혈신은 권주의 허벅지를 지그시 밟으며 구주에게 공포를 선사하고 있었다.
“우리가 저놈을 너무 얕봤어. 그녀에 대해 말할지 어서 정해!”
혈주는 떨리는 눈동자로 파천혈신을 봤다.
이토록 처참하게 무너진 일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무공으로도 상대를 막지 못했다.
아니, 막는 건 둘째치고 처참하게 부서졌다.
그 결과 권주와 같이 뼈가 으스러져 신음하는 게 아닌가.
구주가 이만큼 깨진 건 구천옥의 금지에 사는 노괴 이후 처음이었다.
가공할 만한 무력.
압도적인 기세.
구주 전체를 상대하고도 남을 만한 강력한 내공.
파천혈신은 구주에게 공포를 남기고 있었다.
검주가 결단을 내렸다.
“그녀에 대해 알려…”
“그럴 필요 없어.”
검주의 말을 가로막은 고운 음성이 들렸다.
검주가 고개를 돌리자 지옥의 선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주.”
“내가 해결할 수 있어. 단, 조건이 있어.”
“조건?”
“너희는 앞으로 내 지시를 따르도록 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혈주가 버럭 소리쳤다.
그도 구주 중 3강에 속한 자.
마주가 제일 강하다고 하나, 같은 3강에 속한 그녀였다.
서열이 비슷하다고 여긴 혈주는 그녀의 제안을 완강히 거부했다.
“그렇다면 너희는 이곳에서 죽을 거야. 저 사람은 너희들을 살려 줄 생각이 없을 테니.”
세 사람이 말하는 사이.
도주가 쓰러졌다.
도주는 자신이 펼친 무형도에 가슴이 갈렸다.
구천옥의 일곱 주인이 덤볐는데 상대가 쓰러지기는커녕.
되레 상대는 자신들을 쓰러트리고 있었다.
“고민이 좀 사라질 말을 해 줄까?”
“뭐냐.”
“이 급한 상황에서?”
“너희의 선택을 앞당길 말이야.”
“말해 봐.”
검주의 대답에 주경아가 미소를 지었다.
“저 사람 금지에 있는 분의 제자야.”
“정말이냐!”
“거짓말!”
검주와 혈주가 동시에 놀랐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무공도 비슷하지 않아?”
“그, 그러고 보니….”
“어째서 그 노괴가 생각하지 않았던 거지?”
주경아가 말하자 두 주인의 머릿속에 노괴가 떠올랐다.
그제야 노괴와 파천혈신이 판박이라는 걸 깨달았다.
“넌… 이 사실을 어떻게 안 거냐.”
“내가 저 사람을 아니까. 그분의 제자니 너희를 죽일 수 있는 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지.”
“빌어먹을!”
“드디어 구천옥에서 벗어난다 생각했는데.”
검주와 혈주는 낭패가 가득한 얼굴을 했다.
이 지옥 같은 공간에서 억겁의 세월을 보냈다.
이제 드디어 여길 벗어난다는 기대를 품었건만.
쌩뚱 맞은 놈이 나타나 방해하고 있었다.
“이제 너희 차례야. 내 제안을 받을래 말래. 난 너희를 살려 줄 능력이 있어.”
그녀의 제안은 굉장히 달콤했다.
구천옥에서 살아남아 밖으로만 갈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못팔까.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목숨보다 귀하지는 않았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혈주는?”
“나도다. 대신 나를 확실하게 지켜 줘라.”
“문제없어.”
그녀가 두 사람을 가로질러 앞에 섰다.
그러자 쇄도해 오는 무극자의 눈이 커지더니 급하게 경공을 멈춰 세웠다.
“경…아?”
무극자는 정말 오랜만에 경아란 이름을 불러 보았다.
* * *
“가가. 오랜만이에요.”
그녀의 말에 검주와 혈주의 입이 떡 벌어졌다.
“가, 가가?”
“마주의 지아비!?”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마주의 정체가 심상치 않더니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듣게 됐다.
마주는 엄청난 이들을 등에 업고 있는 게 아닌가.
[어쩐지 금지의 노괴가 마주만은 항상 봐주는 게 이상했어.]
[다 이유가 있었군.]
혈주와 검주는 그간에 있었던 일이 모두 이해가 됐다.
마주가 선을 넘는 일이 제법 있었으나.
그녀는 전대의 구주처럼 죽지 않았다.
그 이유가 지금 드러난 것이다.
“…경아…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무극자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토록 오만하던 자가 아내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졌다.
“저야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지냈죠. 가가는 잘 지내신 모양이어요.”
주경아가 뾰족하게 말했다.
“내가 너무 늦게 왔어. 이제 나와….”
“멈추세요.”
무극자가 다가가려 했지만 그녀가 소리쳐 막았다.
“전 가가를 용서하지 않았어요.”
“경아. 그 일은!”
“변명하지 마세요! 당신이 제 아버지를 죽인 건 변하지 않아요.”
그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가 말한 게 사실이라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녀를 위해 무림맹은 개미새끼 한 마리 남기지 않고 모두 도륙한 일.
그들의 구족까지 찾아서 죽인 일.
그녀의 고향인 신교가 변절자로 인해 몰락하려던 걸 직접 막은 일.
그녀에 관한 일이라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서서 해결했으나.
그녀는 이러한 사실을 모른다.
그녀를 위해 평생을 살았지만 이미 그녀가 죽은 후였다.
뒤늦게 후회하면 뭐 하나.
소중한 사람이 곁에 없는데.
널 위해 평생을 살았다고 알아달라고 할 순 없었다.
자신은 그녀의 낳아준 아버지를 죽인 원수였으니까.
“전 영원히 가가를 용서할 수 없어요. 당신 때문에 아버지와 제 아이를 잃게 된 거예요!”
모든 게 오해로 생긴 일.
아둔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무림맹주의 이야기만을 덥석 믿고 행동한 대가였다.
조금이라도 의심했다면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터.
평생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경아….”
“가가를 만나면 제 손으로 죽이려 했지만 그렇지 않기로 했어요. 영원히 고통 속에서 사세요.”
주경아가 차가운 태도를 보이며 몸을 돌리자 무극자가 손을 뻗었다.
“제게 조금이라도 다가온다면 여기서 죽어버릴 거예요.”
“그건 안돼!”
무극자가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신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주경아였다.
한데 또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할 순 없었다.
“아, 제게 미안한 감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저들이 오지 못하게 막으세요.”
그 말을 남긴 주경아가 경공을 펼쳐 사라졌다.
그녀를 따르는 수많은 이들.
검주와 혈주도 뒤늦게 경공을 펼쳤다.
혼자 남은 무극자의 곁으로 일 사자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