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부 2화.
뇌문의 여신선 말에 무극자가 고개를 저었다.
“본좌의 제자를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냐. 그래도 나 설극의 애제자를 말이다.”
무극자가 나긋이 말하자.
뇌문의 여신선이 흠칫했다.
무극자에게서 자연스레 보이는 기운.
파천멸기였다.
그가 권역을 펼치지 않았는데도 파천멸기는 알아서 주위를 압박했다.
저 경지가 바로 신선들조차 두려워한 경지.
탈신경이었다.
오직 신계의 왕만이 넘볼 수 있는 경지였다.
무극자는 인간의 육신을 가졌으면서.
천살성을 타고나지 못한 역천마신지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탈신경의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이다.
고위 신선들조차도 그를 제어하지 못한 이유기도 했다.
‘저 얼굴로 볼 때는 죽기 전에 탈신경에 오른 거야.’
뇌문의 여신선.
인계에선 뇌후라 불렸던 연아린은 확신했다.
그는 자신의 제자를 통해 본인의 의지로 육체와 영혼을 소멸시켰다는 것을.
무엇보다 인계의 영혼이 없어지는 건 완전한 소멸이 아니었다.
사람은 죽으면 신계에 든다.
동양은 우화등선하면 선계에.
죄를 지어서 죽으면 지옥계에.
서양은 천계와 마계로 그 뜻은 비슷했다.
여기서 완전한 소멸은 신계에 들어서 죽어야지만 이루어진다.
인계에서 소멸됐다고 해도 무극자가 신계에 오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옛날부터 알고 있었지만 정말 무서운 분이시구나.’
이 얼마나 두렵고도 멋진 말인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면 그 누구도 본인을 죽일 수 없다는 말.
너무도 광오했다.
파천혈신과 굉장히 잘 어울리기도 했다.
아니, 그를 두고 지어진 말과도 같았다.
“제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마음대로 생각하려무나.”
무극자는 뒷짐을 쥔 채 몸을 돌렸다.
그리고 관리국 신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까 물었던 본좌의 질문에 대답은?”
“히끅!”
관리국 신선이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상대는 파천혈신이었다.
고위급 신선인 뇌문의 여신선이 직접 마중 나올 정도의 인간.
그런 사람이 제게 질문을 했다.
“히끅!”
“덜떨어진 놈에게 물어본 본좌의 잘못인가? 쯧.”
관리국 신선은 두려움에 딸꾹질만 할 뿐.
대답할 상태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말코 놈들에게 꼭 알아내야겠어.”
무극자가 말한 말코 놈들이란 뇌후와 같이 최고위의 신선들을 통칭했다.
신선계의 신선을 상대로 막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
오직 무극자만이 가능한 말이었다.
그가 신선경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
신선들이 넋을 잃고 멍하니 있었다.
파천혈신을 겪어 본 자들의 특징.
모두가 하나같이 망연자실했다.
인간과 신의 무력을 아득히 뛰어넘은 존재가 있다는 걸 상상이라도 했겠나.
그의 기운에 사로잡히고 나면 남는 감정이라고는 단 하나.
두려움밖에 없었다.
괜히 인계나 신선계가 파천혈신을 절망이라 여길까.
그를 마주 대하면 후유증이 오래가는 이유였다.
“그래도 영혼이 소멸된 신선은 없어서 다행이에요.”
뇌후마저도 이 상황을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최상위 신선이 파천혈신을 인정하자.
하위 신선들의 뇌리에 파천혈신이란 단어가 똑똑히 새겨졌다.
“모두 정신 차리고 다시 일 보세요.”
그녀는 신선들을 뒤로하고 무극자가 걸어간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 * *
신선경 중심.
호수 위에 핀 연꽃에 최상위 신선들이 앉아 있었다.
쿵.
호수의 물이 출렁였다.
이 물은 인계의 천중수보다 100배는 더 무거웠다.
그런 물이 떨리는 것도 아니고 출렁인 것이다.
“그가 왔소.”
“허, 신선계에서 눈을 뜰 줄이야.”
“그자는 응당 지옥계로 가야 할 악인이 아니오!”
“맞소이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온단 말이외까!”
신선들이 버럭 소리를 쳤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신선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가 파천혈신, 무극자에게 원한이 있는 자들.
그가 신선계에 드는 걸 원치 않아 했다.
“크흠.”
“이거야 원.”
“나는 모르겠소이다.”
“윗선에서 알아서 하겠지.”
무극자를 극도로 두려워했던 신선들은 의견을 내는 걸 회피했다.
괜히 여기서 나섰다가 그에게 어떤 화를 입을지 모르는 일.
최대한 발을 빼는 게 가장 좋았다.
“이 작자들이! 그러고도 당신들이 신선이라 할 수 있소?”
“뭐야!? 우릴 지금 모독하는 거냐, 공동선!”
“지금 나한테 반말을 한 거요?”
“네가 먼저 나를 모독하지 않았느냐!”
“곤륜선, 신선으로서 체통을 지키시오!”
“체애애통? 지금 체통을 들먹인 것이냐?”
곤륜선이 기세를 드러내자 공동선 또한 지지 않고 받아쳤다.
이에 뜻을 같이하는 이들끼리 모여 부딪치기 시작했다.
한쪽은 파천혈신을 신선계에 들일 수 없다.
한쪽은 우리가 판단할 게 아니다 였다.
두 곳의 기운이 부딪치자.
호수에 잔잔한 물결이 일렁였다.
“하아아.”
그때 한 신선이 한숨을 내쉬었다.
파천혈신이란 이름만 나오면 반복되는 상황.
지겨웠다.
이런다고 바뀔 게 없는데 말이다.
“그만들 하게. 당신들이 이러니 소림선이 뱃사공이나 하는 게 아닌가.”
남자 신선의 만류에도 신선들은 기세를 갈무리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신선계의 왕, 신선제라도 있다면 이들을 통제할 법도 하나.
현재 신선계의 왕은 공석 상태.
신선들의 싸움을 중재할 이가 없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쿠웅!
호수의 물이 심하게 출렁였다.
천중수보다 100배나 무거운 호수 물이 파도쳤다.
이곳에 모인 신선들의 기세에도 일렁이기만 할 뿐이던 물이 크게 출렁인 것.
이를 본 개방선이 일갈을 터트렸다.
“그마아아안!”
개방선의 사자후에 잠시 소강상태가 됐다.
“호수 물을 보게.”
그가 손가락으로 호수를 가리켰다.
연꽃 위에 있는 신선들.
그들 주변의 물은 그저 잔잔하게 물결이 일었지만.
다른 곳은 물이 파도를 치고 있었다.
“저, 저…!”
“그럴 리가… 없는데…”
신선들이 크게 동요했다.
호수의 물이 이렇게 출렁이는 건 처음 보았으니까.
“그는… 더 강해져 왔네.”
“음.”
신선들이 낮은 신음을 흘렀다.
서로 싸울 때가 아니었다.
“그가 이곳으로 오고 있어.”
파천혈신이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오는 이유는 단 하나.
주경아에 대해서 물어보려는 것뿐이었다.
“아무래도 2차 신계혈겁이 일어날 수도 있겠구먼.”
파천혈신의 성격은 잔학무도했다.
여기에 주경아란 이름이 낀다면?
잔학무도를 떠나서 그 어떤 악신보다 공포스러워진다.
설극이 파천혈신으로 살아가게 된 것도 모두 주경아 때문이었으니까.
“이를 어찌하면 좋을지….”
개방선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주경아 때문에 1차 신계혈겁이 일어났다.
한데 또다시 재앙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두 기억하게. 이제는 그를 인계로 돌려보내지 못한다는 것을.”
옛날에는 그의 육체라도 인계에 남아 있었으나.
이제는 그 육체조차 없었다.
영혼 가루까지 저승에서 회수해 간 상태에서 신선계에 발을 들인 상황.
그를 신선계에서 쫓아낼 방법 따윈 없었다.
혈겁을 막으려면 오직 힘으로 제압하는 방법뿐이다.
개방선의 말이 끝나자.
무극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개를 뚫고 오는 그가 신선들의 눈에 들어왔다.
“보, 보셨소?”
“더 젊어졌소이다!”
“어째서 저자는 계속 강해진단 말이오!”
“허, 허허….”
신선들은 자기의 경지가 부질없음을 느꼈다.
선경 끝자락에 들면 뭐 하나.
이제 막 신선계에 발을 들인 자가 더 강해 보이니.
허무하고 허탈했다.
최상위급 신선들이 경악하는 사이.
무극자가 신선경 호수에 도달했다.
“오랜만에 보는군.”
그가 웃었다.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얼굴.
신선들은 소름이 끼치는 걸 느껴야만 했다.
‘천살성을 타고나지 않았는데 어찌 이런 살기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위, 위험해. 절대 신선계에 들일 수 없는 존재다.’
‘신선계의 호위 사자들을 소환해서라도 저자를 내보내야 해.’
‘역시 파천혈신…. 내가 상대할 수 있는 괴물이 아니다.’
‘바짝 엎드리는 것만이 지금의 자리를 보존하는 방법이야.’
신선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지독한 살기에 잔뜩 긴장한 이들.
무극자가 뒷짐을 쥔 채 앞으로 걸었다.
그가 호수로 들어섰다.
수면 위에 뜬 발.
마치 평지를 걷듯이 호수를 가로질렀다.
그때 동안 신선들은 아무런 제지를 하지 못했다.
그가 향하는 곳이 어딘지 알게 되자.
뒤늦게 제지하려 했다.
“당장 멈…!?”
“…헉….”
무극자가 그들의 옆을 지나가자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멀리서 느껴졌던 기운은 일부분이었을 뿐.
지근거리에서 그를 마주하자 옛 생각이 떠올랐다.
개 패듯 맞았던 기억이.
결국 아무도 그를 막아서지 못했다.
그 결과 그가 연꽃 위에 앉게 됐다.
“저 미친….”
“감히 신선제의 자리에!”
“말세야 말세.”
무극자가 앉은 자리는 바로 신선들의 왕.
신선제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가 신선계에 올라오자마자 처음 한 짓이 바로 신선제의 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그보다 더 가관인 건.
“주경아에 대해서 말하라. 이번에도 말하지 않으면 싸그리 죽여주마.”
그가 신선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만한 시선으로 수하를 대하는 듯.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 * *
지옥계 염라전.
파천혈신 설극이 신선계에 들었다는 보고가 전해졌다.
“설극이 더 강해졌어?”
“예. 대왕.”
“얼마나?”
“보고에 의하면….”
“한 치도 보태지 말고 말하라.”
“탈신경에 든 것 같다고 합니다.”
“탈신경! 미쳤군.”
염라대왕이 진저리를 쳤다.
인간이 자연경을 넘은 것도 전무후무한 일인데 그 위인 탈신경이라니.
억만 겁을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라 염라 또한 당황스러웠다.
“신선계에서 어찌 나올까요?”
“어쩌긴. 혈겁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알고 있는 사실을 다 토해낼 수밖에.”
“염라께서 그를 다시 인간계로 돌려보내는 것은….”
쾅!
염라대왕이 커다란 책상을 주먹으로 쳤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말이냐! 지옥의 관리자씩이나 되는 놈이 명부를 고치라니! 네놈이 단단히 미쳤구나!”
“그게 아니오라.”
“네 말은 죽은 자의 몸에 환생시키자는 말 아니냐.”
“서로 상부상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본왕이 너와 같은 생각을 안 해 본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그에게 주경아에 대한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걸 들키는 순간 신계혈겁? 그보다 더 큰 재앙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환생을 시켜도 형편없는 몸으로 보내야지요.”
“허. 이놈이 지옥을 말아먹으려고 작정했구나. 그러면 설극은 추측하던 생각을 확신으로 바꿀 것이다.”
1차 신계혈겁에서의 의구심을 확신하는 순간.
그는 가진 능력을 총동원해서 어떻게든 주경아를 찾으려 할 터다.
지금은 주경아를 보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했으나.
그가 살겠다는 의지를 가짐과 동시에 복수심을 불태우면….
“신선계의 혈겁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야. 어쩌면 신계 전체가 그에게 무너질 수도 있어.”
“그가 그 정도입니까?”
“넌 탈신경이 만만해 보이느냐.”
“아, 아닙니다.”
염라대왕도 탈신경에 있으니.
탈신경을 만만하게 여기는 건 염라대왕을 만만하게 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환생은 최악의 방법이다. 절대 사용해선 안 돼. 차라리 그에게 사실대로 말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염라대왕은 사대 신계에서도 불같은 성정을 지닌 신으로 유명했다.
신들 앞에서도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않았다.
그런 성격을 가진 염라대왕도 설극은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신선계에 가서 전해라. 사실대로 말하라고. 아니, 본왕이 직접 말해야겠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들으면 분노를 터트리겠지만 거짓보단 나을 것이다.”
원래라면 지옥계에 든 이들의 정보는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다.
이는 신계에 든 자들에게도 마찬가지.
혹여나 발생할 불상사를 막기 위해 모든 정보를 틀어막는데.
이번 건은 예외였다.
왜냐면 그 대상이 주경아였고 그녀를 찾는 사람이 파천혈신이었으니까.
“가라. 그에게 내가 전할 말이 있다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