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부 1화.
무극자가 눈을 떴다.
전에 와 봤던 곳.
“신선계인가.”
신선계였다.
우화등선해야만 갈 수 있는 사후세계.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푸르른 산과 강이 길쭉하게 뻗어 있었고 곳곳에는 복숭아 꽃이 만발한 모습.
“지옥계로 떨어질 줄 알았건만.”
무극자는 뒷짐을 쥔 채 낙원의 입구에서 무언가를 기다렸다.
그때 저 멀리서 강을 가로지르는 나룻배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룻배 위에 있는 뱃사공이 무극자 앞에 섰다.
“이름.”
“또 보는군.”
“이름!”
“설극.”
뱃사공이 나무로 된 신분 패를 보더니 중얼거렸다.
“요즘은 설극이라는 이름이 대세인가? 그자와 같은 이름을 쓰는 인간이 왜 이렇게 많은지. 나도 이제 뱃사공을 그만둘 때가 왔어.”
홀로 중얼거리던 뱃사공이 설극을 보며 말했다.
“타라.”
“입이 짧군.”
예전의 무극자였다면 일단 반쯤 죽여 놨을 터.
두 번째로 올라온 신선계였다.
기쁜 마음에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난 그 어떤 신선에게도 존댓말을 하지 않는다. 오직 신선제께만 할 뿐이다.”
신선제는 신선계의 왕.
모든 신선 위에 존재하는 자였다.
인간 세상에 사용됐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면 곧 본좌를 극진히 모시겠군.”
“별 미친놈을 보았나. 네깟 놈이 감히 신선제를 모욕한단 말이냐!”
“본좌가 농담으로 하는 말 같나.”
뱃사공은 무극자와 눈을 마주하자 덜컥 겁부터 났다.
상대는 이제 막 신선계로 올라온 인간.
하위 신선도 아닌, 신선 후보자였다.
억만 겁을 산 자신이 인간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설극이란 이름에서 온 감정일 것이다. 내가 겁을 집어먹을 리가 없다.’
뱃사공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두려움이란 감정을 떨치기 위해서 몸을 돌리려는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
뱃사공은 은근슬쩍 무극자의 얼굴을 보았다.
반로환동한 모습으로 온 걸 보니.
인계에서 한따까리 한 인간 같았다.
신선계에 들어올 때 얼마나 젊냐에 따라서 등급이 분류됐다.
물론 젊은 얼굴을 지녔다 해서 전부 다 강한 건 아니다.
인간계에 있었던 전성기 기준으로 신선계에 오르는 것.
한때 신선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파천혈신조차 40대 중년인의 얼굴을 하고 올라왔다.
그러니 젊다고 바로 고위 신선으로 올라간다는 보장은 없었다.
무극자는 뱃사공이 힐끗 쳐다보는 걸 느꼈는지.
속으로 웃었다.
‘너무 젊어져서 날 못 알아보는군.’
얼굴엔 잡티 한 점 없었다.
지금은 백발도 아닌 흑발.
처음 강호에 출두할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파천혈신으로 우화등선할 때와는 굉장히 많이 달라 있었다.
그러니 저 뱃사공이 자신을 모르는 걸 테지.
배는 강을 가로질렀다.
한참을 타고 오니 안개가 짙게 깔렸다.
어떤 큰 산 아래에 도착하자 뱃사공이 말했다.
“내려라, 신선경에 도착했다.”
무극자가 배에서 내렸다.
안개로 가려진 산의 입구.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진정한 신선계가 보일 것이다.
무극자가 몸을 돌렸다.
“하나만 묻지.”
“뭐냐.”
“여기에 주경아란 신선이 있나?”
“주경아?”
뱃사공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신선이 있었던가?”
“없나?”
“처음 들어보는데 혹시 모르니 신선 관리국으로 가 봐.”
“신선 관리국?”
“입구에 가면 출입부 기록하는 신선들이 있을 거야. 걔네한테 물어보면 될 거다.”
무극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선경으로 향했다.
뱃사공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에 쓰고 있던 삿갓을 벗으며 혼잣말을 했다.
“하대가 자연스러워. 인간계에서 좀 하는 무인일지라도 내 앞에서는 기가 죽기 마련이건만.”
민머리의 뱃사공.
달마 이래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았던 이들 중 한 명이었던 광승 법진.
뱃사공이 신선계에 들기 전 인계의 신분이었다.
무극자보다 한 세대 앞선.
천극자의 시대에 살았던 이였다.
뱃사공을 자처해서 하고 있으나 신선계에선 신선제 빼고 그에게 말을 놓을 수 있는 신선들은 단연코 없었다.
신선계의 2인자가 바로 뱃사공이었으니까.
* * *
신선경 출입문.
“화산 적엽. 죽기 전 경지는 화경. 화산제일검이라 불렸고, 마인들을 죽인 숫자만 2천 명?”
관리부 소속 신선이 뒷짐을 쥔 채 눈을 감고 있는 도인을 보았다.
한껏 자신감에 찬 표정.
마인은 무려 2천 명이나 죽이고 우화등선했으니.
당연히 신선경에 들어가겠단 확신에 찬 얼굴이었다.
하나.
“불합격!”
관리부 신선의 외침에 눈을 감고 있던 도인이 눈을 부릅떴다.
“그 어떤 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데 어찌 내가 불합격이란 말이오! 말도 안 되오!”
관리부 신선은 이런 일을 많이 겪어 봤는지.
준비된 말을 날렸다.
“신선경에 들어갈 수 있는 인간은 최소 현경. 마인을 5천 명 이상을 죽이거나 엄청난 선업을 쌓아야 한다. 그도 아니면 이 규칙을 깰 만큼 강하든지. 다음.”
화산의 적엽은 망연자실했다.
당대의 화산제일검에 마인을 2천 명이나 죽였다.
그토록 원하던 신선계에 올랐는데 신선 후보에서 탈락하다니.
허탈할 지경이었다.
그때 한 젊은 남자가 관리부 신선에게 명패를 던졌다.
이런 일 또한 빈번히 일어났던 일.
“하, 또 어떤 빌어먹을 잡놈이 폼을 잡는 걸까.”
관리부 신선이 책상에 떨어진 명패를 집어 들어 읽었다.
“무극자 설…극?”
그가 무극자와 명패를 번갈아 봤다.
신선계에서 설극이란 이름의 무게는 굉장히 무거웠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가 그 설극이란 이름을 쓰니.
관리부 신선으로서 굉장히 민감했다.
“여기에 주경아란 신선이 있나.”
심지어 다짜고짜 다른 신선을 찾고 있는 게 아닌가.
“오늘 일진 더럽네. 내가 빨리 승진을 하든지 해야지 원.”
“이하동문이군. 본좌가 기분 좋으니 한 번은 봐주겠다. 주경아란 이름을 가진 신선의 정보를 내놔라.”
드디어 육체와 영혼이 소멸되어 신선계에 올라왔다.
이곳에서 깽판을 친다고 다시 살려서 인계로 내려보낼 수는 없을 터.
이젠 이곳이 자신이 살아가게 될 집이었다.
그러는 김에 그토록 보고 싶었던 경아를 찾는 것이고.
관리부 신선의 버릇없는 행동은 충분히 눈감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무극자의 오만한 태도에 관리부 신선이 버럭 소리쳤다.
“이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를 부린단 말이냐!”
신선경 입구가 소란스러워지자.
위병의 위치에 있는 신선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위 신선의 경우 최소 현경 끝자락.
신선의 경지로 따지면 선경 초입이었다.
중위 신선이 선경 완숙.
고위 신선이 선경 끝자락으로 분류됐다.
모여든 이들은 선경 초입에 있는 자들이었다.
“여긴 여전히 동태 눈깔을 가지고 있는 놈들뿐이군. 아서라. 너희를 골로 보내면 윗대가리들이 지랄할 테니, 이번만 눈감아 줄 터이니 물러나라.”
여전히 오만한 태도를 취하는 무극자로 인해 관리부 신선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
“뭣들 하는 게요. 신선경의 위엄을 살리시오!”
관리부 신선의 외침에 위병 신선들이 무극자에게 뛰어들었다.
그 수만 열 명.
무극자에게 달려든 선경 초입의 신선들의 숫자였다.
난다 긴다 하는 고수는 5초 안에 찜쪄먹을 무력을 가진 이들.
오만한 태도를 가진 설극이란 자도 금방 제압당할 거라고 생각한 관리부 신선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신선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인간.
그의 성격상 굉장히 많이 참고 있는 중이었다.
“본좌의 얼굴이 변했다지만 이렇게 멍청한 놈들이 신선이라. 쯧쯧.”
무극자가 혀를 찼다.
그리고 회안을 번뜩였다.
신선경 입구가 삽시간에 회색 안개로 물들었다.
무극자의 권역.
이준과 싸울 때도 사용하지 않았던 파천멸진이었다.
파천멸기로 상대를 압박하는 기술의 최상위 호환.
기공이면서도 1인 진법이기도 했다.
이 권역 안에 발을 들인다면 무극자의 손에 의해 반드시 죽게 되는 진이었다.
“억!”
“끄으으윽!”
“무, 무슨….”
무극자에게 달려가던 위병 신선들이 일제히 바닥으로 처박혔다.
마치 중력이 그들을 누르는 듯.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들도 한때는 인계에서 잘나갔던 신선들.
현경 끝자락을 밟아 우화등선한 이들이었다.
이제 갓 신선경에 오른 인간에게 이리 밀릴 일은 없을 터인데.
그런 생각을 할 때.
“풉!”
“쿨럭쿨럭!”
그들이 피를 한 사발 토해 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신선경 입구가 무너질 듯 진동하는 게 아닌가.
이곳은 그 어떤 기운을 뿜어낸다 하더라도 꿈쩍도 하지 않는 장소였다.
한데 신선도 아닌 이제 갓 죽어서 올라온 인간이 어찌 이런 힘을 낼 수 있는지.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관리부 신선은 무극자의 눈을 보고 말았다.
인계의 공포, 절망, 파멸로 몰아넣었던 회안.
고위 신선들도 통제가 안 되어 다시 인계로 돌려보낸 최초의 인간을 마주하고 있었다.
‘비, 비상이다!’
관리부 신선은 이런 눈을 딱 한 번 마주한 적이 있었다.
바로 파천혈신.
신선계를 초토화시켜 버린 인간.
그와는 생김새가 비슷하면서도 다르나.
딱 하나!
머릿속에 경종을 울리는 위험한 느낌은 똑 닮아 있었다.
전혀 움직이는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려고 발버둥 치려는 그때였다.
“그만하세요.”
맑고 청명한 여자의 목소리가 모두의 귀에 들려왔다.
* * *
“연아린?”
무겁던 공기가 순식간에 풀렸다.
“으윽….”
“큽!”
쓰러진 위병 신선은 몸을 가누지 못해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관리부 신선 또한 마찬가지.
허나 여자의 등장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인사를 했다.
“뇌문의 여신선을 뵙… 으음 습니다….”
여자가 인계에 있을 때 소속이던 곳이다.
신선계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인계의 별호를 부르든지 아니면 소속 가문을 앞에 붙여 신선이라 했다.
그녀의 등장에 이곳에 있는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상위 신선에 속해 있으니까.
입구나 지키는 하위 신선과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손 하나 까딱하면 여기에 있는 모두를 죽일 수 있는 신선이 그녀이기도 했다.
“무극자 어르신을 뵈어요.”
지고한 위치에 있는 여신선이 예의를 최대한 갖추어 무극자에게 인사를 했다.
“어린 꼬마가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됐구나.”
“어르신이 신선계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도 봤어요. 그때는 어르신께서 눈이 뒤집혀 절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랬나?”
무극자가 민망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옛날보다 더 강해지신 것 같아요.”
“그래 보이느냐.”
“제자한테는 일부러 져 주셨지요?”
“그럴 리가.”
“파천혈신의 이명을 신선계에서 괜히 두려워하는 게 아니에요. 햇병아리가 죽일 수 있을 만한 무게가 아니잖아요.”
파천혈신이란 단어가 나오자 모두가 흠칫했다.
특히 관리부 신선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파, 파천혈신!?”
이름만 똑같을 뿐 전혀 다른 사람이라 생각했다.
설극이란 동명이인들이 신선계로 올라온 일은 적지 않았으니까.
한데 진짜 파천혈신이었다.
관리부 신선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고위 신선들조차 무서워하고 경계를 한 인간에게 호통을 친 게 바로 본인.
이번 일은 두고두고 비웃음을 살 것이다.
어쩌면 평생 얼굴을 들지 못할 터다.
파천혈신에게 신선계의 위엄을 살리라고 위병 신선들에게 명을 했으니.
동기 신선들이 들으면 얼마나 배를 붙잡고 웃을까.
신선 인생 제대로 꼬였다고 박장대소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