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7화
한민성이 열심히 입을 털고 있을 때였다.
그들의 사이로 한 남자가 유령처럼 지나쳤다.
남자가 안 보이는 듯.
한민성과 해외 가주들은 그를 인지하지 못했다.
남자가 석상 앞에 섰다.
“이 흉물스러운 건 뭐야?”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는 이마를 찌푸린 채 석상을 올려다보았다.
파천자와 파천혈신이 서로 주먹을 뻗고 있는 장면을 본떠 만든 듯했다.
“사부는 이렇게 잘생기지 않았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첫 번째.
파천자와 파천혈신의 싸움은 자랑이 아니었다.
파천자에게는 마음 아픈 일.
이 석상은 그 가슴 아픈 일을 절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제자가 제 손으로 사부를 죽인 것이니까.
두 번째.
파천혈신은 이렇게 잘생기지 않았다.
상당히 미화가 되어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파천혈신이 이 석상을 보고 있었다면 자화자찬했으리라.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이미 귀에 파천혈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이게 제일 중요했다.
석상의 비율이 너무 안 좋았다.
거의 5등신.
두 사람은 8등신의 완벽한 비율을 지녔는데.
석상은 괴상한 비율이었다.
대체 누가 이딴 비율로 조각했는지.
때려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건 파천자를 능멸한 행위였다.
“부수죠?”
남자가 누군가에게 말했다.
“이게요? 더럽게 못 만들었구만.”
“그냥 놔두라고요? 싫은데요. 이미 마음 정했어요.”
“억! 왜 호통치세요. 귀 떨어질 뻔했잖아요.”
“누구 때문에 성격이 이렇게 꼬였는데. 저도 이제 안 참아요.”
남자는 혼자 구시렁거렸다.
그러나 마치 옆에 누군가가 있는 듯했다.
남자의 혼잣말에도 그를 인식하지 못한 한민성과 해외 가주들.
“이거 부숴 버릴 거야.”
남자는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세를 보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석상을 향해 소리쳤을 뿐인데.
쩌어억!
거대한 석상이 거미줄처럼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조각난 석재가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서, 석상이!?”
“갑자기 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한민성과 해외 가주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무너진 잔해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이 선생님!?”
남자의 정체는 이준.
무기력증에 빠졌던 그가 드디어 게이트 밖으로 나온 것이다.
한민성은 이준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이곳에는 S급 각성자가 열 명이 훌쩍 넘었다.
그들의 이목을 완전히 따돌리고 접근했다는 말.
심지어 지척에 있었음에도 해외 가주들은 이준이 왔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이준이 초월적인 존재라는 걸 다시 한번 인지한 한민성이었다.
그는 최대한 밝은 얼굴로 이준을 맞이했다.
“이 선생님! 언제 학교로 오신 겁니까? 실로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이사장님.”
“예. 말씀하세요.”
“이 석상 누가 만들었어요?”
“철왕이 조각했습니다. 한데 그건 왜…?”
“누구 생각이에요?”
이준이 한민성을 지그시 보았다.
그저 눈을 마주친 것뿐인데 한민성의 등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제가 만들자고….”
“왜요?”
천진난만한 목소리였다.
하나 서늘했다.
뾰족하게 날이 벼려진 느낌이었다.
오히려 음성에 고저가 없는 게 나을 정도.
저 목소리를 듣고 한민성은 이준이 기분 나빠하고 있음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지금은 이 선생님이 아니고 파천자로서 질문을 하고 있어. 잘 대답해야 한다.’
한민성이 침을 꿀꺽 삼키면서 심호흡을 했다.
“역사적인 날을 남겨 학생들에게 이때를 잊지 말라고 교육하고 싶었습니다.”
한민성은 교육자로서 최고의 자세를 가졌다.
파천혈신은 세계를 멸망으로 이끄는 게 가능했던 인물.
규격 외의 존재를 파천자가 이겼다는 건 대 사건이었다.
학술적으로나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가지게 했다.
“이 석상을 보는 제 마음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네요.”
“오해입니다. 당연히 전 이, 아니 파천자 님을 가장.”
“됐어요.”
이준이 한민성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몸을 돌린 그가 경고를 보냈다.
“앞으로 저와 관련된 건 그 어떤 것도 하지 마세요. 제 경고를 무시한다면.”
이준이 감춰 놨던 기운을 풀자.
쿵.
대기가 무거워졌다.
회색 아지랑이가 이 일대에 내려앉았다.
중력이 수십 배로 증가한 듯.
땅이 거칠게 진동했다.
공기와 나무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신기지가를 지워 버릴 겁니다. 벌써 두 번째 경고입니다. 마지막은 없어요.”
한민성의 의도를 알겠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아마도 알려진 의도와는 다른 뜻일 것이다.
이젠 보지 못하는 사부의 얼굴을 자신이 떠올릴 수 있게 만들고 싶었을 터.
의도는 좋았으나 이때의 일을 떠올리는 건 가슴이 아픈 일이었다.
배려는 고마우나 자신과 상의도 없이 석상을 세운 게 거슬렸다.
이런 식으로 한 번씩 선을 넘는다면 다음에 또 같은 경우가 발생할 테니까.
한민성에게 경고를 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그래도 옛정이 있어서 이 정도로 끝난 것.
만약 다른 이가 석상을 세웠으면 가만두지 않았으리라.
한민성이라 이 정도로 끝난 것이다.
“이해하셨어요?”
“…죄송… 합니다….”
한민성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유가 했던 경고가 떠올렸다.
삼촌은 좋은 의도로 석상을 올렸겠지만, 이준이 생각하기에는 다를 것이라고.
한민성은 오직 이준만을 생각했고 한지유는 이준과 사부의 관계를 생각했다.
‘지유 말대로 철거를… 했어야 했구나….’
한지유는 석상을 철거하지 않으면 이준의 분노를 살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지유만큼 이준을 생각하는 마음은 한민성도 뒤지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신의 고집대로 밀고 나간 건데.
보기 좋게 틀려버렸다.
“그래도 오랜만에 봐서 좋네요.”
이준이 기운을 갈무리하자.
한민성을 압박하던 대기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허억… 허억…!”
이준은 그 말을 남기곤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준이 가자 해외 가주들도 거친 숨을 토했다.
한민성만이 이준의 영향권에 속한 게 아니었다.
“후욱 후욱!”
“아직도 숨이 하악… 안정되지 않습니다.”
“저, 저도 마찬가지예요.”
“저 사람이… 파천자….”
그들은 이준을 처음 봤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겪어 본 것도 오늘이 처음.
그에 대해 자세히 아는 건 무리였으나 딱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내가 그 짧은 순간에 공포를 느꼈어.’
‘다신 마주치고 싶지 않은 자야.’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전율스러울 수 있나.’
이준에 대한 해외 가주들의 느낌이었다.
그리고 든 또 다른 생각.
‘무사고의 특별 1반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겠어.’
‘나이를 떠나서 저런 각성자 밑에 있는데 당연히 강해져야지.’
‘파천자가 아니더라도 한국에서 배울 게 많겠군.’
파천자를 본 해외 가주들의 마음이 확고해진 순간이었다.
* * *
이준은 평소처럼 학교를 걷고 있었다.
교정을 걷는 그를 학생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투명 인간이었다.
바로 코앞을 지나가도 학생들은 이준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많이 변했네.”
규격 외의 존재가 된 이준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기척을 드러내야지만 그의 존재를 사람들이 알아챌 수 있었다.
“더 넓어지고 커졌어.”
무사중과 무사고가 통합됐다.
그리고 성인까지 받을 수 있는 새로운 배움의 터.
각성자 사관 학교가 새로 탄생했다.
교정을 거닐 때마다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무극자 사부를 처음 만났던 학교 뒷산.
등급 측정을 받았던 체육관.
실습을 나가기 전 조회를 했던 운동장.
새롭게 변한 시설이 그 자리를 대신했지만 이준에게는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제자야. 추억에 푹 빠져 있구나.]
“아, 쫌. 분위기 좀 잡자고요.”
[끌끌. 네놈하고는 진지한 게 안 어울리는 걸 어떡하느냐.]
“휴우. 사부님을 보고 싶어 한 절 죽도로 패고 싶네요.”
[보고 싶어 죽으려 할 때는 언제고 끌끌.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는 건 아니란다. 제자야.]
이준의 귀로 무극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괴팍한 성격을 지녔던, 처음 만났을 때 사부의 목소리였다.
위엄 가득하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오만한 사부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부님. 그거 아시죠? 벌써 세 번째예요. 이러면 저 진심으로 슬퍼할 수 없어요. 영혼과 몸이 완전히 소멸됐는데 대체 어떻게 다시 유령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거예요?”
[이 사부가 고금제일인인 걸 잊었느냐. 신선계에 올라갔더니 말코 놈들이 기겁을 하더구나.]
“그래서요?”
[신선계의 상좌에 앉았지. 그런데 노발대발하지 뭐냐.]
“설마. 깽판 친 건 아니죠?”
[끌끌끌.]
무극자는 그저 웃기만 했다.
옆에서 탐스러운 하얀 수염을 쓰다듬는데 어깨가 한껏 올라간 모습이었다.
“깽판 치셨구나?”
[결국 신선 놈들도 한때 인간이었던 자들. 이 사부에게 졌던 놈들한테 신선이 됐다고 지겠느냐. 얼굴도 들지 못하게 발라 버렸느니라.]
무극자 사부가 무용담을 떠들었다.
[내 너를 특별히 아끼니 그때의 일을 말해 주겠느니라.]
무극자 사부의 입이 풀렸다.
투머치토커답게 신선계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히 말했다.
누구와 싸웠고, 어떤 식으로 이겼는지.
한마디로 정리하면 신선계가 엉망이 되어 발칵 뒤집혔다는 내용.
결국 신선계에서 추방되었는데…. 지옥계에서 출입을 거부했다는 것까지.
사부의 입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네네. 그러셨어요?”
사부가 처음 나타났을 때 얼마나 좋았던가.
세 번째 나타나도 가슴이 뭉클했다.
자신에게는 부모 같은 존재였으니까.
훌쩍 떠났던 사부가 돌아오니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실컷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했다.
투덜거리는 말투로 말했지만.
[지옥계가 날 거부하니 어쩌겠느냐. 날 마계로 보낼 수도 없고 천계는 색목인 쪽이니 신선계가 받아들일 수밖에.]
“신선계가 받아들였으면 그쪽에 있지 왜 내려왔대요?”
전혀 성가신 얼굴이 아니었다.
[못난 제자의 얼굴이 아른거리지 뭐냐. 그래서 신선계 놈들에게 제안했지. 차라리 날 네 곁으로 보내 달라고.]
“그렇게 내려왔다고요? 신선계에 몸은 그대로 있고?”
[정답이니라.]
이준은 못 믿는 눈치였다.
그는 무극자 사부를 똑바로 보았다.
움찔.
[큼.]
무극자 사부의 몸이 들썩였다.
그리곤 일부러 시선을 피하며 딴 곳을 보는 게 아닌가.
“신선계에서 쫓겨나셨구나?”
이준이 정곡을 찌르자 무극자가 일갈을 터트렸다.
[가아아알! 누가 고금제일인은 쫓아낼 수 있단 말이냐아아아!]
이준이 인상을 쓴 채 귀를 막았다.
여전히 목청 한번 큰 무극자 사부였다.
“으으…. 농담이에요. 사부님이 발작하니까 더 진실 같잖아요.”
농담이긴.
사실을 알지만 일부러 모른 척을 했다.
그래도 파천혈신의 자존심이 있지.
신선계에서 쫓겨났다는 걸 제자에게 어떻게 말하겠나.
마음 넓고 착한 자신이 이해해야지.
[큼큼. 제자가 오해하는 것 같아 그저 큰 목소리로 말한 것뿐이니라.]
무극자 사부는 민망해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슬쩍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사부.
자신의 말을 믿는지 살피는 눈치였다.
“당연히 믿죠. 고금제일인을 그 누가 쫓아내겠어요. 아무리 신선계라도 어림없죠.”
[역시 나의 제자라 흐름을 빠르게 읽는구나. 네가 자연경에 오른 이유가 바로 그 빠른 깨달음이니라.]
여기서 경지를 엮는다고?
사기꾼 아닌가?
“누구의 제자인데요.”
[홀홀홀.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구나.]
[여전히 자화자찬하고 있군. 이런 큰 주인이 뭐가 좋다고 받아 주는지.]
[주인님이 착해.]
흑염마조와 파랑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이준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무극자는 알까.
당신 때문에 식음도 전폐하고 폐인이 됐다시피 했는데.
사부가 나타나자 좋다고 예전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나타날 수 있었으면 애초에 사라지지나 말지.
흑염마조와 파랑이는 이준을 슬프게 한 무극자가 얄미웠다.
[오, 저 아이들도 오랜만에 보는구나.]
이준이 향한 곳은 특별 1반이 모여 있는 운동장이었다.
“저도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유령처럼 움직였던 이준이 기척을 드러내자 제일 먼저 알아본 한 사람.
“우리 준이가 보이는데?”
박정연이 눈을 비비며 이준을 보았다.
그녀의 말에 한지유를 비롯한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이준….”
“서, 선생님!?”
“모두 오랜만이야. 잘 있었어?”
이준이 환하게 웃어보였다.
“준아아아!”
“선생니이이님!”
박정연이 경공까지 사용하며 이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 뒤를 아이들이 따라 달려왔다.
이를 본 무극자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흐뭇해했다.
[마음 어린 제자 놈 때문에 내가 신선계에 못 있는 것이지.]
-1부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