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6화
탈리아와 토비가 호텔로 돌아왔다.
가출을 한 지 3시간.
상당히 빠르게 돌아온 두 사람을 랭스 가주가 의아해했다.
“이번에는 어쩐 일로 빨리 돌아왔어?”
“아빠!”
“깜짝이야.”
“나 한국에서 유학할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는 거지?”
랭스 파스콜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에는 제롬 슈워츠가 있었다.
“신권을 만났습니다.”
“사신가의 무극단주를?”
“예.”
랭스의 눈이 커졌다.
그도 신권은 궁금했다.
얼마나 강한 각성자길래 암흑대제나 성결기사보다 랭킹이 높을까.
새로운 가문을 일으켜도 될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왜 파천자의 밑에 있는 걸까.
많은 의문이 들었다.
“어땠나?”
“강했습니다.”
“그리고?”
“괴물이었습니다.”
“똑같은 말 아닌가?”
“그 이외의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제롬 슈워츠의 극찬에 랭스가 놀란 얼굴을 했다.
입에 발린 말도 잘 하지 않고, 칭찬에도 인색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 정도로 대단해?”
랭스의 말에 탈리아가 흥분했다.
“그냥 미쳤어. 신권만 강한 게 아니야. 무극단은 국가 전력급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어.”
“구, 국가 전력급 이상?”
국가 전력급이라 하면 S급을 통칭했다.
평균 등급이 S급인 부대를 보유한 곳은 오직 미국의 제스퍼 가문뿐이었다.
“그렇다니까. 주작 단원이란 각성자들도 강했어.”
“제롬. 이 말이 정말인가?”
“사실입니다. 신권이 이끄는 단의 부단주라는 자 또한… SS등급을 지닌 것으로 사료됩니다.”
“한 가문의 전력이 무슨!?”
“아가씨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납득가십니까?”
랭스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가 풀린 것이다.
“암흑대제 님의 말이 맞는 것 같군….”
“암흑대제 님?”
“너희의 성격을 고치고 싶다면 파천자를 만나 보라고 하더구나.”
제롬 슈워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제롬 슈워츠는 무극단을 직접 보았다.
카오스 몬스터를 학살하다시피 한 무극단은 싸움이 끝나자 오합지졸의 태도를 보였다.
군기가 꽉 잡힌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역 방송을 하며 각자 자기 할 말만 해 대는 이들.
헌데 사형준이 파천자의 이야기를 꺼내자 모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것만 봐도 파천자의 영향력이 어떠한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다행이군. 그런데 신권과 무극단은 어쩌다 만났나?”
“아빠, 나 카오스 몬스터 봤어.”
“그 위험한 놈들을 네가 어쩌다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데란을 봤는데 무극단이 일반 몬스터를 죽이듯 학살했다니까?”
“제롬?”
“이 또한 사실입니다.”
“허.”
“한국에서 사신가를 논외로 쳐 주는 이유를 납득했습니다.”
“제롬이 그렇게 말하니 나도 보고 싶어.”
“파천자가 자리를 비웠다고 하니, 각성자 사관 학교의 개관식은 신권이 대신 오지 않겠습니까?”
파천자 다음으로 강한 사람이 사형준이었다.
그러니 이 중요한 행사에 사형준이 참석하지 않을까.
“기대가 되는군.”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말로는 전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형준의 이야기에 탈리아와 제롬의 눈이 빛났다.
이토록 생기가 넘치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뿐인가.
“아, 아빠.”
“응?”
“저, 저도… 한국에서 유학할 거예요.”
낯선 환경을 싫어하는 토비조차 눈을 빛내고 있으니.
랭스로선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그들이 가출한 3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러는 건지.
직접 따라나설 걸 후회하는 랭스였다.
“파천자가 교수로 오지 않아도 할 생각이냐?”
“응! 그래도 할래!”
“저, 저도요.”
가문으로 돌아가자고 해도 이제는 한국에 있겠다고 떼를 쓸 것 같았다.
“좋아. 당장 한민성 이사장님한테 전화를 걸어 입학서에 사인하마.”
탈리아와 토비의 성격만 고칠 수 있다면 어떤 대가든 각오가 되어 있는 랭스였다.
* * *
해외에서 손님이 온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각성자 사관 학교 개관식 날이 다가왔다.
학교 측에선 유학을 시키려는 해외 가문들에게 파천자에 관한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계속 기다려 달라는 말뿐.
어영부영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러 버렸다.
“아직도 파천자에 대한 답변이 없소. 이대로 우리 아이들을 이 촌구석에 유학을 시킬 것이오?”
영국의 페니모어 가문의 가주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다른 이들이 동조했다.
“파천자가 교수로 오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소. 그가 없으면 차라리 내가 자식들을 가르치는 게 낫지.”
“옳은 말입니다.”
“내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 학교 측에 잘못을 물을 거요.”
“나도 같이하겠소.”
모두가 페니모어 가주의 말에 동조할 때.
랭스 파스콜은 가만히 있었다.
‘너희는 떠들어라, 난 내 뜻대로 가겠다’라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자 페니모어 가주가 랭스를 불렀다.
“랭스 가주는 왜 아무 말도 없소.”
“할 말이 없어서.”
“이대로 아이들을 한국에 유학시키겠다고?”
“그렇소.”
“파천자가 안 가르쳐도 괜찮다는 말이오?”
“아쉽긴 하겠지만 어쩌겠소. 이해해야지.”
“아이들을 망칠 생각인가 보오.”
“페니모어는 오히려 좋지 않소? 앙숙인 가문의 자제가 망가지면 가장 큰 이득을 볼 텐데.”
“이 작자가! 난 당신을 걱정해 주고 있는 것이오!”
파스콜 가와 페니모어 가는 틈만 나면 싸웠다.
한쪽은 기사 가문.
한쪽은 마법사 가문이었다.
파스콜 가에서는 페니모어를 머리에 똥만 가득한 이들이라고 놀리고.
페니모어 가에선 파스콜을 걸어 다니는 근육 멍청이라 불렀다.
서로 완전 다른 곳이라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
타국에 와서까지 서로를 물어뜯고 있었다.
“난 내 생각대로 할 테니 당신은 당신대로 하시오.”
랭스가 입을 꾹 닫았다.
굳이 라이벌 가문에, 일주일 전에 있었던 일을 알릴 필요가 있을까.
신권에 대한 엄청난 소스를 쥐여 줄 필요가 없었다.
‘제발 이대로 한국을 떠나 줬으면 좋겠다, 비실이.’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오. 파스콜은 제외하고 우리끼리라도 항의하러 갑시다.”
해외 가주들이 단체로 한민성 이사장을 찾았다.
새로운 이사장실.
옛 무사고 본관 건물 대신 새로운 건축물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이사장실로 들이닥쳤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남지우 비서가 말렸지만, 차마 그들을 통제까진 할 수 없었다.
벌컥-
안쪽에는 한민성 이사장과 한지유가 있었다.
“이사장 당신! 우릴 기만해도 유분… 수지…?”
페니모어 가주가 한민성에게 버럭 소리치면서도 눈동자는 한지유에게 향했다.
예쁜 건 둘째치고.
‘한기?’
그녀의 주변 공기가 무척 차가웠다.
뼈가 시릴 만큼 유독 그녀의 주위만 냉랭했다.
페니모어 가주가 한 발 뒤로 물러나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온도를 느낄 수 있었다.
이를 눈치챈 한민성이 한지유에게 말했다.
“지유야 손님들이 오셨으니 이야기는 나중에 나누자.”
“네.”
한지유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방이 한결 따뜻해졌다.
‘내 아들과 같은 나이로 보이는데… S급에 다다라 있다니.’
페니모어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나이도 어린 여자아이가 S급에 올라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페니모어는 항의하러 온 것도 잊은 채 한지유에 대해 질문했다.
“방금 전 나간 아이는 누구입니까?”
“제 조카입니다. 아, 이명을 말하면 금방 아시겠군요. 한국에선 빙화로 유명합니다.”
“빙화!”
“어쩐지.”
“기세가 심상치 않더니.”
“엄청난 조카를 두셨습니다.”
한지유를 본 가주들이 차례대로 그녀를 칭찬했다.
알려진 빙화의 등급은 S급 완숙이었다.
어린 나이에 이룬 대단한 성취였다.
그녀와 같은 나이대에 S급을 지닌 사람은 거의 손에 꼽혔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리라.
한지유가 이미 S급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사실을.
천외천과의 최후 전쟁은 특별 1반의 한계를 극한까지 끌어 올렸다.
“이 선생님, 그러니까 파천자 님 밑에서 열심히 배운 결과입니다.”
“파천자!”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파천자 님의 능력이 대단한 듯합니다.”
“능력은 이미 특별 1반으로 입증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 학교 측에서 총력을 다해 이 선생님과 접촉하고 있습니다.”
한민성의 능력은 화술.
한국의 내로라하는 가문의 학부모를 만나 본 그였다.
서양의 학부모라고 다를까.
학구열을 자극해 주면 학부모는 순한 양이 되었다.
한민성은 그들을 정신 못 차리게 했다.
“이럴 게 아니라 절 따라오시지요. 학부모님들께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한민성은 그들을 데리고 새로운 건물을 나가 옛 무사고가 있던 곳으로 이동했다.
그는 이동하는 내내 입을 쉬지 않았다.
학부모의 혼을 쏙 빼놓는 화술에.
이미 그들은 한민성에게 매료가 되어 있었다.
무사고 본관 건물이 있었던 곳에 도착했다.
“제가 여러분께 보여 드리고 싶은 건 이 석상입니다.”
거대한 두 개의 석상.
서로 주먹을 뻗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선생님과 파천혈신이 격렬하게 싸우던 모습을 재현해 놓은 겁니다.”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시선을 확 끌어 잡더니.”
“경이로울 정도로 멋진 건축물이군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게 생생히 느껴집니다.”
“이 석상은 이 선생님의 눈물입니다. 이 전투로 인해 후유증이 심하게 남으셔서 요양하고 계십니다.”
페니모어 가주를 비롯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천혈신은 규격 외의 등급.
그런 적과 싸운 파천자가 아무 상처도 없이 이겼을까.
긴 요양이 필요했을 것이라 생각한 해외 가주들이었다.
하나 이건 한민성이 지어낸 거짓말.
저들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기에 지어낸 스토리였다.
이준과 파천혈신의 관계를 알지만 이는 극비사항.
해외에 이준의 스토리를 말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말하면 안 됐다.
이건 이준과 완전히 척을 지는 행동이었으니까.
이준에게 은혜를 입은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사연을 감춰 줄 필요가 있었다.
“여러분이 걱정하는 맘 아주 잘 압니다. 자식들을 이 선생님 밑에 두고 싶겠지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뭡니까?”
“예전에도 여러분과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학부모가 아닌 학생들이 반발했지요. 내 수준은 특별 1반보다 높은데 왜 자기는 이 선생님께 못 배우냐 항의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요?”
“그 학생은 지금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때를 기다리고 가만히 있었으면 이 선생님께서 가르침을 던져 주고 갔을 텐데…. 그 일로 인해 완전히 찍혔습니다.”
“파천자께 말인가요?”
“예. 그 일로 그 학생은 이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한민성은 학부모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파천자에게 찍히면 국물도 없다는 걸.
그러면서 당근도 동시에 던져 줬다.
“그런 안타까운 일이!”
“학부모님들이 보신 무사고 학생들의 수준은 어때 보입니까?”
“사실… 굉장하다고 느꼈어요.”
“실전에도 투입해도 되지 않나 싶었습니다.”
한민성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실전에 투입해도 된다라. 맞습니다. 당장 현장을 뛰어도 되는 학생들입니다. 우리 무사고 학생들은 그 어떤 변수, 고난과 역경을 버틸 수 있는 강인할 멘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왜 그럴까요?”
“등급이 높으니 멘탈이 강한 게 아닙니까?”
“실전으로 경험치를 쌓았겠지요.”
“맞습니다. 실전으로 인한 위기 대응 능력을 높여 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실전은 ‘실전같이’가 아니라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는 극한의 훈련입니다. 그 결과가 저 무사고 학생들이지요.”
한민성은 최대한 돌려서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학부모들의 얼굴에는 흥분이 가득했다.
자기 아이들도 강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것이다.
“저희 각성자 사관 학교에 자녀들을 입학시키면 무사고 학생들처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지금 바로 다친 이 선생님을 불러올 수는 없으나, 상태가 호전되는 즉시 교수로 재직할 수 있게 노력할 겁니다. 이 선생님께 조금이라도 조언을 받으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겁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파천자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