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5화
“변변찮은 이명입니다. 그쪽은 괜찮으십니까?”
“아, 네….”
탈리아는 자신의 처지가 쪽팔렸는지 사형준이 내민 손을 잡지 못했다.
“여긴 사신가에서 게이트 위험 구역으로 지정한 곳입니다. 어쩌다가 이곳에 들어오신 겁니까?”
사형준의 분위기에 압도되었던 제롬 슈워츠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사죄드립니다. 아가씨께서 한국은 처음인데 아버지인 파스콜 가주와 싸우고 가출하는 바람에 이렇게 됐습니다.”
제롬 슈워츠의 적나라한 말에 탈리아가 버럭 소리쳤다.
“아저씨!”
“민망한 건 아시나 봅니다.”
제롬 슈워츠가 피식 웃고는 사형준에게 정식으로 소개했다.
“도움 감사드립니다. 전 파스콜 가의 그림자 호위단장 제롬 슈워츠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두 사람이 악수를 했다.
인사를 마치자 사형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음부터는 밤늦게 다니시지 마십시오. 최근 들어 카오스 몬스터들이 자주 출몰합니다.”
그의 말에 탈리아가 반문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선 한가하게 술을 마시고 여유롭게 있던데요?”
“그들은 균열이 발생하면 빠르게 쉘터로 이동할 수 있게 훈련이 된 상태입니다. 최근 들어 카오스 게이트가 빈번히 열려서 내성이 생긴 겁니다.”
무극자와 이준의 싸움 이후.
많은 변화 중 하나가 바로 카오스 게이트였다.
일반 게이트는 레드급 이상만 열리고, 거기서도 전부 카오스 균열이 일어났다.
각성자들의 수준이 높아진 만큼.
게이트의 공략 난이도도 대폭 수정된 상황.
마치 누군가가 각성자에 맞춰 난이도를 조절하는 것 같았다.
“너무 평화로워서 카오스 게이트가 빈번하다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주의사항을 말하지 않은 저희 쪽 잘못이기도 합니다.”
사형준의 말이 끝나자 지원 요청을 받았던 사신가의 각성자들이 도착했다.
제롬 슈워츠와 탈리아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아저씨 각성자들의 상태가… 왜 저래요?]
[정말 엄청나군요.]
[저와 등급이 같은 각성자만 대체 몇 명인 거예요!?]
[사신가…. 가주께서 아가씨를 이곳에 데리고 온 이유가 저기에 있었습니다.]
제롬 슈워츠는 다시 한번 감탄했다.
괴물 같은 집단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들의 전력을 보니 대충 사신가의 사이즈가 나왔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사신가가 웬만한 나라도 박살 낼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었군요.]
[말이 돼요?]
[안 됩니다. 상식적으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왜 저래요?]
[파천자 밑에 있는 각성자들 아닙니까.]
“아.”
탈리아는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말이 나와 버렸다.
[파천자의 가르침을 받으면 아가씨도 S급에 도달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럴까요?]
[물론입니다. 가주께서 한국에 파스콜 가의 정보를 공개한 것도 모두 아가씨와 토비 도련님 때문 아닙니까. 이런 기회는 다신 없을 겁니다.]
[파천자가 각성자 사관 학교 교수로 오지 않으면요?]
[한국 쪽에서 무슨 수를 쓰지 않겠습니까.]
[저들의 실력이 파천자 때문이라면 이곳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각성자는 자신의 실력을 높이는 데 환장해 있었다.
실력은 곧 명예와 권력이니까.
등급이 오르는 걸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이 시크릿 보이스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사형준이 주작 단원들에게 짧게 한마디 했다.
“늦었다.”
“죄송합니다. 설마 이곳에 들어간 각성자가 있을 줄 몰랐습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접근 금지 구역.
사신가에서 금지로 지정한 구역이었다.
사신가가 금지 구역으로 지정한 뒤 그 어떤 각성자도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오히려 보안이 느슨했던 거다.
하필 감시자가 교대할 때 탈리아와 토비가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고.
“내가 처리했으니 가문으로 복귀하면 된다.”
“고생하셨습니다.”
사형준이 제롬 슈워츠에게 몸을 돌렸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도움 감사했습니다.”
제롬 슈워츠와 탈리아는 궁금한 점이 무척 많았다.
사형준이 나타나자 그 강력한 스케먼이 그냥 물러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인간과 몬스터 간의 공존.
두 사람의 눈엔 서로 다른 종족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비쳤다.
하나 그 궁금증은 집어넣어야만 했다.
쉽게 물어볼 사안이 아니었다.
자칫 큰 오해를 불러올 소지가 있는 주제였으니까.
사형준이 사신가의 각성자와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삑삑!
그들의 시계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사 단주님. 한남동 도서관 쪽에 카오스 게이트가 열린 것 같습니다.”
“오늘은 잘 넘어간다 했는데. 가자.”
“예!”
사형준과 주작 단원들이 빛과 같은 속도로 사라졌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던 탈리아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 구경하러 갈래요?”
“큼. 전 아가씨의 안전을 위해서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탈리아가 사형준이 사라진 방향으로 날아갔다.
“누, 누나 호텔로 안 가?”
“잔말 말고 따라와.”
토비가 그녀를 말렸지만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사신가의 싸움을 보다 보면 도련님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실 겁니다.”
제롬 슈워츠까지 그렇게 말하니 토비 역시 그녀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 * *
한남 도서관에 나타난 카오스 몬스터는 데란.
블랙 오크로 등급은 레드였다.
카오스 몬스터가 나타나자 그 즉시 사신가에서 병력을 투입했다.
카오스 등급으로는 레드였지만 일반 등급으로 치면 블랙급 몬스터.
사신가에서 카오스 몬스터 처리반이 출격했다.
“미친 새끼들이! 그만 좀 나타나지. 깨어 있은 지 벌써 42시간 째야.”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온 김봉팔이 욕을 뱉었다.
최근 들어 일어난 균열은 죄다 카오스 게이트.
아무 피해 없이 처리할 수 있는 무력 부대는 오직 무극단밖에 없었다.
그들이 눈코 뜰 새가 없는 이유였다.
“그러게 틈틈이 잠 좀 자라고 하지 않았소.”
“자면 못 일어날 것 같아서 그래 인마.”
“내가 깨워 준다고 했잖소.”
“네가? 차라리 지나가는 개를 믿겠다.”
“낄낄. 어떻게 알았데?”
“우리 봉팔이 형 좀 그만 놀려요.”
“맷집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우리 무극단의 최종 방패잖아요. 특성도 기가 막히지!”
무극단의 놀림에 김봉팔이 버럭 소리치고 싶었으나.
너무 졸려 힘이 안 났다.
“내가 회복만 하면 너흰 다 뒤졌다.”
무극단은 중간중간 떠들어 대면서도 카오스 게이트 봉쇄를 완벽히 했다.
무극단의 최고 장점.
오합지졸이 모인 부대 같아 보이나.
실상은 최정예 각성자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
“형님들. 몬스터가 계속해서 나옵니다요.”
포탈에선 블랙 오크 데란이 계속해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징하다, 징해.”
“안 지겨울까.”
“쟤들한테도 다 사연이 있겠죠.”
“오, 굉장히 좋은 지적이야. 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였는데.”
“헤헤. 제가 또 대승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또라이 집단답게 카오스 몬스터가 나타나도 긴장이 없었다.
자신들의 실력에 자신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직 보스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았다.
보스급 몬스터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정말 컸다.
특히 카오스 몬스터라면 더욱 영향을 받았다.
“야이씨! 집중 좀 해.”
“뭘 저놈들 가지고 그럽니까.”
“이곳에 누구 없지 않냐?”
“단주가 없지 않소.”
“그러니까. 그 양반이 없잖아. 이해되지?”
“단주님 치료 가셨구나?”
“X됐네.”
영향을 받는 건 카오스 몬스터만이 아니었다.
무극단도 마찬가지.
사형준이 있어야 무극단은 온전한 무력을 뿜어낼 수 있었다.
한데 지금은 사형준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우리가 한 명이라도 죽으면 주군은 영영 못 볼 거다.”
“그건 안 되는데.”
“가문에서 역적되는 건 순식간이겠다.”
“이거 똥줄 타네.”
무극단원들이 장난을 집어치우고 기세를 피웠다.
움찔.
데란의 몸이 살짝 떨렸다.
무극단의 기세에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무극단이 이루고 있는 진법은 전륜마멸진.
주 속성을 빛으로 설정하니 데란이 받는 압박은 상당했다.
마기와 반대되는 게 빛이었으니까.
무극단이 호흡을 가다듬고 있을 때.
“딱 맞춰서 왔군.”
“단주!”
“치료는 다 끝났소?”
“오늘은 끝났다. 상황은?”
“뭘 물어보시오. 직접 보면 되지.”
김봉팔의 말에 사형준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데란이군. 이곳을 이탈한 몬스터는?”
“전무하오.”
“그럼 토벌을 시작한다.”
사형준의 왼손에 소용돌이치는 기류가 생성됐다.
아직 오른쪽 팔은 다 낫지 않았기에 봉인해 놓은 상태.
그는 왼팔만을 사용해 장력을 발출했다.
사형준의 공격을 시작으로 무극단이 데란을 향해 달려들었다.
“주작단은 보고만 있어. 괜히 다치지 말고.”
주작단도 무력 단체 중 하나이긴 하나 무극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김봉팔이 적진 한복판에 뛰어들기 위해 땅을 힘차게 밟았다.
* * *
“죽여라!”
“살육을 일으켜 차원의 틈을 만들어!”
“제물은 저놈들이다!”
데란이 함성을 지르며 무극단에게 달려들었다.
카오스 몬스터답게 일반 오크와는 체격과 흉포함이 달랐다.
녀석들의 도끼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빛이 번쩍이며 세상을 분리시켰다.
“큭!”
“후미로 빠져.”
전륜마멸진이 아니었다면 데란의 도끼에 두개골이 박살 났을 터.
옆에서 보조해 주는 동료가 있어서 목숨을 건진 무극단원이었다.
쾅!
“청룡의 걸음걸이라고 들어 봤냐, 새끼들아.”
데란 한복판에 떨어진 김봉팔이 진각을 밟았다.
그의 주변으로 일제히 떨어지는 뇌전에 데란이 즉사했다.
그게 끝이라면 천무가 아니었다.
떨어진 뇌전이 바닥을 타고 데란의 몸을 경직시키자.
“청룡격.”
허공에 김봉팔의 발차기가 시작됐다.
그의 발은 오직 허공만을 노렸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수십 번의 움직임.
그가 바닥에 착지했다.
서걱 소리와 함께 곳곳에서 파육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청룡격은 권법이자 각법.
다리와 손을 무기 삼아 강기를 내보내는 특징이 있었다.
데란이 당한 건 김봉팔이 쏘아 보낸 강기였다.
그의 주위에는 검은 비가 내렸다.
데란의 피.
역겹고 불길했다.
김봉팔이 적진을 흔들어 주자 무극단은 한결 수월해졌다.
거기다가 사형준의 백호 계열 장법인 번천장까지 작렬했다.
콰아아앙!
번청장의 영향력에 든 몬스터들이 모두 가루가 되었다.
단 두 사람의 무력에 카오스 몬스터가 전의를 상실해 갔다.
그 뒤는 무극단원들의 몫.
단주와 부단주에게 질세라 가장 자신 있는 무공을 꺼내 카오스 몬스터를 학살했다.
이를 뒤에서 지켜보는 탈리아가 입을 떡 벌렸다.
“미, 미쳤어….”
“아무래도 아까 말했던 말을 취소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들만으로도 나라를 없애는 게 가능할 듯합니다.”
제롬 슈워츠는 지금과 같은 장면을 생전 처음 보았다
그도 많은 게이트를 토벌하고 풍부한 경험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
그런데 이렇게 일방적인 학살은 처음 보았다.
아니, 있긴 있었다.
일반 몬스터인 블루, 레드급 몬스터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하지만 무극단이 상대하는 건 카오스 몬스터.
흉악하기로 소문난 데란의 전의를 완전히 꺾고 가지고 노는 게 아닌가.
이를 본 토비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도… 저렇게 강해지고 싶어….”
등급은 높으나 몬스터를 죽여 보지 못한 토비조차도 무극단의 싸움을 보자 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차올랐다.
싸우고 싶은 흥분과 성취하고 싶은 열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