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4화
“어서 빨리 옮겨! 우리가 열심히 해야 주인님께서 기뻐하실 거다.”
“찍찍!”
테구르와 스케먼이 게이트로 짐을 날랐다.
“오늘은 안 나타난 것 같아서 다행이야.”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테구르.
큰 숨을 내쉬며 안도를 했다.
금역 소속이었던 몬스터들이 교대로 밖으로 나와서 조경과 건축에 필요한 자재를 옮겼다.
오늘은 테구르와 스케먼 차례였다.
“정연 님과 지유 님이 오시면 참으로 난감한데.”
테구르는 박정연과 한지유를 어려워했다.
그가 보기에는 두 사람이 제일 주인의 짝으로 어울렸다.
벨렌 로레스도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으니 예외.
가까이에 있는 두 사람을 가장 신경 써야 했다.
“슬슬 나도 노선을 정할 때가 됐어.”
한쪽을 선택하지 않고 갈팡질팡하거나.
박쥐 같은 모습은 제1충복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흠….”
테구르는 팔짱을 낀 채 골똘히 생각했다.
과연 주인의 짝으로 누가 어울릴까.
누구를 밀어줘야 자신의 권력이 더 올라갈까.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정연 님은… 무서우니까 지유 님으로 할까? 지유 님은 상냥하고 조용한 성격이니까 주인님과 잘 어울릴 거야.”
테구르가 노선을 변경했다.
박정연에서 한지유로.
박정연의 드센 기는 테구르로 하여금 움찔거리게 만들었다.
블랙급 보스 몬스터인 그였지만, 주인과 굉장히 친밀하다는 것과 강한 인간이라는 게 그에게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녀의 앞에만 서면 몬스터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반면 한지유는 어떤가.
천사가 따로 없었다.
조용하며 항상 먹을 걸 챙겨 주는 상냥한 인간.
초록 액체가 담겨 있는, 못 먹는 음료를 주지만 그래도 자신을 챙겨 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인간과 몬스터에 대한 편견도 없었다.
게다가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여자라 대하기도 편했다.
“그래! 정연 님께는 미안하지만 주인님께 지유 님을 밀어드려야겠어.”
테구르는 이준의 의사와 이상형은 상관없이.
오로지 자기 편한 사람을 골랐다.
하지만 그는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한지유의 성격도 한따까리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최근 본 한지유는 답답함을 속으로 삭이고 있을 뿐.
만약 이 답답함이 외부로 터진다면 박정연 못지않은 또라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테구르는 최근의 모습만 보고 너무 쉽게 그녀를 선택한 것이다.
앞으로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말이다.
“흐흐.”
테구르는 이준의 옆에 한지유가 있는 모습을 상상으로 그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두 사람 뒤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까지.
제1충신으로서 뿌듯함과 동시에 무한한 영광이었다.
“샥쿠 님과 로티틸 님을 제칠 기회다 낄낄.”
테구르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웃음을 뚝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딴생각하다 경계를 소홀히 한 것.
뒤늦게 그의 기감에 누군가가 잡혔다.
“애들아. 일 크게 만들면 안 되니까 죽이지 말고 잡아.”
테구르가 낮은 목소리로 스케먼을 향해 명령했다.
짐을 나르고 있던 스케먼 무리가 움직였다.
일꾼 몬스터지만 블랙급 몬스터.
등급이 넘사였다.
어지간히 강한 각성자가 아니라면 스케먼에게 한주먹거리.
열 마리의 스케먼이 어둠에 숨어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던 두 명의 인간들에게 달려갔다.
* * *
스케먼의 움직임은 상당히 빨랐다.
아니, 전광석화와 같았다.
“억!”
“누, 누나.”
탈리아와 토비가 화들짝 놀랐다.
자기들이 먼저 공격하려 했는데 몬스터가 선공을 취했다.
손톱을 바짝 세워 공격해 오는 스케먼들.
탈리아가 검을 뽑아 스케먼에게 휘둘렀지만.
깡!
스케먼의 손톱과 부딪힌 그녀의 검이 큰 반동으로 의해 크게 뒤로 밀려났다.
화르륵-
순간 그녀의 검신을 타고 불꽃이 올라왔다.
파스콜 가문의 고유 스킬.
염제의 검이었다.
그녀가 염제의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그물망이 그녀와 토비 위로 떨어졌다.
“이까짓 거 베면 그만이야.”
그녀가 염제의 검으로 그물망을 자르려고 휘둘렀으나.
오히려 검에 깃든 마력이 쑥 빠져나갔다.
스킬의 무력화에 탈리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떻게!?”
“거기까지.”
테구르의 그물망.
그가 최근에 만든 아티팩트였다.
그물망은 내공과 마력을 흡수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불 속성에는 천적.
불의 신봉자인 테구르의 아티팩트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스케먼의 기민한 움직임에 탈리아와 토비의 뒤를 밟던 파스콜 가의 그림자가 뒤늦게 나타났다.
200명은 되어 보이는 이들이 스케먼을 향해 일제히 검을 겨눴다.
새로운 이들의 등장에 테구르가 어깨에 마법 공학총을 걸쳤다.
“쥐새끼들이 왜 이렇게 많아? 생김새를 보니 한국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여긴 사신가의 영역.
스케먼이 게이트 밖에서 활발히 활동할 수 있었던 건 주인의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사신가에서도 이를 인지하고 몬스터가 움직이는 경로를 모두 차단.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아니, 애초에 인적이 드물고 게이트 위험 지역이라 사람들이 가지 않는 곳.
그런 장소를 탈리아와 토비가 들어온 것이다.
“이걸 어쩌지?”
테구르는 인간을 해쳐서는 안 됐다.
여긴 주인이 사는 세상.
살육을 벌이면 안 되는 곳이었다.
테구르가 고민에 빠진 사이.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아요. 아저씨 이놈들 좀 어떻게 해 봐요.”
“그게… 저희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입니다.”
“네?”
모습을 드러냈던 그림자 호위단이 스케먼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언제 포위됐어요?”
“말하는 사이에 이렇게 됐습니다.”
그림자 호위단도 난감해했다.
주인을 보호해야 하는데 도리어 포위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잘못 걸린 듯합니다.”
“왜 이렇게 느긋하게 말해요.”
“흥분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저희 어떡해요?”
“그걸 왜 저에게 묻습니까.”
“아빠가 시켜서 저희를 따라온 거 아니에요.”
“그렇죠.”
“이 상황에서 해결책을 내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말입니까? 해결책이 딱히 보이지 않는데….”
그림자 호위의 단주.
제롬 슈워츠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등급은 S급 초입.
랭스 파스콜 다음으로 가문에서 가장 강한 각성자였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아가씨. 저 몬스터들의 등급은 알고 있습니까?”
“끽해 봐야 블루급 아니에요?”
“하아아. 그럴 줄 알았습니다. 제발 교과서대로 행동하지 말고 마력 감지를 생활화하십시오.”
“등급이 어떤데요? 뭐 블랙급이라도 되나?”
“바로 맞췄습니다.”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탈리아와 토비 그리고 그림자 호위단원들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블랙급 몬스터가 게이트 밖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에, 에이 거짓말하지 마세요. 괜히 저 가출했다고 겁주는 거죠? 그린급인 스케먼이 어떻게 블랙급이 될 수 있어요.”
“사실입니다. 마력 감지를 사용해 보십시오.”
제롬 슈워츠의 말에 탈리아가 정신을 집중했다.
그린, 블루, 레드급을 가뿐히 넘는 마력들.
측정치가 이미 초과를 했다.
AA급 각성자로서 블랙급 이상의 몬스터의 마력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온전히 느끼지는 못했다.
“헉! 지, 진짜 블랙급 몬스터야! 스케먼이 블랙급이라니….”
탈리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블랙급 몬스터를 처음 마주했다.
그것도 많이 알려진 등급의 몬스터가 아닌, 스케먼이라는 일꾼 몬스터를 블랙급으로 만났다.
그녀가 가진 상식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세상은 각성자 교과서에 나온 대로만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러게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고 제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습니까.”
제롬 슈워츠가 고개를 저었다.
저 말괄량이 아가씨를 따끔하게 혼낼 기회였다.
하지만 몬스터가 적당히 강해야지.
눈앞에 보이는 몬스터는 너무도 강했다.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블랙급에 해당했고 특히!
어깨에 마력총을 걸치고 있는 몬스터는 등급 측정이 불가능했다.
“저, 저희 주, 죽는 거예요?”
토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사신가에 도움을 청해 놓긴 했습니다만….”
사실 희망은 없었다.
사신가라 해도 상대는 블랙급 몬스터가 아닌가.
한국 최고의 가문이라 해도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자신들을 구해 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다만 이상한 점이 보이기도 했다.
몬스터들은 인간만 보면 살육을 즐겼다.
지금처럼 포위된 먹잇감이라면 기다리지 않고 광기를 일으켰을 터.
그런데 놈들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 * *
웅웅.
사형준의 오른 어깨에 기운이 진동했다.
무극자 사부로 인해 잘린 어깨를 신의가 붙여 줬다.
하나 어깨 부근에 깃든 파천멸기는 신의라고 한들 온전히 몰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이준이 직접 치료에 나섰다.
무극자 사부 때문에 팔이 잘렸으니.
제자인 이준이 뒷수습을 하는 건 당연했다.
“이제 됐어.”
“감사합니다, 주군.”
“그러게, 왜 앞에서 알짱거려. 평생 한 팔을 잃을 뻔했잖아.”
이준의 말에 사형준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다면 주저 없이 나서겠다는 표정이다.
“무적 특성 보유한 봉팔이 있잖아. 쓸데없이 특성 소모시키지 말고 중요할 때 써먹어.”
“명심하겠습니다.”
“내 주변에는 날 걱정시키고 싶어서 안달인 사람밖에 없네. 하아아.”
이준은 혼원문 대리석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사형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시였다.
“가 봐.”
“계속 이곳에 계실 겁니까?”
“응.”
“모두가 걱정하고 있습니다.”
“…….”
“하루빨리 마음을 다독이셨으면 좋겠습니다. 주군의 사부님만 당신을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형준이 벗었던 상의를 입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옆에 자동으로 포탈이 생겨났다.
이준은 그의 말에 다른 대답을 했다.
“밖에 소란이 일어났어. 테구르와 파스콜 쪽 각성자가 사신가를 기다리는 것 같아. 나가서 해결하고 복귀해.”
“예. 주군.”
사형준은 주군인 이준이 정말 뛰어난 인간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정말 각성자를 초월한 수준에 오른 것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 또한 SS급에 있는 각성자.
한데 게이트 안에선 밖의 기운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세상과 단절된 공간.
한데 이준은 게이트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깥세상을 훤히 보고 있었다.
누가 있는지.
등급이 어떤지.
정체가 뭔지.
전부 아는 게 아닌가.
그래서 더욱 이준을 포기할 수 없었다.
게이트 안에서 썩기엔 너무도 아까운 사람이었으니까.
‘잘 이겨 내실 거라고 봅니다.’
사형준이 이준을 한 번 보고는 게이트를 나갔다.
지잉-
스케먼이 짐을 옮기는 게이트 말고 다른 포탈이 열렸다.
마치 지원 온 각성자처럼 어둠을 뚫고 사형준이 나타났다.
[주인님이 뭐라셔?]
[해결하고 가문으로 복귀하라고 하십니다.]
[그래 사 단주가 잘 끝내. 우린 하던 일을 할게. 애들아. 다시 일하자.]
테구르가 스케먼의 포위를 풀었다.
스케먼들은 놓아 뒀던 짐을 들고 열려 있는 게이트로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탈리아와 제롬 슈워츠의 눈이 커졌다.
사형준은 일부러 그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행동을 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테구르가 던진 그물망을 왼쪽 팔로 들어 올린 것.
꿈쩍도 하지 않았던 그물망을 가뿐히 들어 올린 남자의 모습에 제롬 슈워츠의 눈동자가 떨렸다.
‘마력을 흡수하는 망을 단번에 들었다.’
단순한 망이 아니라 S급의 힘을 지녀야 드는 게 가능했으며.
저항 없이 해체하려면 그 이상의 힘이 필요했다.
“신권 사형준!?”
신권 사형준은 파천자의 호위 단주.
세계 랭킹 110위에 있었던 각성자로 파괴적인 무력을 지녔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S급 초입에 있는 제롬 슈워츠가 침을 꼴깍 삼켰다.
이렇다 할 기세를 피우는 것도 아닌데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이게 바로 SS급 각성자의 위력.
생전 처음 SS급 각성자를 접하니 가슴에 확 와닿았다.
이런 수하를 거느린 파천자는 얼마나 강할지.
전신에 난 털이 모조리 치솟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