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3화
해외 각지에서 온 손님들이 호텔로 돌아갔다.
검왕과 신기학사가 그들을 안내했다.
호텔 아래.
검제와 괴개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음….”
“파천자가 이대로 모습을 감추면 어떻게 되냐, 춘식아.”
“반발이 커지겠지.”
“아주 지랄맞게도 일이 꼬였구나, 쯧.”
한국이 세계 제일의 강국으로 올라섰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파천자란 초월적인 존재가 있어서였다.
검제와 괴개, 검룡과 검화가 SS급 각성자라도 한국 전력의 삼분의 일을 차지할 순 없었다.
한국은 조그마한 나라.
미국이나 유럽하고는 땅덩어리 자체가 달랐고 각성자 인구수 또한 현저하게 차이가 났다.
SSS급을 넘는 규격 외의 존재인 이준이 한국 전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니까 강대국으로 올라선 것.
이준이 빠진다면 미국이나 유럽과 전력이 비슷해질 것이다.
“이참에 강대국으로서의 입지를 잘 다져야 할 터인데….”
“그런데 혈마 말도 일리가 있어. 우리끼리 북 치고 장구 친다 해서 될 게 아니야. 모든 결정은 파천자에게 있어.”
“안다. 이건 한민성 이사장이 파천자의 승인을 받고 진행한 일이야. 변수가 생겨서 이리 꼬인 것이지.”
“적이 파천자의 사부일 거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자연경… 실제로 그 경지가 존재했을 줄은 몰랐지….”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다리가 후들거린다.”
검제와 괴개는 처음 무극자가 등장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잊혀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떠오른다.
압도적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패기는 좌중을 절망시켰다.
싸우고 싶다는 의지를 완전히 꺾어 버리는 기세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파천자는 그런 괴물을 어떻게 사부로 뒀을까.”
“우리 손녀도 전혀 모르는 눈치더라.”
“정연이와 혁진이도 사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았어. 파천자가 그에게 무공을 배웠다는 정도가 다야.”
“그나마 추측할 수 있는 건 천외천과 관련된 건데….”
“연관을 지으면 끝도 없다.”
“그래, 그건 생각하지 말고 앞에 닥친 일부터 생각하자.”
그들이 해결해야 할 일은 유럽에서 직접 한국으로 온 가주들을 어떻게 할지였다.
며칠은 호텔에 머물게 해도 된다.
하지만 시일이 계속 늦춰졌다가는 사달이 날지도 모른다.
이곳으로 온 가주들도 한 가문의 주인들.
가문을 오래 비울 순 없는 처지였다.
유럽의 가주들은 자식들을 최대한 빨리 각성자 사관 학교에 입학시키고 싶을 터다.
“파천자의 몬스터들이 한 번씩 밖에 모습을 보이는 곳이 어디라고 했지?”
“사신가의 영역에 랜덤으로 출몰한다고 하더라.”
“그들과 이야기라도 나눠 봐야겠어.”
“이미 아이들이 말을 붙여 봤단다.”
“어떻게 됐어?”
“가르쳐 줄 수 없대.”
“허, 이리 답답한 일이 있나.”
“애들이 계속 접촉하고 있다고 하니 우선 기다려 보자. 파천자가 밖으로 나올 낌새가 보이지 않으면 손님들을 모두 돌려보낼 수밖에.”
“자기들을 기만했다고 트집을 잡겠군.”
“그러겠지. 한국이 세계 제일의 강국으로 올라섰으니 이를 물고 늘어질 거다.”
“이래서 내가 대외 활동을 안 하려는 거야. 너무 머리 아파.”
“심호 넌 현재에게 가문을 던지고 방구석에 처박혔지 않냐?”
“가문의 부흥과 네놈을 꺾으려고 뼈를 깎는 노력을 한 것이다!”
“그랬냐? 난 네가 가문을 이끌기 귀찮아서 아들한테 넘긴 줄 알았지.”
“뭐야!?”
괴개가 눈을 부릅떴다.
그의 몸에서 독기가 흘러나오자 검제가 줄행랑을 쳤다.
“큼큼. 영섭이가 호텔에서 나온 것 같군. 다음에 보자고 친구.”
50년 이상을 친구로 지내니 진지한 대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무거운 이야기가 지속되면 어색한 모양.
쉽고 가벼운 주제로 넘겨 버리면 될 텐데 꼭 둘 중 하나는 속을 긁는 소릴 했다.
이번에는 그게 검제의 차례였었다.
“언젠가 꼭 저놈을 밟아 버리겠어.”
괴개는 검제를 향해 이를 갈았다.
파천자로 인해 한국에 평화도 왔겠다.
천무대전 같은 게 열리면 특별전으로 친구인 검제를 지목해 발라 버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 * *
한남동에 있는 호텔 VVIP룸.
영국에서 온 파스콜 가의 가주 랭스 파스콜이 짐을 풀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때.
벌컥!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아빠! 정말 이 촌나라에 날 유학 보낼 거야?”
방으로 들어온 여자는 스물셋 정도.
윤기가 가득한 검은 웨이브 머리를 한 미녀였다.
“노크! 아빠가 언제까지 예의를 가르쳐야겠느냐.”
랭스 파스콜이 인상을 찌푸렸다.
검은 웨이브 머리를 한 여자가 방을 나가 똑똑 두드린 후 다시 들어왔다.
“됐지?”
그녀의 이름은 탈리아 파스콜.
파스콜 가의 첫째이자 AA급 각성자였다.
파스콜 가의 타격단인 화이트스완을 이끄는 단주이기도 했다.
“하아. 언제 철이 들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날 여기에 유학 보낼 거냐고.”
“그래서 이곳에 온 게 아니냐.”
“난 학교 다닐 나이 지났잖아. 스물셋이야. 아니, 나이는 그렇다 쳐. AA급 완숙에 있는 날 누가 가르쳐.”
“파천자가 교수를 맡는다고 했다.”
“여기 와서 들어 보니까 아직 정해진 것도 아니라면서.”
“번잡하고 시끄러워서 전 여기가 싫어요.”
왈가닥인 탈리아 파스콜과는 달리.
그녀의 동생인 토비 파스콜은 조심스럽게 아버지인 랭스 파스콜에게 저항했다.
나이는 열아홉이나 성격이 소심해 누나인 탈리아의 뒤에 숨어 있었다.
“내 생각은 변함없다.”
“아빠!”
“너희의 그 이상한 성격을 고칠 만한 곳은 여기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우리 성격이 어때서?”
“탈리아 넌 예의가 없다. 임무를 나가면 즉흥적이라 팀원들에게 피해가 가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해서 자칫 동료를 위험에 빠트린다. 토비는 너무 소심해. AA급 초입이면서 몬스터 하나를 죽이지 못한 각성자가 어디에 있느냐.”
탈리아와 토비가 움찔했다.
두 사람은 모두 AA등급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무 성공률은 50% 미만.
이것도 굉장히 많이 쳐준 것이다.
임무 성공률이 20% 정도라 봐도 무방했다.
명령받고 나갔다 하면 실패.
모두 두 사람의 성격 탓이었다.
등급이 높으면 뭐 하나.
임무를 성공하지 못하는데.
가주의 자식들이 이러니 어디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한다.
두 사람의 성격을 고치지 않는 이상은 짐덩어리였다.
“이 촌 나라가 아니라도 되잖아요!”
“너희의 성격은 못 고친다고 두손 두발 든 사람이 한두 명이어야 말이지.”
랭스 가주는 안 해 본 게 없었다.
자식들이 무려 AA급 각성자다.
탈리아 말대로 누가 가르칠 수 있을까.
예절을 담당한 사람은 적어도 S급은 되어야 했다.
최근 들어서 S등급의 각성자가 나타난 거지.
옛날에는 손가락으로 샐 수 있을 만큼 적었다.
그 때문에 예절 선생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가문의 가솔들은 가주의 자식이라고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
이렇다할 꾸중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예절을 가르치는 건 힘들었다.
싱글대디로 홀로 아이들을 키웠다.
탈리아와 토비의 앞에서만 서면 마음이 약해지니.
아이들의 성격이 저리된 건 자신의 책임도 있었다.
그래서 예절 교육을 가르칠 선생을 찾았는데 두 사람의 성격을 고쳐 보겠다고 장담한 이들이 모두 도망쳤다.
도저히 못 고치겠다고 진저리 치며 나갔다.
특히 첫째 탈리아.
그녀의 성격을 버티지 못하고 일주일 만에 다 나가떨어지니.
랭스로서는 골치였다.
그래서 아이들의 정신을 개조시켜줄 선생을 찾는 것.
파천자가 적임자라 생각했다.
“파천자는 고칠 수 있다고 보세요? 저보다 어려요.”
“어리지만 세계 랭킹 1위이기도 하지. 네가 아무리 덤벼도 꿈쩍하지 않을 거다.”
그가 탈리아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실력에 자부심을 가진 그녀였다.
“흥. 아무리 파천자라도 절 통제할 수 없어요.”
“과연 그럴까?”
랭스가 묘하게 웃었다.
그 속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탈리아와 토비가 모르는 게 있었다.
‘이번에는 너희들도 어쩌지 못할 거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유럽 암흑가를 통해 암흑대제에게 연락을 취했다.
암흑대제는 그 어떤 것도 해결해 주는 해결사.
자잘한 일이라도 그의 마음에 든다면 의뢰를 받았다.
혹시란 생각에 암흑대제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그라면 탈리아와 토비의 성격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그는 서양 최상위 랭커이자 녀석들의 우상.
탈리아와 토비가 암흑대제를 만난다면 지금보다 성격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암흑대제와의 연결은 랜덤.
운이 정말 좋다면 연락이 닿을 것이고 아니라면 무응답이라 여겼다.
한데 그와 연락이 닿은 것이다.
그에게 자신의 시답잖은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해답을 내려 줬다.
[한국의 파천자를 찾아라. 그라면 장담하고 아이들의 성격을 뜯어 고쳐 줄 것이다. 나 암흑대제의 이름을 걸지.]
간략하지만 마음에 확 와닿았다.
암흑대제의 확신에 찬 말.
이걸 듣고 곧바로 한국으로 날아왔다.
한국의 각성자 사관 학교가 개관한다는 소식도 듣기도 했고 말이다.
랭스의 미소에 탈리아가 몸을 휙 돌렸다.
“짜증 나!”
“어디 가느냐.”
“가출할 거야. 토비 나가자.”
“나, 나도?”
토비가 말을 더듬자 탈리아가 그를 노려봤다.
“아, 알았어.”
탈리아와 토비가 호텔 방을 나갔다.
자식이 가출을 선언했는데도 랭스는 걱정하지 않았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잘 감시해.”
-예. 가주님.
탈리아와 토비를 따라 파스콜 가문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 * *
호텔에서 나온 탈리아와 토비는 무작정 길을 걸었다.
한국이 좋은 점은 늦은 밤에도 길거리에 네온사인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아빠는 우리를 못 괴롭혀서 안달인 거야?”
“누나… 여기 너무 시끄러워….”
“절대 아빠 뜻대로는 안 될 거야.”
“그냥 호텔로 돌아가면 안 돼?”
탈리아와 토비는 각자 제 말만 했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언행이 똑같았다.
“누나 돌아가자.”
“시끄러워!”
“소, 소리치지 마.”
탈리아가 버럭하자 토비가 자라목이 됐다.
그러면서도 미아가 될까 봐 탈리아의 옷깃을 꽉 잡았다.
열아홉 살의 나이면서도 아직도 어린 티를 벗어나지 못한 토비였다.
아니, 모성애를 자극하는 얼굴과 행동이랄까.
AA급 초입의 각성자라곤 전혀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러니 랭스 파스콜이 성격을 뜯어고치려는 것이다.
“누나… 어디 가는 거야?”
“나도 몰라. 있을 곳을 찾아보자.”
“응….”
외국인인 탈리아와 토비가 한남동을 걷고 있자 모두가 쳐다봤다.
또렷한 이목구비가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은 어딜 가도 시선이 집중되는 얼굴.
특히 토비는 퇴폐미의 상징이었던 티 모 배우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두 사람의 허리에 검이 없었더라면 일반인으로 오해하고 헌팅이 들어왔을 터.
각성자라 놀라기만 할 뿐 먼저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저들의 시선에 탈리아는 조금 기분이 풀렸다.
당연한 눈빛들이었다.
“여기도 막 그렇게 나쁘진 않네.”
탈리아는 미소를 지은 채 한남동을 걸었다.
네온사인이 사라진 인적이 드문 곳에 들어섰을 때였다.
탈리아의 걸음이 멈췄다.
“몬스터!?”
그녀의 눈에 수십 마리의 몬스터들이 보였다.
“모, 몬읍!”
탈리아가 재빨리 토비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기척을 최대한 줄였다.
“몬스터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어.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 나온 지도 모르면서 한국이 강대국이라니 어이없어.”
그녀가 헛웃음을 지었다.
전 세계가 한국을 인정했다.
그런데 그녀가 본 한국은 아직까지 강대국의 면모를 전혀 보여 주지 않고 있었다.
몬스터가 게이트 밖에서 활개를 치는데 단속국이나 가문의 병력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가출한 자신이 제일 먼저 본 것이다.
“내가 나서서 아빠한테 증명해 보일 거야. 이곳에 있을 필요 없다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