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1화
모든 게 파괴된 서울.
그 하늘에 사신수가 떠 있었다.
[정말 이겼군.]
[마신지체가 이길지는 몰랐다.]
[…….]
[신계의 근심이 풀렸겠어.]
[…….]
그들은 한동안 파천혈신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신계의 걱정거리가 사라졌는데 기분이 묘했다.
마신에 가장 근접했던 인간.
역사상 혈란을 제일 많이 일으킨 인물이었는데….
그 근심이 사라지니 공허함만이 남았다.
[이제 우리의 일은 끝난 건가?]
[그렇지 않나?]
[흠.]
사신수는 앞으로 무엇을 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흑염마조는 신수화를 풀고 작은 모습으로 돌아가 이준의 머리 위로 갔다.
[작은 주인이 울고 있으면 큰 주인이 슬퍼할 것이다. 그만 울어라.]
“흐윽!”
이준은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았다.
하지만 감정이 북받쳤다.
감정을 죽여서 다신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극자 사부만 생각하면 눈물이 흘렀다.
죽으면서까지도 자신만을 생각한 사람이 떠났다.
다신 못 본다는 생각에 울컥했다.
손목으로 입을 막아 보기도 했지만.
울음이 밖으로 새어 나왔다.
흑염마조가 날개로 이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극자와 이준의 관계를 잘 알기에 위로를 건넸다.
[괜찮아.]
파랑이도 곁으로 와서 자기의 볼을 이준의 몸에 비볐다.
두 녀석의 위로에도 이준의 눈물은 하염없이 흘렀다.
애써 울음을 참으려는 모습이 더 애절해 보였다.
[이럴 거면 애초에 정을 주지 말지. 큰 주인은 정말 못된 인간이다.]
차라리 이준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슬퍼하지 않았을 거다.
이준의 사부가 되어 주고.
부모 대신 보호자가 되어 주고.
친구가 없는 그의 말벗이 되어 줬다.
이런 사람을 제 손으로 죽게 만들었으니.
얼마나 죄책감에 사로잡힐까.
미치지 않은 게 용했다.
이준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편.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몸을 떨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대륙 육좌인 그로가였다.
“저, 저 괴, 괴물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는 누군지 몰랐지만 무공을 보고서야 알았다.
파천자와 싸우는 사람이 파천혈신이라는 괴물이라는 것을.
“어떻게… 저, 저런 일이!”
저곳에 있는 사람이 파천혈신이란 사실을 알고 바로 도망치려 했지만 싸움에 매료가 됐다.
악마에게 몸을 바쳤으나 자신도 기사였던 사람이다.
저 싸움을 보지 않고서는 이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이후에 찾아오는 지독한 회의감과 패배감은 어쩌지 못하지만.
“저놈은 내 상대가 아니다.”
그로가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간신히 움직였다.
그의 원래 목적은 이준이었다.
탐욕의 힘으로 이준의 힘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하나 싸움을 보고 알았다.
파천혈신보다 더한 미친놈이 있다는 걸.
잘못 건드렸다가는 뼈도 못 추린다.
아무리 악마의 힘이 있다 해도 무리였다.
오좌 알페인과 칠좌 베네로딕이 죽은 게 이해가 갔다.
저런 실력이라면 악마의 힘으로도 이기지 못한다.
“진정한 칠죄종이 오지 않는 이상, 저놈을 죽이지 못할 거야.”
파천자의 눈에 안 띄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아니면 대륙칠좌의 군단을 전부 모아서 한꺼번에 그를 치든가.
파천혈신을 죽일 실력이라면 이 또한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우선 다른 칠좌부터 부활시켜야겠어.”
대륙칠좌를 전부 탐욕으로 먹으려던 계획을 수정했다.
파천자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 그가 꿈꾸는 마계 입성은 가능하지 않았다.
인계에서의 실적을 인정받아야 고위 악마로 신분이 상승하니.
판을 새로 짜야만 했다.
“널 먹는 건 다음 기회로 미루마.”
파천자가 두렵긴 했지만 순간 희열도 들었다.
그만 먹으면 고위 악마로 올라서는 건 시간문제였으니까 말이다.
* * *
사신수의 도움으로 서울은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무사고도 다시 생겨났다.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탈피한.
새로운 학교가 만들어졌다.
마치 대학교를 연상시켰다.
한민성 이사장이 추진했던 중, 고, 대학을 모두 합친 학교였다.
아직은 겉모습만 다를 뿐.
재학하는 학생들은 모두 똑같았다.
무엇보다 가장 똑같은 곳은 특별 1반이 사용했던 운동장이었다.
이곳은 무림 사관 학교의 보물.
무려 SS급 각성자를 두 명이나 배출한 학급이며.
최소 AA급 각성자가 훈련하던 곳이었다.
의미가 있는 곳을 함부로 탈바꿈시킬 순 없어서 한민성 이사장이 그대로 놔뒀다.
세상이 다시 평화로워지니 활기차게 생활하는 학생들.
한데 특별 1반만은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준이는 아직도 게이트에 틀어박혀 있어?”
“예. 누님.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해 놨습니다.”
박정연의 물음에 허수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준이 자취를 감춘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파천혈신과 싸운 후 그는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지유는?”
“못 만났어요.”
“지안이도 안 만나 줘?”
“네.”
이준과 이지안이 친남매인 걸 아는 사람은 특별 1반에 없었다.
그저 가문 사람이라 유독 챙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지안은 한번 만나 줄 거라 여겼건만 아니었다.
“가을이나 다른 애들도 준이 못 만났지?”
“네.”
퍽-
진경수가 주먹으로 땅을 쳤다.
굉장히 화가 난 얼굴이었다.
“젠장! 난 왜 선생님께 도움이 안 되는 거야!”
“상심이 크실텐데….”
“선생님을 만나 볼 방법이 없을까요?”
특별 1반 학생들이 이준을 걱정하고 있을 때.
그들의 귀로 흑염마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다. 아직은 혼자 두는 게 좋을 듯해.]
그와 동시에 흑염마조가 게이트에서 나와 박정연의 어깨에 앉았다.
아이들에게 간간이 소식을 전해 주러 오는 녀석이었다.
“많이 안 좋아요?”
[사부를 제 손으로 죽였으니 마음이 편할까 식음도 다 끊었다.]
“밥은 먹어야 할 텐데….”
[권유해 봤지만 요지부동이다.]
“언제쯤 괜찮아질까요?”
[본좌도 모르겠다. 이준의 마음에 따라 달라지겠지.]
여전히 사부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에 특별 1반 아이들도 표정이 안 좋아졌다.
이준은 그들의 구심점.
그가 무너져 내리니 아이들 또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이준을 생각하는 마음이 컸다.
[작은 주인이라면 잘 이겨 낼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빨리 돌아오라고 전해 주세요.”
“저 진경수가 선생님을 간절히 생각하고 있다고 말해 주십시오.”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이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너희들도 걱정만 하지 말고 수련이라도 하고 있어라. 너희 꼬라지도 작은 주인과 다를 바 없다.]
흑염마조가 박정연의 어깨를 박차고 하늘로 올라 사라졌다.
그가 보기에 이준과 특별 1반 아이들의 상태는 도긴개긴이었다.
* * *
파랑이는 절대종답게 영역이 사라졌어도 또 다른 곳을 선택할 수 있었다.
4대 성지의 금역과는 환경이 다르긴 하나.
그곳보다 더 좋은 게이트를 영역으로 지정했다.
“늦장 부리는 놈이 있다면 용서치 않을 것이다!”
테구르가 목청을 높이면서 스케먼들을 닦달했다.
로티틸과 샥쿠, 파들락도 건물을 올리는 데 힘을 보탰다.
몬스터들이 가장 먼저 짓는 건물은 바로 혼원문이었다.
이준의 상심을 아는지.
테구르가 가장 먼저 혼원문을 짓자고 몬스터들에게 말했다.
주인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몬스터들이었기에 팔을 걷어붙이고 도왔다.
수천 명의 몬스터가 마력까지 동원하면서 일을 하니.
혼원문은 금세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얼추 비슷하게 완성됐다.
“테구르.”
“넵! 샥쿠 님!”
“이것으로 주인님께서 기분이 풀리시겠나?”
“물론입습죠.”
테구르는 자신했다.
분명 주인이 기뻐할 거라고.
“여긴 주인님과 큰 어른의 추억이 있는 곳입니다요. 저길 보십시오. 주인님께서 혼원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요.”
“그래 보이는군.”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요. 반드시 주인님의 기분을 풀리게 해 드릴 겁니다요.”
“든든하다. 아주 믿음직스러워.”
“헤헤. 감사합니다요. 제가 샥쿠 님의 보금자리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요.”
테구르는 연신 손을 비비며 아부를 했다.
약했던 몬스터 시절의 버릇은 절대 못 고치는 것 같았다.
“우리 샤크로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주인님의 보금자리가 최우선이다.”
“아무렴요. 그리고 제게는 비장의 수가 입습죠 케케.”
테구르가 음흉하게 웃었다.
“찍!”
“찍찍!”
그때 스케먼이 다가와 테구르에게 귓속말을 했다.
테구르의 눈이 번쩍였다.
“정말 다 했어?”
“찍찍!”
“완벽하지? 단 하나의 오차도 있으면 안 돼.”
“찌익!”
스케먼이 가슴을 탕탕치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테구르가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수고했다. 조만간 너희들에게 포상을 내리지.”
“찍!”
스케먼이 테구르에게 절도 있게 경례를 했다.
“무슨 일이지?”
“헤헤. 제가 아까 말한 비장의 수가 완성됐다고 합니다요. 전 주인님께 가 보겠습니다요.”
“그래 수고해.”
테구르가 급히 이준에게 달려갔다.
“우리 샤크로아들도 테구르의 저 충정은 본받아야겠어.”
“주인니이이임!”
테구르의 목소리가 게이트를 떠나가라 울려 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준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멍하니 혼원문만을 보았다.
“주인님. 절 따라와 보십시오.”
“…귀찮아.”
“제가 주인님을 위해 큰 선물을 준비했지 뭡니까요.”
“필요 없어.”
“아휴. 저 안 따라오시면 정말 땅을 치고 후회합니다요.”
“후회할게.”
이준은 만사가 귀찮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큼. 실례하겠습니다요. 애들아, 주인님을 옮겨라.”
“찍!”
“찍찍!”
스케먼들이 이준을 번쩍 들어서 혼원문으로 올라왔다.
그들이 향한 곳은 조사전이었다.
“어떻습니까요? 큰 어르신의 모습이 전보다 생생하지 않습니까요?”
“그렇네.”
무극자가 그려진 그림에 이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전이었다면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을 터.
이것만으로는 이준의 상심이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테구르가 기관을 작동시켰다.
그그극-
무극자의 그림이 위로 올라가면서 벽면에 문이 생겼다.
“설마!?”
이준은 그제서야 감정을 드러냈다.
“헤헤. 들어가 보십시오.”
“어떻게 만든 거야?”
“혹시 몰라서 마력 영상 장치를 따로 만들어 놨습니다요.”
“아.”
정말 뜻밖이었다.
이제는 영영 사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누가 이걸 복원할 생각을 할까.
눈치가 빠른 녀석이 아니었다면 영상 장치를 다시 만들 생각을 못 했으리라.
이준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제자야 왔느냐.]
“사부님….”
녹음된 목소리였다.
그래도 좋았다.
이준이 털썩 자리에 앉았다.
[혼자 청승맞게 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 고금제일인의 제자가 어찌 그리 나약할꼬.]
수백, 수천 번 들은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그리웠다.
[제자 놈아. 이 사부가 우화등선한 게 그리 아니꼬운 게냐.]
괴팍한 늙은이라고.
[끌끌끌. 이 사부를 만나고 싶다면 너도 우화등선할 수 있게 강해지거라. 물론 네게는 백 년도 이르겠지만 말이다.]
다시 들어도 얄미웠다.
자신을 비웃는 게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제자야. 준아.]
목소리만 들리던 사부의 모습이 보였다.
“빌어먹을 사부님아.”
이준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조사전에 와서 매일 봤던 모습이지만 오늘따라 더욱 보고 싶었다.
[사부가 보고 싶으면 이곳으로 언제든 오거라.]
이 말에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흐윽!”
처음 녹음된 영상을 봤을 때는 이렇게 슬프지 않았는데.
자신의 손으로 사부를 죽였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너무 자주 오지는 말고.]
늙은 모습을 한 사부가 웃으면서 마지막 말을 하니.
이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