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9화
찢어진 공간 사이로 태풍이 몰아쳤다.
회색 점으로 된 기류가 회오리치며 힘을 드러냈다.
“큭!”
이준의 입가에서 선혈이 흘러나왔다.
내상을 입은 상태로 무리하게 패천이공을 펼치니 몸에 엄청난 데미지를 입은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원신공을 극성으로 뽑아냈다.
콰아아앙!
사선으로 찢어졌던 공간이 터져 나갔다.
천지를 집어삼키는 굉음과 함께 이준이 각혈을 했다.
“푸우웁!”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무극자의 심검을 맞아 생긴 내상이 생각보다 심각했다.
[작은 주인, 괜찮나?]
이준은 흑염마조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못했다.
들끓는 기혈을 억누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기를 다독이며 파멸겁을 회수하려는 찰나!
손이 먼지를 뚫고 불쑥 튀어나왔다.
“컥.”
이준의 목을 쥔 손의 주인은 다름 아닌 무극자였다.
검게 그을린 피부.
넝마가 된 무복.
헝클어진 머리를 한 그가 무시무시한 안광을 뿜어내며 입을 열었다.
“감히! 내 앞에서 등을 보인단 말이냐! 본좌의 제자라는 놈이!”
그가 지독한 살기를 뿜어냈다.
그의 일갈에 무너진 건물이 모래처럼 흩어졌다.
그것도 모자라 흑염마조가 펼친 결계가 크게 출렁였다.
무극자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크으윽….”
무극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준이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을 쳤으나 불가능했다.
완력이 얼마나 강한지.
저항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상으로 인해 내공이 원활하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본좌가 그렇게 가르쳤더냐.”
“큽!”
“본좌를 실망시킨 대가를 치러야겠다.”
무극자의 왼손에 무형의 창이 생겨났다.
그는 그 무형창을 이준의 허벅지에 꽂아 넣었다.
“아악!”
이준이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무극자는 무심한 눈을 한 채 이준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한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음을 깨닫거라.”
무극자가 몸을 돌렸다.
그가 걸어가는 방향에는 특별 1반 아이들이 있었다.
“크… 안 돼…!”
이준은 무극자 사부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없애려는 것이다.
자신이 저들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여태까지 이를 악물고 달려온 이유가 저기에 있다는 걸 충분히 잘 알기에.
사부의 행동이 어떤 뜻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도망… 쳐어어!”
이준은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려는 피를 삼키며 아이들을 향해 외쳤다.
하지만 저들은 이미 무극자 사부의 영역권 안.
공포에 의해 몸이 움직이지 않을 거다.
이준은 자신의 허벅지에 박혀 있는 무형창을 맨손으로 잡았다.
“크으윽!”
손을 타고 고통이 전해져 왔다.
무형창은 강기의 응집체.
그냥 만졌다가는 손목이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었다.
피로 물든 손.
어떻게든 허벅지에 박힌 무형창을 빼려고 애를 썼다.
사부가 만든 무형창이라 부러트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제발… 윽!”
이준이 무형창을 힘껏 잡아당겼지만 뽑히지 않았다.
창이 허벅지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이걸 빼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한다.
이준이 허벅지에 박힌 창을 빼내려고 하는 사이.
무극자는 흑염마조가 쳐 놓은 결계 앞에 도달했다.
부욱!
무극자가 종잇장 찢듯.
결계를 가볍게 찢어 버렸다.
그 모습이 이준의 눈에 들어오자 더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 * *
“아버님!”
철혈검가의 검왕이 검제 박춘식이 있는 처소로 급하게 달려왔다.
“또 무슨 일이냐.”
박춘식과 괴개 정심호는 이야기를 나누고는 중 있었다.
검왕의 등장에 두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아이들이 게이트 밖으로 나왔습니다.”
“잡혀갔던 아이들이 말이냐?”
박춘식과 정심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애타게 기다리고만 있었다.
직접 구하러 가고 싶었지만 파천자의 말에 가만히 있어야만 했다.
상대는 자신들이 어쩌지 못할 괴물.
그런 자를 상대로 싸우는 건 자살행위였다.
물론 손자와 손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지만 이준을 믿었다.
그가 아이들을 구해 올 거란 믿음.
그래서 이렇게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예.”
“아이들은 어디에 있더냐.”
“무사고에 있습니다.”
“가 보자꾸나. 심호 너도 갈 거지?”
“내 손녀들도 있는데 당연히 가야지.”
“영섭이 넌 다른 가문에도 알리거라.”
“이미 연락을 취했습니다.”
세 사람이 철혈검가를 나서려고 할 때였다.
그들에게 철혈검가의 각성자가 달려왔다.
“가주님! 무사고 쪽에 있는 저희 쪽 정보원이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말하게.”
“무사고 본관 건물에서 폭발이 일어났고 그곳에서 파천자가 나왔다고 합니다.”
각성자의 말에 세 사람이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어서 가자.”
“춘식아.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괴개가 먼저 경공을 펼쳐 철혈검가를 나갔다.
그의 뒤를 만천단이 따랐다.
검제와 검왕도 호위단과 정예 병력을 이끌고 움직였다.
괴개가 처음으로 무사고에 도착했다.
“예나야, 예은아!”
괴개의 부름에도 정예나와 정예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들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할아버지….”
“오지… 마, 마세요.”
괴개가 이상함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파천자가 있다고 들었….’
괴개의 눈이 커졌다.
그토록 강하던 파천자가 쓰러져 있었다.
상체를 간신히 일으켜서 허벅지에 박힌 무형창을 뽑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파천자에게서 시선을 돌린 괴개가 앞을 보았다.
“아무래도 싸워야할 듯싶다.”
“그래야겠지.”
챙-
그 뒤로 도착한 박춘식과 철혈검가의 각성자가 검을 뽑아 들었다.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인지했다.
파천자가 졌다.
그의 기는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원인은 바로 저 젊은 남자.
파천자의 사부란 괴물이 파천자를 저렇게 만든 것 같았다.
“아이들이 무사해서 좋아했는데.”
괴개의 말이 끝나자 다른 가문들의 병력도 속속 나타났다.
“분위기가 왜?”
“아.”
“저 사람은!”
가주들이 무극자를 보자 흠칫했다.
압도적인 위엄을 뿜어내며 게이트에서 등장했던 사람.
파천혈신이란 이명을 지닌 남자가 아이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뒤에는 파천자가 쓰러져 있는 게 가주들의 눈에도 들어왔다.
“맙소사! 파천자께서 저 남자에게 졌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젊은 남자는 이준의 사부이면서 각성자 시스템이 지목한 최종 보스였다.
그것과는 별개로 이준이 저렇게 다쳐 누워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는 활약을 보이던 그였기에.
더욱 경악스러웠다.
“파천자 님!”
“주군!”
모두가 경직된 표정을 하고 있을 때 진병철과 무극단만이 이준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그그그극!
무형의 기운이 땅을 갈라놓았다.
그 기운에 휩쓸린 무극단이 처참하게 죽었다.
원래라면 전원 몰살을 했을 테지만.
“커어억!”
제일 앞에서 달려간 김봉팔로 인해 몰살당하지 않은 것이다.
“운이 좋군. 특이한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본좌의 공격까지 막을 줄은 몰랐구나.”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귀에 무극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큭.”
“어째서!?”
그 목소리가 들린 순간 모두가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검제를 비롯한 몇 명만이 무릎을 굽힌 채였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도 창백했다.
고작 내공이 깃든 목소리만으로.
위세만으로 내기가 울렁거렸다.
그때 억지로 무릎을 편 사람이 있었다.
“제자의 호위대장. 사형준.”
무극단의 단주 사형준이 무극자의 패기에 저항하며 이준에게로 움직였다.
한 발, 한 발.
거북이처럼 느리게 걸어갔다.
“오지… 마…!”
이준은 사형준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위험하다.
이곳으로 오면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
“네 기개를 높이 사서 저 아이들 말고 너에게 벌을 내리마.”
무극자의 신형이 사라졌다.
이에 이준이 소리쳤다.
“사 단주! 도망쳐어어어!”
사형준은 꿋꿋이 이준에게 다가갔다.
그의 직책은 호위단주.
주인을 지키고 모시는 게 그의 본분이었다.
위험에 빠진 주인을 버리고 제 몸을 건사하겠다고 가만히 있는 건.
호위단주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목숨을 버려도 주인을 위해 죽는 것만큼 큰 영광은 없다고 생각한 그였다.
“제가… 곧 가겠습니다, 주군….”
얼마나 힘을 주고 움직이는지.
사형준의 얼굴과 목에 굵은 힘줄이 툭툭 튀어 나와 있었다.
다시 한 발 움직이려는데 무극자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너를 좀 이용해야겠다.”
무극자가 사형준의 오른팔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뜯어 버렸다.
“컥!”
사형준이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무극자의 손이 반대편 팔로 움직이자 이준이 소리쳤다.
“그마아아안!”
이준의 외침에 무극자가 동작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이준의 안광이 번쩍였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회색 아지랑이들.
그전과는 차원이 다른 살기였다.
무극자도 피부가 저릿할 정도로 강력했다.
“진작부터 그랬어야지. 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동작을 멈췄던 무극자가 사형준의 반대편 팔이 아닌 심장을 노렸다.
이준을 더 자극했다.
그 순간 이준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무극자의 지근거리에서 나타났다.
* * *
쾅!
이준의 주먹에 무극자가 뒤로 쭉 밀려났다.
일반적인 주먹이 아니었다.
무극기가 둘러진 주먹.
권강이되, 권강보다 두, 세차원 높은 힘이 든 주먹이었다.
이준은 곧바로 사형준을 지혈했다.
“미안하다.”
“아닙 크으… 니다.”
이준의 눈동자에는 감정이라곤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음성도 고저가 없었다.
목소리가 잔뜩 메말라 있달까.
예전 이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흑염마조. 결계 단단히 쳐. 너 혼자 힘들다면 다른 신수를 불러와.”
흑염마조는 자존심이 무척 상했으나 이준의 말이 옳았다.
드디어 마신지체가 완전히 깨어났다.
또 다른 재앙이 눈을 떴으니.
혼자만으로 두 재앙의 싸움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흑염마조가 본래의 크기로 돌아가서 성화를 태우자.
서쪽에서 새하얀 털을 지닌 백호가 나타났다.
동쪽에서는 청룡이, 마지막으로 북쪽에서 현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약속이 지켜질 때인가.]
[…….]
[지켜보지. 너희들의 싸움을.]
이준의 말을 계속 듣고 있었던 것처럼 사신수가 나타나 막강한 결계를 쳤다.
이 공간에는 이준과 무극자만이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이준은 파멸겁을.
무극자는 무형의 창을 힘껏 휘둘렀다.
쿵!
두 개의 창이 움직일 때마다 무극기와 파천멸기도 같이 움직였다.
이전의 싸움에선 시간이 지날수록 파천멸기가 무극기보다 우위에 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무극기가 파천멸기의 목덜미를 물고 놔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수십 합을 교차하고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쿵!
파멸겁이 무극자의 옆구리에 상처를 냈다.
이에 질세라 무형창은 이준의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서서히 상처가 늘어나는 두 사람이었다.
쾅!
이준이 무극자의 주먹에 맞아 뒤로 처박혔으나.
그는 곧바로 일어나 무극자에게 다시 쇄도했다.
두 사람은 파멸겁과 무형창 말고도 진천무로 싸우기도 했다.
풍살, 적익, 무옥 등.
똑같은 무공이 교차했다.
이준이 무극군림보의 멸을 사용하면 무극자 또한 무극군림보의 마지막 걸음을 선보였다.
서로 무공을 사용해 싸울수록 상처는 깊어만 갔다.
“좋군.”
무극자가 그 어느 때보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토록 오랫동안.
동수를 이루고 싸운 게 얼마 만인가.
긴장을 지닌 채 다음은 어떤 공격을 가해야 하는지 생각해야만 했다.
처음 무공을 배웠을 때의 느낌이었다.
“이것도 받을 수 있으면 널 인정해 주마.”
파천멸기의 아지랑이가 무극자의 팔과 다리를 감쌌다.
하얀 피부가 검은 실선들로 가득해졌다.
그가 단전 부위로 두 손을 모으자 검은 기류가 요동치며 몰려들었다.
파천멸기의 결정체.
하늘마저 부술 수 있는 힘이 무극자의 손에 흘러들어왔다.
“천살.”
무극자의 최후 심득이 들어간, 미완성의 무공인 패천삼공인 천살이 펼쳐졌다.
세상을 무너트릴 듯한 마기가 주위로 퍼졌다.
이에 이준도 심득만을 얻었던 천살을 사용했다.
후웅-
무극자와는 달리.
회색 기운이 조용하게 서서히 회오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