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6화
무사고에 쳐진 결계를 향해 몬스터가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조용석과 웨어파드의 활약도 잠시.
지금은 마벽 모두가 무사고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내공과 마력이 무한하지 않아 정비를 하러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쿵쿵쿵!
몬스터들이 연신 결계에 부딪혀 왔다.
“끝이 없어.”
“죽여도 죽여도 또 생겨나는 것 같소.”
“아직까지는 결계로 인해 버티고 있지만 지금처럼 결계가 계속 공격당했다간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뇌마 홍엽상이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시야가 안 보이니 몬스터는 소리를 통해서 방향을 잡았다.
동료의 부름에.
공격이나 비명소리에.
방향을 찾아 움직였다.
“내공은 어때?”
“아직 삼 분의 일도 채워지지 않았소.”
“나도 그렇긴 한데 나가 봐야 할 듯싶다.”
살마 조민석의 대답에 혈마 류한길이 결계 너머를 보며 말했다.
우려했던 대로 결계에 금이 가 있었다.
언제 생겨난 지 모를 균열.
결계가 계속 공격받는다면 금이 난 곳은 더 커질 것이다.
“아버지. 제가 다시 나가 보겠습니다.”
조용석이 세 가주에게 다가왔다.
“저도 나갈게요. 어느 정도 회복했어요.”
류가을도 나섰다.
이에 홍원찬이 마지막으로 합류했다.
“전 방어진을 세워 볼게요.”
“이제 갓 들어왔으면서 또 나간다니. 무리다.”
홍엽상이 이를 반대했다.
1시간이라도 쉬었으면 다행.
무사고로 들어온 지 30분도 되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운기를 한다 해도 내공을 얼마 회복하지 못했을 터다.
그런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낸다는 건 죽으러 가라고 등을 떠미는 것과 다름없었다.
“뇌마의 말이 옳아. 너희가 나간다 해도 전세는 변하지 않는다. 차라리 조금 더 휴식을 취한 후 다 함께 맞서 싸우는 게 낫다.”
“이러다가 결계가 깨지면 더 위험해요.”
“알고 있…!?”
쾅-
류한길이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굉음이 난 곳을 바라보자 몬스터 사이를 누비는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요령요화?”
“그녀가 한국에는 왜!?”
“홍 비대는 비선에게 들은 게 있나?”
“아직 들려온 소식은 없습니다.”
홍엽상이 뇌전홍가의 정보대주에게 물었지만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면 저 여자는 어떻게?”
마벽의 세 가주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검기를 뿌려 대자 몬스터들이 다가가지 못하고 죽는 게 아닌가.
블랙급 몬스터를 단 일격에 죽이는 경이로운 무력.
화려한 검술도 아니었다.
오히려 표독하고 악독해 보였다.
청순하게 생긴 것과는 달리 입도 험했다.
“이 잡것들이 감히 내 원피스를 건드려?”
“뒈졌!”
“호호호. 나 은서단을 누가 막는단 말이냐. 버러지들인 너희는 내 발밑을 기는 게 옳다.”
손을 움직여 몬스터의 머리통을 잡아 으깼다.
손톱을 세워 몬스터를 조각냈다.
손톱에 피와 살점이 붙어 있자.
“더러운 종자들이 본녀를 짜증 나게 하구나!”
몬스터를 죽인 그녀가 도리어 화를 냈다.
그녀가 하늘 위로 솟구치며 요기를 발산했다.
화아아악-
요기에 반응한 몬스터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더러운 종들아. 저 잡것들을 죽여 본녀를 기쁘게 해 주거라.]
미야와키 칸나.
아니, 칸나의 몸에 빙의한 요화 은서단이 내공을 담아 외쳤다.
은서단의 요기에 잡아 먹힌 몬스터들이 제 동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호호호호. 참 보기 좋구나. 그래, 서로 죽고 죽이거라.”
그녀가 서로 싸우는 몬스터 사이를 유유히 걸어갔다.
무사고 앞에 선 그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결계?”
손을 뻗으니 강력한 전류가 흘렀다.
“여태껏 이까짓 걸로 막고 있었어?”
그녀가 양손을 사용해서 좌우로 찢자.
결계의 틈이 벌어졌다.
그녀는 그 사이를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요령요화 아니오.”
“저번에 봤던 머저리….”
[여기선 제가 할게요.]
그녀의 눈에서 요기가 사라졌다.
은서단이 빙의를 푼 것이다.
[이년아. 한참 재밌었다고.]
오랜만에 빙의해서 요기를 한껏 발산했는데 내면으로 들어가라고 하니 좋겠나.
불만은 있었지만 미야와키 칸나와 공존을 해야 하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있다가 재미 보세요.’
[약속 꼭 지켜.]
미야와키 칸나로 돌아온 그녀가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은서단이 빙의하자마자 옷이 답답하다고 가슴 앞 단추를 풀어 놓은 탓이었다.
가슴골이 다 드러날 정도로.
빙의가 풀리니 예의를 차리기 위해 손을 가슴에 얹은 거다.
은서단이었다면 드러내 놓고 이야기를 했을 터.
그녀는 남들의 시선을 즐기는 요화였으니까.
“오랜만에 뵈어요.”
분위기가 갑작스럽게 바뀌었다.
정말 다소곳하지 않나.
색기가 흐르던 사람이 어느새 정숙해졌다.
많은 일을 겪었던 류한길도 당황해 두 가주에게 전음을 보냈다.
[일본에서도 이랬었지?]
[이중인격자 같긴 했소.]
[파천자 말로는 요화의 무공 때문에 그렇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세 사람은 미야와키 칸나의 몸에 은서단이 빙의한지 모른다.
이 사실을 아는 건 칸나의 엄마인 요코와 이준뿐이었다.
모두가 그녀의 무공으로 인해 인격이 바뀌는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 확 바뀌니까 무섭군.]
[동감이오.]
[기분 나빠할 수 있으니 모른 척해야 합니다.]
“크흠. 여긴 어떻게 오셨소?”
혈마의 물음에 차분히 답하는 미야와키 칸나였다.
“한국이 위험에 빠졌다고 해서 왔어요. 안 늦어서 다행이에요.”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주변 각성자들이 반응했다.
몽롱한 눈빛을 한 채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와, 돌았다.”
“선녀가 따로 없습니다.”
“많은 여자를 봤지만 저렇게 매력적인 사람은 처음이에요.”
“세상에는 다양한 미녀가 많은 것 같아.”
“인정합니다.”
각성자들은 미야와키 칸나를 보며 침을 질질 흘렸다.
그녀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요기도 한몫했지만.
원래부터 미인이기도 했다.
‘대단한 요기다.’
류한길도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또한 그녀의 요기로 인해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봄바람이 살랑이는 것처럼 가슴을 간지럽혔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재차 고개를 숙였다.
“도움을 주러 미야와키 가주께서 손수 오셨다니, 한국을 대표에서 감사드리오.”
“별말씀을요. 도움을 줄 수 있어서 기뻐요. 그런데… 이준 사마는….”
미야와키 칸나가 류한길에게 물어보려는 찰나!
은서단의 귀에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직 은서단에게만 들렸다.
[세상에! 천주가 이렇게 가까이 있었다니!]
‘무슨 말이에요?’
[네가 애타게 보고 싶어 하는 이준이 지금 천주와 같이 있어!]
이곳으로 오는 동안 천주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이준의 기운 또한 없었다.
아무래도 어떤 결계 안에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금은 그 결계가 깨져서 두 사람의 기운이 느껴지는 걸 테고.
* * *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건가.]
흑염마조가 진무열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 모든 게 큰 주인의 그림.
큰 주인에게 진무열은 그저 하나의 장기짝에 불과했다.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천하제일인이 되었을 건데, 하필 큰 주인의 시대에 살았어.]
진무열 정도의 천재면 무림 역사에 길이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운이 나쁘게도 파천혈신이란, 신도 두려워하는 괴물이 사는 시대에 태어났다.
진무열로서는 최악.
평생을 파천혈신의 그림자 속에 살아야 했다.
[이 모든 게 부모를 잘못 만난 업보다. 원수의 손자로 태어나지 않았어도 이런 고통은 겪지 않았을 텐데….]
진무열의 할아버지는 무림맹의 맹주였던 백무생이었다.
백무생은 아들의 결혼 상대에게 음심을 품게 됐다.
실종됐던 마교 제일의 꽃인 주경아가 무림맹에 모습을 드러내자 첫눈에 반한 것.
나이 차이가 많았음에도.
아들의 여자였음에도.
주경아의 미모에 홀려 음심을 품게 됐다.
결국 백무생은 주경아를 간계로 차지해 버렸다.
여기서 일이 터진 거다.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지 단 1년 만에 무림 백 대 고수를 차례차례 꺾어 버린 초고수.
강호인들이 무신이라 칭송한 사람이 바로 주경아의 정인이었다.
백무생은 그 무신의 역린을 건드렸다.
절대 건드려선 안 될 자를 건드리고 만 것.
그 때문에 목숨까지 잃게 됐고 무림맹은 무신의 손에 갈기갈기 찢겼다.
진무열은 인간 같지도 않았던 할아버지의 업보를 대신해서 달게 받고 있는 거였다.
[한편으로는 저 개 같은 운명이 안타깝기도 하군.]
평생을 이인자로 살아가다 가는 삶.
마지막까지 장기짝으로서 생을 불태우고 있었다.
쿵!
쿵쿵!
이준의 주먹과 진무열의 역룡도가 격렬하게 부딪혔다.
무극기와 파천멸기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를 물어뜯었다.
두 사람은 상처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상처가 나면 나는 대로.
오로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살수를 휘둘렀다.
“더! 더 해 보란 말이다!”
진무열은 이준을 몰아붙이면서 일갈을 터트렸다.
그동안에 쌓였던 분노를 이준에게 터트리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나 억울했는지.
그의 행동에서 감정이 물신 묻어 나오고 있었다.
서걱-
무극기가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극심한 화상을 입었다.
피부가 흉물스럽게 변했다.
곧 살에서 진물이 흘렀지만 그는 고통을 참은 채 역룡도를 꿋꿋이 휘둘렀다.
“이 정도의 실력 가지고는 어림없다!”
그는 방어를 도외시한 채.
공격 일변도로만 나갔다.
공격을 극대화.
한 번이라면 맞으면 치명상을 받을 만한 경력이 담겨 있었다.
하늘을 쪼갤 듯한 기세가 도에서 흘러 나왔다.
역룡도가 이준을 간발의 차이로 스쳐 지나간 순간.
퍼벅퍽퍽-
무극기의 아지랑이가 가시가 되어 진무열의 몸을 꿰뚫었다.
공격 일변도로만 나갔던 결과였다.
진무열은 역룡도로 무극기를 잘라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무극기의 가시는 자아를 가진 것인 양.
한 줄기, 한 줄기가 살아 움직이면서 사방에서 그를 덮쳐갔다.
“큭!”
드디어 균형이 깨졌다.
진무열의 폭주로 인한 막상막하의 싸움.
드래곤 하트를 먹은 이준과 치열하게 격전을 벌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하늘은 이준의 손을 들어 줬다.
체력과 내공이 떨어진 진무열의 상처는 치명적이었다.
몸이 꿰뚫려서 저항이 약해졌다.
‘기회다.’
이준의 눈에 진무열의 틈이 보였다.
단 한 방에 무너트려야 했다.
아니면 또다시 일어설 거다.
진무열의 정신력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테니까.
혼원신공을 운용하자.
양손에 기류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공간을 일그러트리는 강맹한 기운이었다.
그 기운이 정점에 이르렀다.
“무공.”
이준의 입에서 짧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세상이 빛으로 감싸였다.
무.
오직 하얀 빛뿐.
색이 사라졌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잃었던 색이 돌아오자.
푸확!
진무열의 전신 모공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쿨럭!”
흑염마조가 친, 그토록 견고하던 결계 또한 산산이 부서졌다.
“후욱….”
이준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무극자 사부의 최종 오의.
패천기공의 일공인 무공이었다.
서 있는 것조차 힘든 상황.
드래곤 하트를 먹었음에도 내공과 마력이 버티질 못하고 전부 빠져나갔다.
일공이 이럴진대 이공인 진천은 쓰는 게 가능할까.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우선 잡념을 떨쳐 냈다.
진무열은 무공에 맞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
떨리는 손을 억지로 움직여 무극기를 내보냈다.
무극기는 진무열의 손과 발을 묶었다.
뒤늦게 발버둥 치지만.
“소용 후우우… 없어요.”
무극기가 진무열을 놓아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무극기는 파천멸기까지 흡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무열은 어떻게든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역룡도를 놓을 법도 하나 죽어도 무기는 놓지 않았다.
“정신력 하나는 끝내주네요.”
패천기공의 일공을 정통으로 맞고도 끝까지 저항하는 진무열.
패천기공의 숙련도가 낮기도 했지만 진무열의 의지가 더 대단했다.
“제가 이긴 것 같은데. 해 주시려던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이준이 진무열의 앞에 털썩 앉아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진무열이 입을 열었을 때 느꼈던 찜찜함을 풀어볼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