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6화
이준의 모진 말은 사신가 가솔들의 가슴을 후벼팠다.
“크윽.”
“젠장!”
“빌어먹을.”
이준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준에게 짐 덩어리나 마찬가지의 존재.
만약 천주가 이 사실을 알고 흔든다면 이준은 쉽게 무너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솔들은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으니까.
이준은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를 해 왔다.
그래서 대적이 나타나면 언제나 홀로, 먼저 움직였다.
호위들도 모두 놔둔 채 말이다.
지금도 모진 말을 하는 건 자신들을 떼어 놓기 위해서였다.
“제발 가주님.”
“저희를 떼어 놓지 말아 주십시오.”
“함께 싸우겠습니다!”
이 사실을 알기에 가솔들은 항명했다.
허나, 이준은 가솔들의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항명은 불가하다 했어요.”
“가….”
“현무각주!”
이준이 이의태를 불렀다.
“가솔들을 이끌고 오대 가문과 마벽에 합류하세요.”
그의 단호한 눈빛에 이의태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가주의 명을 받듭니다.”
“안 됩니다! 현무각주님!”
“가주님을 놔두고 갈 수는….”
“가주님의 명이시네. 빨리 움직이세.”
사신가 최고 어른의 말이었다.
이의태 산하에 있는 현무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호각 또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주작각과 청룡각도 머뭇거리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무극단은 뭐 하는가. 가주님의 명을 받드시게!”
이의태의 외침에도 무극단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준이 사형준의 이름을 불렀다.
“사 단주.”
“무극단은 주군을 호위하는 부대입니다.”
“내 발목을 잡는 단체는 아니지.”
“…….”
“무극단이 존재하는 이유는 날 호위하는 것 말고도 더 있을 텐데. 김봉팔. 네가 말해 봐. 무극단이 존재하는 이유는 뭐지?”
이준의 시선이 김봉팔에게 옮겨졌다.
김봉팔은 침울한 표정으로 질문에 답했다.
“주군의 호위를 제외하면 무극단이 최우선으로 해야 할 건 사신가를 보호하는 겁니다.”
“가솔들이 죽지 않게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 피해가 크면 모든 탓은 너희 무극단이 무능해서야. 알겠어?”
“예…. 주군. 가십시다. 단주.”
항명의 여지를 완전히 꺾어버렸다.
더는 고집을 피울 명분이 없었다.
무극단이 존재하는 이유를 들먹이니 어쩌겠나.
이준의 명을 수행할 수밖에.
그들이 무거운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럼에도 사형준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계속 항명할 건가, 사 단주? 가주인 내 말이 우습나 보네.”
이준의 몸에서 무지막지한 마기가 뿜어졌다.
절로 무릎이 굽혀지는 기세였다.
철벽같이 서 있던 사형준의 두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목에 핏대가 섰다.
“…이번만… 입니다.”
이준은 사형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다음에는 절대… 주군의 곁을 떠나지 않겠… 습니다.”
사형준이 이를 악물고 결연하게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무극단의 존재 이유는 가주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주인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야말로 무한한 영광이자 명예였다.
그런데 마지막 전쟁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
주인은 또 혼자 싸운다고 하니.
무극단이 왜 존재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답해 주십시…오….”
사형준은 이준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다짐을 확답받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다음 기회가 있다면.”
이준이 기세를 풀었다.
공기를 찍어 누르던 마기가 사라졌다.
사형준이 힘겹게 무릎을 폈다.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무극단. 주군의 명을 받듭니다.”
“가주의 명을 받듭니다.”
무극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결연한 음성들.
그들은 오늘 일을 두고두고 생각할 것이다.
가주를 보필하는 단체가 능력이 되지 않아 같이 싸우지 못했던 날로 말이다.
“몸조심해.”
이준은 그 말을 하고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인사를 나누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가자.”
사형준이 경공을 펼치자 무극단이 그 뒤를 따랐다.
“타이밍 기가 막히네.”
무극단이 사라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이 보였다.
흑룡포 자락을 휘날리며 걸어오는 중년인.
전생에 딱 한 번.
얼굴을 보았던 천주가 걸어오고 있었다.
* * *
천주는 북한의 개성을 통과해 한국 땅을 밟았다.
그러던 그때.
화아악-
멀리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파천멸기. 아니, 무극기인가.”
파천혈신이 말년에 만든 무공이었다.
파천멸기보다 상위 호환의 무공.
대성한다면 신에게도 대적할 수 있는 신공이었다.
“가까운 곳에 있었군.”
팟-
진무열이 땅을 박찼다.
미끄러지듯 신형이 앞으로 쭉 나갔다.
백마존도 경공의 속도를 높이며 따라붙었다.
검은 점이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는 경공을 멈추고 걸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려.
이준의 첫인상이었다.
약관(20세)도 되지 않다니.
어미 배 속에서부터 무공을 익혔다 해도 될까 말까 한 경지에 올랐다는 게 신기했다.
“저 정도면 천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인데.”
굉장히 후한 평가에 일마존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정도입니까?”
“장로들이 멋대로 움직였다면 큰 피해를 입을 뻔했어.”
천주의 평가였다.
그의 말은 언제나 옳았다.
그는 굉장히 직관적이었으며 정확했다.
나이가 어린 상대라도 내려치는 경우가 없었다.
천주가 신마회를 만들어 100년을 넘게 군림했던 이유였다.
상대가 어떻든 간에 얕보지 않았으니까.
진무열의 걸음이 멈췄다.
청년과의 거리는 10m 정도였다.
“몇 살이냐.”
진무열은 청년에게 대뜸 물었다.
“열아홉이요.”
“실제로 들으니 좀 충격이군. 사부의 무공은 언제부터 배웠느냐.”
“절 잘 아는 듯하네요.”
“귀가 따갑게 들었지.”
“무공은 어렸을 때부터 배웠지만, 정식으로 수련한 건 열여덟 살이겠네요.”
“일 년!?”
진무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동요였다.
‘고작 1년밖에 안 됐다고? 각성자 시스템이란 게 있다 하더라도 불가능하다.’
진무열은 이 세계에 관한 내용을 아주 상세히 알았다.
천외천이 보내온 정보와 어느 순간 뜬 각성자 시스템 덕분이었다.
각성자 시스템으로 인해 무공을 간편하고 쉽게 익힐 수 있다는 것도 인지했다.
하지만!
정식으로 수련한 시간이 1년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파천혈신의 무공은 각성자 시스템의 도움이 있다 하더라도 익히는 게 까다로웠다.
워낙 조건이 극악에 가까워 자신 또한 자연경에 오르는데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렸지 않았던가.
이토록 대단한 각성자 시스템이 있는데도 오랜 시간을 소비했다.
한데 이준이란 놈은 1년밖에 안 걸렸단다.
앞으로 시간이 지난다면 어떻게 될까.
또 한 명의 파천혈신이 탄생할 것이다.
‘하늘이 내린 천재인가. 그러니 사부가 무림이 아닌 다른 곳에서 전인을 찾을 걸 수도.’
물론 진무열은 이준이 혼원신공이란 희대의 신공을 익혔다는 것까진 몰랐다.
혼원신공은 하늘 아래에 오직 무극자와 이준만이 아는 무공이었으니까.
“위험한 놈이군.”
“천주 대사형이 더 위험한 놈이죠.”
“사형?”
천주의 이마에 내 천 자가 그려졌다.
상당히 거슬리는 표현이었다.
“제가 무극자, 아니 파천혈신의 막내 제자니까 당신은 대사형이 되죠.”
“닥쳐라! 어디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종이 감히 나와 맞먹으려는 것이냐.”
천주가 호통쳤다.
일갈을 했을 뿐인데 주변의 빌딩들이 터지며 먼지가 되었다.
그럼에도 이준은 개의치 않고 도발했다.
“아차차. 제가 실수했네요. 대사형이라고 부르면 안 되겠구나. 사부가 인정한 제자는 저 하나니까 말이죠.”
이준의 말은 천주의 역린이었다.
절대 건드려선 안 되는 부분.
이준을 죽이겠다고 한 것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은 파천혈신에게 본때를 보여 주기 위한 것도 있었다.
“이, 이!”
이준의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형제가 아니라 당신은 사부의 종복이나 다름없으니 제가 당신에게 작은 주인이 되겠네요.”
“네 주둥이를 찢어 버리고 말겠다!”
언제나 이성을 유지하고 상대를 얕보지 않았던 천주가.
애송이인 이준의 도발에 잔뜩 흥분했다.
스스스스-
그의 몸에서 파천멸기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진무열이 당장이라도 공격하려 하자.
“잠깐! 제 말 안 끝났어요. 아직 보여 줄 게 있어요.”
“필요 없다!”
“안 보면 후회할 텐데? 이걸 보면 깜짝 놀랄걸요?”
“네놈의 사지를 자르고 나서도 늦지 않다.”
그가 이준에게 쇄도했다.
“성격 참 급하네.”
이준의 말이 끝났다.
그리고 그와 이준 사이에 게이트가 열리고, 그곳에서 독수리가 나타났다.
“흑염마조!?”
진무열의 눈이 크게 떠졌다.
흑염마조는 파천혈신의 상징이었다.
흑염마조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진무열의 주먹엔 파천멸기의 권강이 맺혀 있었다.
거두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
파천멸기의 권강이 흑염마조를 강타했다.
[본좌를 늦게… 감히 어떤 놈이!]
쾅!
흑염마조가 성화로 몸을 감쌌다.
성화와 파천멸기는 극상성.
성화의 보호막이 파천멸기를 튕겨 내었다.
진무열이 뒤로 멀찍이 물러났다.
[종놈?]
* * *
“흐, 흑염마조가 나타났어!”
“그분이 살아 있는 거 아니오?”
“당치 않은 소리! 그분은 분명 천주의 손에 죽었소.”
“그런데 어찌 흑염마조가 이곳에 있단 말이오!”
백마존이 당황해했다.
진무열도 흑염마조를 보고 놀랐는데 백마존이라고 안 놀랄까.
무림에는 아직까지도 파천혈신의 공포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는 죽어서도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두려움의 대상으로 자리했다.
그런데 그의 상징인 흑염마조가 나타났으니.
굉장히 혼란스러운 거다.
“그분이 사라질 때 흑염마조도 사라졌소. 이곳에 저 재앙의 새가 나타났다는 건….”
“괴물이 살아 있다는 걸 말하고 싶나?”
“그, 그렇소.”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으음….”
서열이 낮은 이들부터 공포에 휩싸였다.
그 전염병은 서서히 퍼져갔다.
파천혈신이 나타날 거라는 두려움이었다.
“그분이 강림하면… 우린 모두 죽은 모습이오.”
백마존은 파천혈신의 암살에 가담했으니까.
“조용!”
진무열이 내공을 담아 외쳤다.
소란스럽던 백마존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파천혈신은 이곳에 없다!”
금지에 스스로 몸을 가뒀는데 이 세계에 나타날 리가 있나.
‘사부는 날 이 녀석의 먹이로 던져 줬다. 내가 죽기 전에는 절대 금지에서 나오지 않아.’
파천혈신의 진정한 계획은 그가 정한 전인을 키우는 거다.
인주가 그 첫 번째 먹이였고, 두 번째가 지주였다.
그리고 마지막이 천주 자신이었다.
전인의 먹이면서 시련이자, 관문.
그게 사제들과 자신의 역할이었다.
만약 자신이 이준이란 놈을 죽인다면 파천혈신의 무공을 차지할 수 있게 된다.
그게 사부란 작자와의 계약 조건이었다.
‘그보다 그 늙은 여우는 내게 온전한 무공을 전수해 줄 생각 따위는 애초에 없었구나.’
진무열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흑염마조가 증거였다.
파천멸기보다 상위 무공인 무극기.
그보다 더한.
무림 역사상 전무후무한.
신살의 무공인 패천기공에는 흑염마조가 필요했다.
흑염마조는 패천기공의 부작용을 어느 정도 잡아 주는 역할을 했으니까.
흑염마조가 곁에 없다면 파천혈신의 최후 무공을 익힐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한다.
금지에 있던 파천혈신의 말이었다.
‘저 애송이한테 모든 걸 걸었다니.’
뿌득.
그토록 평생을 보필했건만.
돌아온 건 냉대뿐이었다.
더 충격인 건.
[종놈?]
흑염마조의 음성이었다.
진무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흑염마조가 어떤 말을 하고 생각하는지 몰랐던 진무열은 이 세계에 넘어와서 녀석의 마음을 처음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날 그리 생각했단 말이냐.”
진무열의 몸에서 진득하고 강렬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흥분이 머리끝까지 차오르자 되려 이성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연경에 오른 무인이 흘린 파천멸기가 주변을 장악해 갔다.
“제대로 도발했네.”
이준도 무극기를 극성으로 운용했다.
파천멸기에 맞설 수 있는 기운은 오직 혼원신공의 무극기뿐이었다.
“어디 그 잘난 실력을 보여 봐라.”
쾅-
진무열의 파천멸기가 채찍이 되어 이준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