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2화
진무열이 게이트에서 넘어오기 몇 시간 전.
천산 산맥 한 자락에 위치한 역천진에서 여섯 개의 불꽃이 피었다.
다섯 개가 생기고 곧바로 여섯 개가 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역천진이 발동했다고?”
“예 아버지.”
천산, 신교로 돌아온 진무열이 몸을 돌려 역천진이 펼쳐진 곳으로 향했다.
그가 움직이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수많은 인원이 뒤를 따랐다.
역천진 한가운데에는 포탈이 떠 있었다.
“드디어 이날이 다가왔군.”
진무열이 게이트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의 눈앞에 아들인 진운기와 손자, 손녀, 그리고 증손자의 아들인 현손까지.
신교의 마인들이 전부 나와 있었다.
진무열이 진운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운기야.”
“말씀하십시오.”
“이 아비가 네게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저희 집안의 뿌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한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제 아들부터 손자까지도 뿌리에 대해 어렸을 적부터 가르쳤습니다.”
“잘했다.”
진무열은 아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언제나 근엄하고, 위엄 넘치는 신교의 주인.
현 무림의 지배자이자 천하제일인 사람이 따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잊지 말거라. 운기 너는 무황 백무생의 증손자이자 군룡검 백자운의 손자다. 전 무림을 통틀어 무림맹과 신교의 핏줄을 동시에 타고난 사람은 너 하나뿐이다.”
무황 백자운.
한때 무림 최고의 고수라 평가받았던 무인이었다.
그는 무림맹의 맹주였으며 화산파 장문인의 사제이기도 했다.
“뼛속까지 새기고 있겠습니다.”
“내 대에서 악연은 끊어질 것이다.내가 사라지면 봉문하거라. 그리고 이곳에는 얼씬도 하면 안 된다. 알겠느냐.”
진무열이 말한 악연은 하나.
제 핏줄에 관한 것이었다.
무황인 할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버지인 백자운이 어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파천혈신이라는 괴물의 눈에 띄게 됐는지를 말이다.
진무열은 그동안 이 사실을 꽁꽁 숨겨 왔다.
무려 12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말이다.
파천혈신은 원수이자 스승.
힘없이 쓰러지기만을 기다렸는데, 파천혈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져만 갔다.
산공독을 대량으로 사용해 내공을 봉인하고 사제들과 합심해서 혈신을 공격했지만, 괜히 고금제일인이라 불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분노해서 손을 쓰려 했다면 사제들과 자신은 모두 죽었으리라.
그만큼 그는 전율스럽게 강했다.
그 괴물은 살수를 펼치던 중 손을 거두고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어째서일까.
자신들을 충분히 죽일 수 있음에도 살수를 거둔 이유가 뭘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낙신곡을 샅샅이 뒤졌으나 괴물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매일 불안감에 떨며 살고 있을 때.
그가 밤늦게 찾아왔다.
신교의 철통같은 경계를 뚫고.
그를 보자마자 몸이 떨려 왔었다.
너무 두려웠다.
그를 공격할 때 자기도 모르게 화산의 힘을 담았으니까.
그걸 못 알아챌 사람이 아니었다.
그를 보자 무릎을 꿇고 고개를 땅에 처박아야 했다.
절로 몸을 움츠리게 하는 위엄.
그의 처우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던 그때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자기를 낙신곡에 가두라나.
너무 놀라 재차 물었지만 그는 그 어떤 말도 해 주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추측할 만한 건 그의 저주받은 신체였다.
역천마신지체.
마신지체와는 다른, 반쪽짜리 신체였다.
마신지체는 인간이 신의 반열에 오르게 해 주는 천고의 신체였다.
오직, 신마에 오를 인간만이 타고나는 신체.
반면 역천마신지체는 반쪽짜리 신체라 할 수 있었다.
이 또한 신의 경지에 오르게 할 만한 신체였으나.
문제는 강해질수록 세상을 파멸로 물드는 악귀가 된다 했다.
강함을 얻고 마에 삼켜지는 운명.
역천마신지체를 타고난 사람의 숙명이라 들었다.
파천혈신도 이 때문에 자신을 가두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해결할 방법이 있을 때까지 말이다.
‘내 생각이 맞긴 했지. 그 해결법을 다른 곳에서 찾을 줄은 몰랐지만.’
진무열의 눈에는 신기한 창들이 여럿 떠 있었다.
역천진의 게이트에 손을 넣은 순간 얻게 된 능력.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으나 차차 적응했다.
그리고 이어진 경악.
이 상태창이라면 파천혈신과의 모든 악연을 끊을 수 있겠다 싶었다.
파천혈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지금까지 일을 진행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면 낙신곡에서 보았듯.
파천혈신이 예전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사부를 게이트 너머로 끌어들인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무림에는 파천혈신이란 희대의 무인이 사라지게 될 터.
그러면 자신처럼 자손들은 숨을 죽일 필요가 없었다.
자식들에게 80년은 넘게 자숙하라고 했던 이유였다.
자식들에게 이유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파천혈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면 뭐 하나.
해결할 방법이 없는데.
자신도 못 이기는데 자식들이 전부 달려든다고 파천혈신을 이길 리 만무했다.
더군다나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
비밀을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일이 틀어질 확률만 높아질 테니까.
아무튼 파천혈신이 없어진 무림의 실제 주인은 진씨, 아니 백씨 자손들이 될 것이다.
진무열은 아들 너머에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현손을 안아 보자꾸나.”
“예. 증조할아버지.”
남자가 진무열에게 이제 갓 태어난 아기를 건넸다.
“아이의 이름은 무엇이더냐.”
이에 진운기가 대신 대답했다.
“아버님께서 지어 주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허, 아직 이름도 짓지 않았단 말이냐. 흠.”
진무열이 생각에 잠겼다.
그가 지어 주는 마지막 이름이었다.
그때 그의 눈에 하나의 특성이 잡혔다.
그 상태를 보자.
“크하하하하.”
천산 산맥을 쩌렁쩌렁하게 울릴 만큼 크게 웃어 보였다.
“이 아이의 이름은 무결이다. 백무결. 앞으로 이 아이부터는 백씨로 부르거라.”
“무결… 감사합니다. 증조할아버지.”
“우리 백씨 가문을 빛내 줄 아이다. 나와 같은 신체를 가지고 태어났다니 재밌군.”
“헉!”
“역천지체!?”
태양지체나 마신지체가 가장 좋은 신체이나.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타고나는 건 5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확률이 낮았다.
그 때문에 무림에서는 역천지체가 가장 좋은 신체로 평가받았다.
“나와 비슷한 이름을 지은 것도 그 때문이니 잘 키우거라.”
진무열은 한동안 현손을 보더니 아들에게 아기를 넘겼다.
“이제 시간이 됐다. 내가 한 말 명심하거라. 내가 사라진 이후 신교의 문을 닫고 있다가 이 근처에서 역천진이 또다시 발동한다면 반드시 여길 금지로 만들고 직계 혈족만 관리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너흰 절대 여길 넘어와선 안된다. 알겠느냐.”
“예.”
“널 믿으마.”
진무열은 아들인 진운기의 어깨를 토닥이곤 게이트에 몸을 맡겼다.
* * *
‘강해!’
이준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였다.
이 먼 곳까지 느껴질 정도로 강했다.
‘인주나 지주 때와는 완전 달라.’
그들을 마주하고 든 생각은 이길 수 있다였다.
그런데 천주의 기를 읽었을 때는 잘 모르겠다.
직접 마주 보고 손을 섞어 봐야 알겠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상대는 할 수 있어. 그 이상은 감이 안 잡혀.’
혼원신공이 뛰어난 무공이고, 이준이 자연경에 들었다한들 거리가 너무 멀었다.
가까이서 그를 겪어 봐야 견적이 나올 것 같았다.
“사 단주.”
“예. 주군.”
“검제 님과 괴개 님께 전해 줘. 천주가 이 세계로 왔다고.”
“…명을 받듭니다.”
사 단주의 신형이 사라졌다.
이준은 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했다.
“이사장님. 저예요.”
[무슨 일이십니까?]
“대한민국을 전시 상황으로 바꿔야 할 듯싶네요.”
[천…외천입니까?]
“네. 놈들을 맞이해야 할지 아니면 가서 싸워야 할지 회의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가주 회의를 소집하겠습니다.]
한민성이 전화를 끊었다.
이준이 가문을 나섰다.
그 뒤를 무극단이 보좌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오대 가문과 마벽이 주로 회의하는 강남의 별다방.
이곳은 일반 카페로 보이나 최첨단 시설이 도입된 회의 장소였다.
각 가문의 가주들이 도착하자 카페가 변했다.
마치 세상과 단절된 공간으로 바뀌었다.
“파천자를 뵙습니다.”
“파천자를….”
“인사할 시간이 없어요. 어서 앉으세요.”
오대 가문과 마벽의 가주들이 모두 모였다.
그들의 얼굴은 굉장히 심각했다.
한국을 전시 상황으로 돌린다는 말을 한민성 이사장에게 연락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천외천과 결전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검제와 괴개께서 가문들의 수준을 최대한 끌어 올리고 있긴 하지만…”
검왕이 말끝을 흐렸다.
“제가 말했던 것보다 낮다는 말이네요.”
“그렇습니다. 두 달 정도만 더 여유가 있다면 파천자께서 말씀하신 최소한의 조건은 채울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죠. 적이 이렇게 빨리 나타날지 누가 알았겠어요.”
예상은 했으나 이준도 이 정도로 빠르게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건 됐고, 싸울 장소를 정해보죠. 의견 있을까요.”
싸울 장소는 굉장히 중요했다.
미리 자리를 선점해서 적에게 대응할 함정을 설치한다거나 지리의 이점을 이용해서 싸우는 게 가능했으니까.
혈마가 먼저 자신 있게 말했다.
“당연히 중국에서 싸우는 게 좋지 않나? 안 그렇습니까, 파천자 님.”
“피해가 없으려면 중국에서 싸우는 게 좋지만 쉽지 않아요. 저희의 전력이 천외천보다 높지 않으니 자칫 둥지에서 벗어났다가 된통 당할 수 있으니까요.”
“그 말도 일리 있는 듯합니다.”
혈마가 곧바로 수긍했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싸우자니 혈마 말대로 주변이 피폐해질 수 있어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느 곳에서 싸우던 장단점은 존재했다.
한국은 본진이나 주변의 피해가 심할 거고, 중국은 적진.
어떤 함정이 있을지 예상이 안 됐다.
이준과 혈마의 말을 듣고 있던 뇌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는 이곳에서 싸우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유는요?”
“각성자는 나라의 전력, 국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대 가문과 마벽의 각성자가 타국에서 죽어 나간다면 한국은 더욱 위태로워질 겁니다. 물론, 파천자께서 전력의 대부분을 차지하시겠지만. 혼자서 전부를 막을 순 없을 겁니다. 그래서 천외천과의 싸움도 저희와 함께 하는 것 아닙니까.”
뇌마의 말에 한지웅이 의견을 덧붙였다.
“또한 중국으로 간다면 보급에 차질이 있을 겁니다. 천외천이 저희의 보급을 노리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요. 아니, 무조건 보급부터 노릴 겁니다.”
보급은 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밤낮으로 싸워도 밥심이 있어야 칼과 창을 휘두를 수 있었다.
컨디션 유지에 보급만 한 게 없었으니.
보급은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뇌마가 한지웅의 말을 받았다.
“폐허가 된 건물과 땅은 서양의 마법으로 빠르게 복구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보셨다시피 황폐한 부산을 암상의 회장이 돈으로 찍어 누르니 한 달도 안 돼서 예전의 모습을 찾았습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싸우다가 무너진 건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등급 높은 각성자를 키우려면 수십 년은 소요가 되니 전력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이 좋습니다.”
“뇌마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중국으로 가는 건 리스크가 큽니다.”
모두가 중국이 아닌, 한국에서 적들을 맞이하자는 의견이었다.
“전장은 한국으로 정하죠. 각자 돌아가서 가문을 비우고, 무사고로 합류하세요. 중요한 문서는 아공간 주머니에 넣으시고요.”
무사고의 위치는 서울의 중간.
용산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강남 아래로 넘어가려면 이곳을 지나가야지만 통과할 수 있으니.
무사고를 중심으로 선을 그어 놓을 생각이었다.
“최후의 전쟁이 될지 모르니까 가문에 귀한 영약이 있으면 다 드세요. 아껴 놨다가 똥 됩니다.”
이준의 농담에 혈마가 맞장구쳤다.
“하하 먹지도 못하고 죽을 순 없지요.”
가주들의 얼굴도 조금은 풀렸다.
그들의 눈에 보인 이준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최후의 전쟁이면 긴장할 법도 하지 않나.
그런데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절대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여유였다.
그래서인지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다.
옆에 강력한 아군이 있는데 벌써부터 쫄아 있을 필요가 있을까.
적이었다면 끔찍한 공포였겠지만.
이준은 아군이기에 굉장히 듬직해 보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쉘터로 이동시켜 주세요.”
“그건 저희 신기지가가 맡겠습니다.”
“보급은 암상이 맡을 거니, 가주님들은 한금만 회장에게 연락해 보세요. 물자 조달 루트를 알려 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