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6화
이준의 눈동자가 떨렸다.
감정에 동요가 왔다.
충격받은 얼굴로 이지안을 보았다.
“지안이는… 가주님의 여동생입니다.”
“제게는 여동생이 없… 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을 겁니다.”
이의태는 자신이 이지안을 죽일까 봐 거짓말을 하는 걸까.
의심했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의태의 특성 중 하나가 영원한 충성이다.
자신을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이의태였다.
그런 그가 거짓말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지안이가 제 친동생인 이유를 말해 주세요.”
푸확!
이준이 가만히 보고만 있자
이지안은 그의 어깨에 박아 넣은 창을 거침없이 뽑아냈다.
이준의 어깨에서 피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개의치 않아 했다.
상처의 고통보다 진실을 알고 싶었다.
“저와 전 가주. 그리고 가주님의 어머니만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의태의 목소리가 이준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
그가 집중하는 사이 이지안이 눈치를 보다가 등을 돌려 달아났다.
이준은 그녀를 쫓지 않았다.
대신 이의태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지안이가 아가씨, 그러니까 가주의 어머니 배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지안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아버지에게 숨겼다.
낳고는 싶었으나 최미진 때문에 고민이 깊었다.
애를 낳아야 할지 지워야 할지.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최미진이 눈에 불을 켜고 죽이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지안까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자기가 배 아파 낳은 이신의 걸림돌이 될지 모른다고 제거하려 들 터.
어머니는 임신한 사실을 최대한 숨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적어도 최미진의 손에 지안이를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럴 바에는 자기 손으로 아기를 지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러다가 이준도 위험해질지 모른다고 내린 결정이라나.
“아가씨는 지안이를 지우려 했지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마음이 약해지셨습니다. 그러다가 전 가주께 임신한 사실을 들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요?”
“가문은 혈족을 중요시합니다. 전 가주는 지안이를 지우지 못하게 보호했습니다. 그래서 아가씨가 지안이를 무사히 낳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왜 지안이는 각주의 손녀가 돼 있는 거죠? 어머니는 왜 제게 여동생이 있다는 말도 해 주시지 않고 돌아가신 건가요?”
이준의 날 선 물음에 이의태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첫 번째 이유는 전 가주가 원하던 남자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도 있나요?”
“두 번째 이유는….”
“사실 그대로 이야기 해 주세요.”
“지안이가 절맥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설마….”
“맞습니다. 그 어린 핏덩어리를 죽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X발.”
이준이 욕을 뱉었다.
아버지의 밑바닥이 어디까지인 걸까.
정말 상종도 못 할 인간이었다.
“아가씨는 가주의 말에 충격을 받고 병에 걸리셨습니다. 그때부터 슬슬 몸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가주가 성장할 때까지 돌아가시지 않은 것도 용한 일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최미진의 독에까지 당했군요.”
남자 한 번 잘못 만났다가 비참한 인생을 살다 간 여자.
그런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였다.
“다행히 전 가주께서는 제게 이 일을 위임하고 신경을 끄셨기에 지안이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 인간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가문에 아버지를 유폐했다.
권왕이란 화려한 명성을 지녔는데 자신의 복수로 인해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됐다.
자신으로 인해 무인에게 가장 중요한 팔까지 잃었다.
그때 든 감정은 동정.
그토록 무심하고 정 없던 인간이.
자신을 위해 신체의 일부분까지 내어 줬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의태의 말을 들으니 아버지에 대한 동정은 싹 사라졌다.
되레 분노가 일었다.
“그 뒤의 일은 가주가 알고 있는 사실과 같습니다.”
이의태는 이지안을 아들 내외가 낳은 딸로 둔갑시켰다.
이후 신력권가에서 은퇴하고 이지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각주가 말하지 않았다면 평생 모르고 지냈을 사실이야.’
회귀한 후 처음으로 이지안과 인연을 맺었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빌어먹을!”
“이것이 바로 가주께서 지안이를 죽이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이 사실을 왜 지금 말하는 겁니까.”
“아가씨와의 약속 때문입니다.”
“어머니와 한 약속?”
“지안이만은 신력권가와 연을 끓고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혹시나 가주께서 안다면….”
“또다시 지안이를 죽이라고 명을 하겠네요.”
아버지란 인간은 제 자식을 죽이라고 서슴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도 버렸는데 구음절맥을 타고난 지안이라고 안 버리겠는가.
“제가… 지안이의 구음절맥을 치료해 줘서 각주는 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가문으로 돌아온 것이었군요.”
“맞습니다. 이것도 운명이겠지요. 하지만 가문에 돌아왔어도 지안이는 평생 제 손녀로 키우려 했습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말입니다.”
“…직접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이준은 이지안이 사라졌던 반대 방향으로 경공을 펼쳤다.
그가 향한 곳은 자신의 가문이었다.
* * *
벌컥!
권왕 이건무가 있는 건물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문을 통과한 사람은 싸늘한 얼굴을 한 이준이었다.
“준이냐.”
“물어볼 게 있습니다.”
“말하거라.”
이건무는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이준이 와도 눈을 뜨지 않은 그였다.
“제게 여동생이 있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이준의 말에 이건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건무는 감았던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신의가 말하더냐.”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준의 외침에 건물의 외벽이 터져 나갔다.
사방이 훤하게 뚫렸다.
그의 주위에는 기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있었지. 하지만 죽었다.”
“말이… 사실이었네요.”
“그 아이까지 있었다면 네가 위험했다.”
“아버지는 강한 핏줄을 원했던 겁니다. 그 아이가 여자였고 약했기 때문에 버린 겁니다! 제탓하지 마세요.”
“다 지난 일이다. 잊어라.”
“얼마나 절 더 비참하게 만들 생각이십니까.”
“…….”
“제가 재밌는 사실을 알려 줄까요? 제 여동생이 살아 있답니다.”
“결국… 신의가 내 말을 어겼구나.”
“그게 중요합니까?”
“잘살고 있다고… 하더냐.”
“빨리도 궁금해하시네요.”
“그저… 어떻게 지낼까 물어본 것뿐이다.”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준이 이를 뿌득 갈았다.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조금 전에 제가 여동생을 죽일 뻔했습니다. 제 손으로 핏줄의 머리통을 날릴 뻔했다고요!”
이의태가 제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천추의 한을 남길 뻔했다.
“가까이 있었던 것이냐?”
“예.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버린 자식을 신의가 손녀처럼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설마!”
“이지안이 제 여동생이랍니다!”
“신의의 손녀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얼굴이군요.”
이준은 화를 꾹 참고 몸을 돌렸다.
몇 걸음 움직이더니 이내 몸을 돌려세우며 말했다.
“당신이란 인간은 앞으로 제 아버지가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당신을 동정했던 제가 한심해요.”
이준이 경공을 펼쳐 사라졌다.
혼자 남은 이건무가 중얼거렸다.
“난 과거의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아이를 버리지 않았다면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최미진은 지독할 정도로 악랄했다.
패왕도가를 등에 업고 선 넘는 짓을 일삼았다.
사랑하는 여자의 암살을 시도해도 모른 척해야 했다.
그 시절에는 신력권가가 신기지가보다 더 힘이 약했으니까.
패왕도가는 철혈검가와 힘을 겨루는 게 가능할 정도로 강성했다.
최미진의 심기를 건드리면 패왕도가가 심술을 부렸기에 가만히 있었건 것이다.
그녀의 비위를 맞추지 않았다면 신력권가는 이미 무너지고 말았을 터다.
“지금의 너도 없었겠지.”
아니, 혈족 계승을 못 받고 무능했기에 이준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만약 이준이 천왕신공을 이어받았다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최미진은 절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까.
철저하게!
완전히 뭉개거나 제거하는 게 그녀였다.
“내가 무능해서 네게 고통을 주는구나.”
* * *
이준은 사신가를 나와 곧바로 이지안의 기운을 찾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입술을 깨물며 고민했다.
정녕 이지안을 정상으로 되돌릴 방법이 없는 건가.
‘조야. 지안이는 정말 가망이 없는 거야?’
[현재로서는 없다. 성화로도 잠식당한 이성이 돌아오지 않았잖아.]
‘정말 내 손으로 동생을….’
이의태의 손녀일 때는 손을 쓰려 했다.
그런데 지금은 핏줄이라고 손 쓰는 걸 주저하고 있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했다.
핏줄이 아닐 때는 미안한 마음을 지닌 채 손을 쓰려 했지만.
여동생이라는 말을 들으니 살수를 거둬들인 것.
그것도 모자라 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에 빠져들었다.
만약 죽이는 걸 포기한다면 이의태가 실망하지 않을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을 테지만 왠지 모르게 섭섭한 마음을 지니겠지.
이의태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살릴 방법이 있었으면.’
그럼에도 친동생을 살리고 싶었다.
이준의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황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막내 공자님. 제가 도울 수 있어요.]
“뭐라고!?”
이준이 경공을 펼치다 말고 자리에 멈췄다.
[아가씨를 데리고 금역으로 오세요.]
‘황금이 네가 지안이를 원래대로 돌릴 수 있어?’
[네. 아직 색욕의 마력에 완전히 잠식당하지 않았으니 빨리 데리고 오세요. 늦으면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아, 알았어.’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경공을 펼쳤다.
기감을 극대화해 이지안을 찾았다.
색욕의 마력을 지닌 이지안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려.”
이준의 무극군림보가 극성으로 발휘되었다.
공간을 압축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신형.
1분도 지나지 않아 이지안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지안이의 요기가 점점 거세지고 있어.”
그에 따라 미쳐 가는 사람들.
등급이 낮은 각성자는 물론 일반인들끼리 서로 싸우며 살인을 저지르는 게 보였다.
“내가 꼭, 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해 줄게.”
순식간에 이지안의 곁으로 접근한 이준이 점혈을 가했다.
몸이 안 움직이자 그녀가 발버둥 쳤다.
요기가 일시적으로 강하게 뿜어졌으나.
[각주님. 이곳을 정리해 주세요. 지안이는 제게 맡겨 주시고요.]
이준은 그녀를 어깨에 들쳐 메고 4대 성지의 금역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가주님께서 게이트로 들어갔어.”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게이트로 들어가신 거야.”
“지안이 괜찮겠죠?”
“가주님이라면… 해결하실 거다.”
사신가의 각성자들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야기는 그만 나누고 모두 주변을 정리하게. 우리 때문에 피해를 입었으니 보상은 철저히 해야 하네.”
“예, 각주님.”
사신가의 각성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도 이의태의 말에 충격을 받았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 가장 힘든 사람은 이의태와 가주였다.
두 사람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이 가기에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이들이었다.
요기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을 점혈로 제압하고.
내공으로 요기를 밀어내 사람들을 정상으로 돌려놓았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의태도 바쁘게 움직였다.
‘가주께서는 방법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직접 죽이시려고?’
그는 치료를 진행하면서도 걱정이 들었다.
‘제발 아무 일도 없으면 좋으련만.’
이준을 따라가지 못해 답답했으나
그를 믿기로 했다.
한편 게이트에 든 이준은 황금이가 있는 천중호수로 갔다.
그곳에는 백호도 같이 있었다.
“데리고 왔어.”
[제가 아가씨를 정상으로 만들어 드릴게요. 대신 원하는 게 있어요.]
“지안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뭐든 들어줄게.”
[저와 했던 약속 있죠?]
“응.”
[지킬 날이 머지않아요. 그때를 대비해서 저와 계약을 맺어요.]
“어떤 계약이든 해 줄 테니까 지안이를 원래대로 돌려줘.”
이준의 간절한 음성에 황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계약을 진행한 후, 치료를 시작할게요. 제 조건은 막내 공자님이 저와의 약속을 어길 시 아가씨의 목숨을 거둬 가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