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5화
4대 성지의 금역을 통해서 나간 곳은 벨렌 로레스의 거처가 아닌, 한국이었다.
금역의 출구와 연결된 곳은 사신가와 학교 뒷산.
그 이외의 장소로 가는 건 이준만 조절이 가능했다.
이지안은 금역의 주인이 아니었기에 두 곳 중 한 곳으로밖에 나오지 못했다.
그녀가 나온 곳은 사신가.
이준의 거처인 낙성각 방 안이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밖으로 나갔다.
연무장을 지나자 사신가의 각성자들과 마주쳤다.
현재 사신가는 소수의 인원만 남고 훈련을 간 상태였다.
“지안이?”
“무극단과 스페인에 간 게 아니었어?”
“…….”
이지안은 그들을 빤히 보았다.
사신가의 각성자들은 이상함을 느꼈다.
평소 이지안은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는 발랐다.
그런데 지금은 지그시 쳐다만 보는 게 아닌가.
“지안….”
그들이 이지안을 다시 한번 부르려는 그때!
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손에는 빛이 맺혀 있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수도였다.
“안 돼!”
쾅-
굉음이 울렸다.
이지안의 수도에서 날아간 수기가 이준에 의해 막혔다.
천만다행인 상황.
조금만 늦었다면 이지안이 사신가의 각성자를 죽였을 거다.
“가, 가주님?”
“어, 어떻게 된 일….”
“지금 지안이는 정상이 아니에요. 잡아야 하니 도망치지 못하게 포위하세요.”
“예!? 예!”
사신가에 비상이 떨어졌다.
각성자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이준과 이지안이 있는 곳으로 왔다.
모두가 똑같은 반응이었다.
스페인으로 향했던 이준과 이지안이 왜 이곳에 있는 걸까 하는 표정이다.
“가주님의 명이야! 지안이가 도망치지 못하게 포위해!”
각성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이지안이 선수를 쳤다.
“뒤를 쫓아요.”
“예!”
이준의 신형이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지안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나 이 또한 알고 있었다는 듯.
너무도 자연스레 방향을 틀었다.
“젠장!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이지안은 색욕의 마력에 잠식당해 있었다.
그녀를 멈추게 하려면 힘으로 제압해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기로 압박해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기로 이지안을 찍어 눌러 꼼짝하지 못하게 했으나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듯했다.
방법은 싸워서 제압하는 것뿐.
그 과정이 순탄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대로 사신가를 벗어나서 민간인이라도 해친다면 사태가 커져. 다치게 해서라도 폭주를 막아야 해.”
우려는 현실이 됐다.
사신가를 벗어난 이지안이 백설을 들어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창기가 빛을 뿜어내며 사방으로 날아갔다.
콰과과광!
수십 다발의 창기가 건물이며 도로며 나무며.
가리지 않고 쓸어버렸다.
“악!”
“무, 뭐야?”
길 가던 사람들이 졸지에 봉변을 당했다.
이지안이 이제 민간인까지 공격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들.
살려 달라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빌어먹을. 사신가는 구조를 우선으로 하세요.”
잠깐의 망설임이 인명 피해로 이어졌다.
자신의 실력이라면 이지안을 가뿐히 제압할 수 있었다.
그녀가 다칠까 봐 손을 쓰는 걸 망설였다가 결국 애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은 것이다.
“그만, 멈추는 게 좋겠다. 여기까지는 내가 감당할 수 있지만 더는 안 돼.”
이준은 한국을 구한 영웅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민간인이 피해를 입긴 했으나, 충분한 보상을 해 주면 됐다.
각성자의 폭주로 인해 벌어진 일이고 사신가에서 책임을 진다고 하면 되니까.
하나 더한 인명 피해를 일으킨다면 아무리 사신가라도 수습하기 곤란했다.
“창 내려놓고 가만히 있어.”
이준이 이지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던 그때였다.
“호호호호.”
그녀의 입에서 내공이 담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엄청난 요기와 함께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웃음이었다.
“너 정말!”
결국 이준이 참았던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이지안과 거리를 좁힌 그가 주먹을 휘둘렀다.
쾅!
그녀는 이준의 주먹을 백설로 막았지만 뒤로 쭉 밀려나며 나자빠져야 했다.
이지안이 만약 적이었다면 몸이 터져 즉사했을 터.
화가 나도 이지안이 다치는 걸 원치 않아 손에 자비를 둔 이준이었다.
* * *
“긴급이야!”
“뭡니까?”
“한남동에 엄청난 기운이 감지됐데.”
“몬스터입니까?”
“균열은 아니고 가 봐야 알 것 같다. 김 기자는 어딨어?”
“저기….”
“저 먼저 갈게요!”
김서아가 가방을 챙겨 방송국을 나갔다.
승합차에 탄 그녀가 카메라맨을 재촉했다.
“선배. 빨리 한남동으로요!”
“뭔데 그래?”
“파천자가 나타났어요.”
“파천자는 스페인에 갔잖아. 뜬금없이 한남동에 나타났다니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저 원스피릿이에요. 파천자의 동향은 제가 가장 빠삭해요. 스페인에 갔던 파천자가 어떻게 한남동에 있는지 모르지만 그가 그곳에 나타난 건 확실해요. 팬 카페에서도 혼란스러워하고 있어요.”
“네가 그렇다면 파천자가 한남동에 있는 거겠지. 밟을 테니까 꽉 잡아.”
운전석에 앉은 카메라맨이 승합차의 액셀을 밟았다.
특종을 따내려면 운전 실력은 필수.
다년간 다져 온 숙련으로 빠르게 한남동으로 갔다.
한남동 인근.
도로가 꽉 막혔다.
저 멀리서는 검은 연기와 함께 폭음이 들려왔다.
“선배. 카메라요!”
“지금 여기서?”
“여기에서라도 찍어야죠.”
김서아의 재촉에 남자가 차에서 내려 카메라를 들었다.
“화질이 떨어지긴 하지만 보인다.”
“저도 좀 볼게요.”
“그런데 파천자와 싸우는 상대는 누구지? 어디서 많이 봤는데.”
카메라맨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김서아는 화면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은발의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
화면에는 흐릿하게 보이나 청순하고 청초한 느낌이 들었다.
“설화?”
빙화 한지유의 뒤를 잇는 스타.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을 가졌지만 그 속에 청순함이 묻어 나오는 각성자.
이준이 챙기는 동생으로 신의 이의태의 손녀이기도 했다.
“설화가 왜 파천자와 싸우는 거지?”
“상대가 설화야?”
“확실해요. 그런데 저 요기는 뭐지?”
김서아는 종군 기자였다.
그녀와 그녀의 선배인 카메라맨 또한 각성자.
등급은 낮지만, 마기나 사기, 정기의 종류는 읽을 수 있었다.
“선배. 가까이 가 봐야겠어요.”
“위험해. 다른 기자들도 이 이상은 접근 안 하잖아. 이대로 내보내는 게 어때?”
“아니요. 어차피 방송은 못 나가요.”
김서아가 화면을 보는데 순간 아찔했다.
설화 이지안의 미소는 사람들의 뇌를 뒤흔드는 요기를 담고 있었다.
화면을 통해서도 이렇게 느껴지는데 저곳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아무래도 사신가에 변고가 일어난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러면 더 장면을 뽑아야 하지 않아?”
“선배. 사신가와 척지고 싶어요? 파천자의 허락도 없이 방송을 내보낸 방송국이 어떻게 됐는지 몰라요?”
“쫄딱 망했지. 그쪽 소속 기자들은 평생 일도 못 하고.”
“그러니까 방송은 못 내보내요.”
“그런데 왜 가까이 가려고?”
“위에 말할 명분이라도 얻어야 하지 않겠어요? 파천자는 융통성 없는 사람이 아니에요. 아군이라 생각하면 알아서 잘 챙겨 주는 게 파천자라고요.”
“아, 김 기자는 파천자와 친분도 있지?”
“저희는 파천자와 더욱 돈독해지고 윗선에 까이지도 않고 얼마나 좋아요.”
“역시 김 기자! 최연소 앵커 후보자다워.”
“빨리 가요.”
김서아와 카메라맨 남자가 이준이 있는 방향으로 경공을 펼쳤다.
폭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두 사람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멀리서는 이준과 설화만 싸우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먼지구름 안에는 꽤 많은 사람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죽어!”
“너 때문에 내가 등급을 못 올린 거야.”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네가 허접해서 그렇지.”
여기저기서 치고받고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선배….”
“사술에 걸린 것 같아.”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꿀꺽.
두 사람이 마른침을 삼켰다.
먼지구름 안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사람들이 싸우는 건 설화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요기 때문인 것 같았다.
“윽!”
“억!”
두 사람의 귀에 요사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귀를 막았지만 사이로 소리가 들려왔다.
“크아아악!”
카메라맨의 눈이 붉게 물들며 살기를 보이려는 찰나.
퍽-
누군가의 수도가 남자의 목을 가격했다.
그리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혈을 눌렀다.
“어서 이곳에서 나가게. 저 요기에 홀리면 살의밖에 남지 않을 걸세.”
“신의 어르신?”
나타난 사람은 신의 이의태였다.
이지안이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온 것이다.
* * *
이준은 파멸겁까지 동원해서 이지안을 압박했다.
그녀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아니, 혈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이준은 이지안을 제정신으로 돌려놓으려고 강하게 압박했다.
하지만 저항만 세질 뿐.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파멸겁의 성화로도 이지안의 폭주를 막지 못했다.
[색욕의 마력에 완전히 잠식당했군.]
흑염마조도 금역에서 나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기절시켰더니 더욱 폭주했어. 파멸겁의 성화로도 폭주가 멈출 생각을 안 해. 어떻게 해야 해?’
[이미 색욕의 마력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다. 방법은 하나뿐이야.]
흑염마조의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안 돼! 절대 그럴 수 없어.’
[그러면 저대로 평생을 살게 할 건가? 쇠사슬로 몸을 칭칭 묶은 채 숨만 쉬게끔?]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없다. 그 빌어먹을 색욕이 엿 같은 짓거리를 했어. 곱게 쳐 죽을 것이지 나중을 생각해서 지안이의 몸에 색욕의 마력을 심어 놓은 거다. 언제든 부활하려고 말이야.]
색욕의 마력.
즉, 악마의 힘이라는 뜻이다.
이지안의 신체는 인간이 아닌 악마의 몸이 됐다는 거다.
색욕이 그녀의 몸에 들어갔던 그 잠깐의 순간에 말이다.
[죽여 주는 게 지안이가 편히 눈을 감는 길이다.]
이준이 피가 나게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모든 게 자신의 탓.
SSS급을 넘어선 경지, 자연경에 올랐다고 너무 자만했다.
방심하지만 않았다면 충분히 막을 수도 있었던 일이다.
자신의 안일한 행동으로 인해 이지안이 색욕의 마력에 잠식당한 거다.
‘사부님. 어떻게 해야 해요.’
무극자 사부님만 옆에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안 일어났겠지.
“깔깔깔깔!”
이지안의 몸은 상처로 가득했지만 요사스러운 웃음은 끊이질 않았다.
웃음소리가 이어질수록 주위는 더욱 처참하게 변했다.
이제는 수습하냐, 마냐가 아니었다.
이지안을 어떻게 햐나가 문제였다.
이준의 선택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작은 주인의 결단이 늦어질수록 모두가 고통스러워질 거다.]
이지안의 저 웃음도 왠지 슬프게 느껴졌다.
이준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미안해. 지안아.”
이준이 눈을 질끈 감았다.
드디어 마음을 정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정말 미안해.”
연신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지안의 힘겨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 괜찮….”
그게 다였다.
“깔깔깔깔.”
다시 요사한 웃음을 보이며 요기를 터트리는 이지안이었다.
이준이 그녀의 앞에 섰다.
무방비 상태.
상대가 방어도 하지 않은 채 다가오자 이지안이 이준을 향해 창을 찔렀다.
푹-
오른쪽 어깨에 백설이 박혔다.
“…네게 정말 미안해.”
이준의 손에 무극기가 회오리치며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주구우우운 안 됩니다!”
그녀의 할아버지인 이의태가 다급하게 이준을 멈춰 세웠다.
이준은 슬픈 눈으로 이의태를 보았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답이 있다면 제게 내려 주세요.”
“주군께서는 절대 지안이를 죽이면 안 됩니다.”
“저도 지안이를 해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이 애를 편하게 해 줄 방법은 이것뿐이에요.”
“차라리… 제가 죽이겠습니다. 주군은 지안이를 죽이면 안 됩니다.”
“제게 손녀를 죽이라고 명을 내리라는 겁니까? 절 얼마나 하찮은 놈으로 만드시려고.”
이의태의 충성심은 안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게 하려고 본인이 하겠다는 거 아닌가.
할아버지가 끔찍이도 아끼는 손녀를 죽이게 하는 건 못 할 짓이었다.
“지안이의 마무리는 제가 할게요. 현무 각주에게도 미안합니다. 제가 지안이를 지키지 못했어요. 나중에 용서를 구할게요.”
이준은 이의태가 움직이지 못하게 점혈을 가한 후 사신가의 각성자에게 명령했다.
“현무 각주를 모셔라.”
“안 됩니다. 주구구구운!”
이의태의 절규가 들렸다.
저 외침에는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외침을 무시한 이준이 이지안의 목을 따려고 하는데 이의태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정확히 이지안의 목 앞에 손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