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1화
이준은 오좌를 심문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상대의 기억을 훔치는 능력이 있었기에 굳이 힘들일 필요가 없었다.
“사, 살려… 컥!”
오좌가 살려 달라고 했지만 이준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허공을 향해 손을 긋자 오좌의 목이 떨어졌다.
머리가 땅을 굴러 이준의 발 앞에 멈췄다.
퍼석!
이준은 오좌의 머리통을 밟아 깨부쉈다.
“널 살려 줄 이유가 없어.”
이준이 오좌의 시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시체에서 나온 검은 아지랑이가 이준의 손을 타고 빨려 들어갔다.
‘원래는 육좌가 날 상대하는 거였는데 놈은 나타나지 않았어.’
오좌는 유럽에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역할.
이준을 떠보는 건 육좌의 역할이었다.
한데 육좌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좌도 육좌와 연락이 안 닿는 모양.
기억 속에서 오좌가 수하를 시켜 육좌를 찾으라고 명을 내린 게 떠올랐다.
‘한꺼번에 처리하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
걸림돌은 사전에 제거하는 게 가장 좋았다.
그런데 육좌가 쏙 빠져나갔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아쉽긴 하지만 얻은 게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수확이 있었어.’
대륙 칠좌가 전부 깨어나지는 않은 것을 확인했다.
눈을 뜬 이들은 오좌에서 칠좌까지였다.
‘대륙 칠좌는 게이트를 넘어오는 게 아니라 각성자의 몸에서 깨어나는 거라서 그들을 찾아내기 좀 까다롭겠네.’
어디에서 누구의 몸으로 깨어날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눈을 뜨는 원리는 천외천의 강림과 비슷했다.
세계의 틈을 만드는 것.
균열로 인해 차원이 벌어져야 했다.
그래서 카오스 게이트로 혼란을 야기시킨 것이다.
‘천주와 일좌가 같은 시간대에 나타나는 것만 피했으면 좋겠는데.’
그러기 위해선 지구에 열린 게이트를 빠르게 닫아야 했다.
특히 카오스의 레드존과 블랙존 게이트는 필수적으로 닫아야 한다.
‘돌아가면 이 이야기도 검제 님과 나눠 봐야지.’
이제 할 일은 끝났다.
오좌를 완전히 죽이고 제단을 파괴시키는 것뿐이었다.
스페인에 열린 카오스 게이트는 몬스터를 전멸시킴으로 무용지물이 된 상태.
비행기를 타고 온 지 하루 만에 상황을 종료시킨 이준이었다.
‘마무리해 볼까.’
이준은 흡성공을 사용하여 오좌의 마력을 전부 먹은 후.
탁!
손가락을 튕겼다.
오좌의 시체에서 검은 불꽃이 타올랐다.
흑염이 오좌의 시체를 불태우자.
끼아아악!
허공에 붉은 그림자가 아우성치더니 이내 사라졌다.
오좌를 완전히 없앤 이준이 몸을 돌렸다.
나태와 탐욕의 군단 몬스터가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자신들의 주인과 군단장이 죽었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카오스 몬스터는 모두 자아를 가졌다.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을 지녀서인지.
지금과 같은 상황을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인간은 괴물.
주인과 군단장을 죽인 파멸자였다.
덜덜.
카오스 몬스터가 몸을 떨었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든지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저벅저벅.
이준의 발걸음 소리가 카오스 몬스터의 귀에 들렸다.
“아직도 서 있네.”
그의 목소리는 카오스 몬스터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파랑이의 종들은 이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최선을 다해 적을 죽였다.
반대로 카오스 몬스터는 이준의 눈빛에 속박된 채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어 갔다.
일방적인 학살.
피가 강이 될 만큼 카오스 몬스터를 죽이고서야 살육이 멈췄다.
무극단이 땅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치열했던 싸움.
하루, 이틀, 일주일간의 전투는 아니었으나.
그 어느 때보다 힘들었다.
이렇게 많은 몬스터와의 싸움은 처음이었으니까.
한국에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을 때도 이 정도로 힘들진 않았다.
그 대상이 일반 몬스터도 아닌 카오스 몬스터라 더욱 힘든 것이다.
“허억… 허억… 잘… 싸웠다….”
김봉팔이 숨을 몰아쉬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카오스 군단과의 싸움을 승리로 장식한 무극단.
또 하나의 전설적인 공훈을 세웠다.
어떤 단체가 무극단과 같은 활약을 할까.
죽을 때까지 깨지지 않을 신화가 될 거라 굳게 믿는 김봉팔이었다.
* * *
성당 건물 잔해 속에 있는 제단을 완전히 파괴했다.
성스러운 성당에 지독한 마기가 퍼져 있었다.
이준에게는 굉장히 반가운 먹잇감.
무너진 잔해와 공기 중에 떠도는 마기를 맛있게 먹어 치웠다.
그의 내부에 들어온 마기가 날뛰려 했지만, 처음 마주한 건 혼원신공의 내기였다.
전율스러울 정도로 강력한 마기가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흡수한 마기는 순한 양이 되었다.
오히려 혼원신공의 마기한테 살랑거리며 다가가기까지 했다.
혼원신공은 성당의 마기를 순식간에 품었다.
곧바로 사용이 가능할 만큼 금세 물든 마기였다.
“저….”
벨렌 로레스가 머뭇거리며 이준을 불렀다.
그전까지는 마음껏 반말하던 그녀였지만, 싸움 이후부터는 달라졌다.
각성자 시대는 강한 사람이 존중을 받는 세상이었으니까.
어리다 해도 함부로 반말하면 안 됐다.
그랬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 강해 보이던 사제를 너무도 쉽게 죽인 이준의 무력.
괜히 위화감이 들었다.
그전에 보지 못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이준에게 보였다.
그래서 쉽게 대할 수 없었다.
“네?”
“그게….”
“편하게 말해요.”
‘내가 편하지 않아.’
벨렌 로레스는 이준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준이 어려웠다.
닿으면 안 될 것 같은 성역의 존재 같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 또래 중에 나보다 강한 사람이 처음이기도 해서….’
그녀의 나이는 스물세 살.
이준보다 네 살은 많지만 또래 중에 그녀보다 강한 남자는 없었다.
그런데 동양인이고 자기보다 네 살이나 어린 남자가 저보다 강했다.
강한 정도라면 호기심으로 끝났을 터.
이건 강함을 넘어섰다.
처음으로 경외감을 느끼게 한 남자가 서양인이 아닌 동양인일 줄이야….
그래서 더욱 조심스러웠다.
“어떻게… 그렇게 강한 거야…요?”
“말투가 왜 그래요?”
이준의 해맑은 미소에 벨렌 로레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가 생각해도 너무 어이없는 행동이었다.
혹시라도 오해하는 게 아닐까.
남자로서 좋아하는 게 아닌, 존경과 경외였다.
각성자로서 어떤 경지를 밟고 있는지.
어떤 무공을 익히고 있는지.
그런 호기심 말이다.
물론 이준이 그녀의 스타일이긴 했다.
근육 돼지가 아닌, 잔근육이 떡 하니 자리 잡은 균형적인 몸매.
키도 컸으며 피부 또한 여자같이 하얗고 매끈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을 가졌으나 내면은 따뜻한 사람.
게다가 몬스터와 싸울 때는 어떤가.
화끈하고 섹시하기까지 했다.
딱 그녀가 원하는 남자상이었다.
그녀는 설마 동양인에게 호감을 느낄지 꿈에도 몰랐다.
“아, 아니야…요.”
벨렌 로레스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자 이준이 갸웃거렸다.
김봉팔은 두 사람을 보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휴우우. 주군한테 반한 사람이 또 생겼네. 이제는 서양인들까지 꼬시다니 정말 대단해. 그렇지 않소. 대주?”
“주군의 사생활을 이야기하는 건 무극단의 일이 아니다.”
사형준은 관심 없다는 듯 말했다.
이에 김봉팔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물어볼 사람한테 물어봤어야지. 으휴.”
사형준 또한 무공밖에 모르는 바보.
이준과 도긴개긴이었다.
그러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겠지.
“연애고자는 여자들이 싫어할 텐데 이제는 주군이 심히 걱정되는데?”
“형님의 말에 동감하오.”
“서양까지 섭렵한 가주라 이젠 누구와 이어질지 감이 안 잡힙니다.”
“눈치가 없는데 결혼이라도 할 수 있을까?”
“내기하는 게 어떻소?”
“좋아. 난 찬성.”
“저도 낄게요. 전 결혼 못 한다에 한 표요.”
순식간에 내기판이 열렸다.
이준이 결혼하냐, 못 하냐 판돈을 걸기 시작했다.
김봉팔과 거의 모든 단원이 결혼을 못 한다는 것에 전 재산을 걸었다.
그들은 이준의 옆에 있는 동안 많은 걸 보았다.
다른 건 똑 부러지지만 연애만큼은 잼병.
다른 건 기대가 됐지만 연애는 전혀 기대되지 않았다.
“이러면 게임이 안 되잖아.”
그때였다.
탁.
이지안이 자기의 목숨 같은 무기를 내놓았다.
“전 가주 오빠가 결혼한다에 걸게요.”
“지, 지안아. 아니야. 왜 희망이 없는 곳에 걸어.”
“그래. 괜히 그 귀한 아티팩트 잃는다? 다시 생각해 봐.”
“제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이지안의 생각은 단호했다.
이준은 여자에 대한 건 실속이 없었으나.
중요할 때는 굉장히 과감했다.
또한 누군가에 대해서는 냉철함을 넘어섰다.
‘가주 오빠는 정연 언니만큼은 우유부단하지 않아.’
제일 결정적인 건 어떤 여자라도 이준의 매력에 빠지면 절대 헤어 나오지 못했다.
연애 고자면 어떤가.
다른 쪽에서 완벽한데.
연애 눈치는 서서히 키워 나가면 그만이다.
아니, 그 모든 걸 감수할 정도로 이준의 매력은 끝이 없었다.
명예, 재력, 인물.
이 세 박자를 다 갖췄는데 연애 고자면 어떤가.
모든 게 용서가 됐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무극단이었다.
아니, 너무 이준을 얕본 것이다.
“지안아. 나중에 후회하지 마.”
“삼촌이나 후회하지 말아요.”
이때의 내기가 김봉팔에게는 인생 최대의 실수로 자리 잡게 됐다.
후에 내기의 사실을 이준이 듣게 됐으니까 말이다.
* * *
육좌가 폐허가 된 성당으로 왔다.
“파천혈신. 역시 넌 우리 대륙 칠좌의 걸림돌이다.”
그는 몬스터의 눈을 통해 파천혈신과 오좌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소름끼치는 무력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파천혈신.
그 옛날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
악마의 힘을 받은 오좌를 짐짝 취급한 것을 보면 안다.
파천혈신이 얼마나 강한지.
“신의 힘을 가진 인간은 우리 말고 없어야 해.”
육좌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칠좌를 흡수한 것처럼.
그가 서 있는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러자 오좌의 힘.
나태가 육좌의 가슴으로 빨려 들어갔다.
“흐읍!”
육좌는 이번에도 똑같은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그가 가진 힘보다 더 큰 힘이 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힘을 담은 그릇이 크다고는 하나.
벌써 칠좌의 힘과 육좌 본인의 힘이 있었다.
두 사람보다 더 강한 오좌의 힘이 들어오니.
그릇이 차고 넘쳤다.
그럼에도 육좌는 포기하지 않고 오좌의 힘을 받아들였다.
눈의 실핏줄이 터졌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버티니 입가에 피가 흘러내렸다.
시간이 지나감과 동시에 고통에서 희열로 변한 감정.
“크크크크.”
육좌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크하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나태의 힘!”
그의 눈이 번들거리자 죽었던 나태의 군단장이 재생되었다.
전보다 더 빛나는 갑옷과 무기를 든 채 육좌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군단장의 힘은 곧 칠죄종 주인에게서 나오니.
나태를 흡수한 육좌의 힘에 의해 나락은 다시 태어나게 됐다.
“너의 복수는 내가 해 줄 것이다.”
[새로운 나태의 주인을 믿습니다.]
육좌가 게이트를 열자 나태 군단장 나락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도 게이트로 들어가기 전 허공을 향해 말했다.
“준비되면 다시 찾아오겠다. 그때는 널 반드시 죽여 주마. 파천혈신!”
육좌가 이를 간 후 게이트로 사라졌다.
* * *
이준은 벨렌 로레스의 은신처로 왔다.
사면을 둘러싼 폭포 한가운데.
벨렌 로레스의 은신처는 천혜의 요새 안이었다.
그곳에는 희귀한 종류의 풀과 꽃, 나무들이 가득했다.
“여기가 내 집이야.”
벨렌 로레스는 스페인을 지켜 준 이준에게 감사의 의미로 자기의 집을 소개했다.
초라한 오두막집이나 있을 건 다 있었다.
하지만 이준은 다른 곳에 관심이 가 있었다.
“헉! 여기에 심마초가 있다니! 푸른 등불 꽃까지 있어? 미, 미쳤다.”
이준의 눈은 이미 돌아가 있는 상태였다.
심마초는 마기를 지닌 이들에게 약이었다.
마기는 강한 힘을 주는 대신 폭주를 일으킨다.
불안정한 힘.
하나 이 심마초만 있으면 폭주는 하지 않을 것이다.
마기의 사용을 안정화시켜 주는 게 심마초의 효능이었으니까.
게다가 푸른 등불 꽃은 어떤가.
이 꽃은 심마초보다 훨씬 더 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