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8화
사신가의 가솔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결의가 맺혀 있었다.
가주인 이준의 말은 그 어떤 이의 다짐보다 믿음직스러웠다.
“그렇게 알고 열심히 수련하세요. 검제 님과 괴개 님이 여러분을 도와줄 거예요.”
“예!”
“알겠습니다! 가주!”
그들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우렁찼다.
가솔들의 음성을 들은 이준이 무극대.
아니, 이제는 무극단이 된 그들과 함께 가문을 나섰다.
그 속에는 이지안도 포함돼 있었다.
가문의 전용 비행기를 타고 스페인으로 향하는 이준과 무극단.
벌써 10시간째 비행중이었다.
“끙. 비행기는 내 체질이 아닌가 봐.”
김봉팔은 자리에 앉아 뒤척이며 궁시렁거렸다.
“형님. 제발 조용히 좀 하시오. 비행기를 탈 때마다 투덜거리는 거 지겹지도 않소?”
“몸이 쑤시는 걸 어쩌냐.”
“나이가 든 것이니 스페인에 도착할 때까지 운기조식이나 하시오.”
무극단원들이 김봉팔을 나무랐다.
하지만 김봉팔은 그들의 말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차라리 경공으로 바다를 건너는 게 낫겠다.”
“이 사람이!”
“미치셨소?”
“가주님의 귀에 들어갔으면 어쩌려고 이러시오!”
“형님들. 제발 부단주 입 좀 막아 주세요.”
무극단원들이 고참을 향해 애절한 눈빛을 발사했다.
김봉팔은 주둥이가 문제.
저 입만 가만히 놔두면 반은 갔다.
문제는 그 입이 쉬지 않는다는 거지만.
“봉팔이 말대로 경공으로 바다를 건너게 생겼네.”
이준의 말에 무극단원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곧이어 사형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기다. 상공에 있는 마기가 비행기에 문제를 일으켰다. 모두 충격에 대비해!”
펑-
어디선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엔진부에 불이 붙으면서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비행기가 아래로 급격하게 추락했다.
카오스 게이트에서 흘러나온 마기로 인해 충격을 받은 비행기.
마기의 영향으로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바다로 추락했다.
콰아아앙!
바다에 떨어지기 전에 기체가 터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 안에 있던 이준과 무극단은 무사했다.
이준이 호신강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무극단은 안전했다.
그들도 높은 등급을 지녔으니까.
비행기의 폭발로 목숨을 잃을 정도로 나약하지 않았다.
이준이 바다에 착지했다.
물보다 조금 위, 허공을 밟고 있었다.
무극단도 마찬가지였다.
이지안은 완벽하게 서 있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나자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뭔 마기가….”
“몸이 저릿할 정도요.”
“방심했다가는 골로 가겠습니다.”
무극단은 내공을 돌려 마기로부터 몸을 보호했다.
마기가 몸으로 침투해 오려는지.
공기 중에 스파크가 터졌다.
몸을 보호하는 내공과 마기가 서로 부딪혀서 싸우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들과는 달리 이준의 주변은 고요했다.
무극단처럼 주위에서 스파크가 튀지도 않았다.
마치 마기가 알아서 이준만 피해 가는 것 같은 느낌.
그의 뒤에 있던 사형준의 눈이 깊어졌다.
‘터무니없이 높은 밀도를 가진 마기인데 주군만 꺼리고 있다. 아니, 복종하는 건가?’
이준을 꺼리는 거면 마기가 주위에서 아예 물러날 터.
하지만 공기 중의 마기는 계속 이준에게 다가가며 고개를 조아리는 느낌이었다.
‘이런 현상은 처음 보는군.’
사형준이 신기해하고 있을 때 이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자.”
“예! 가주.”
무극단은 이준을 따라 경공을 펼쳤다.
그들은 열심히 다리를 움직이는 반면 이준은 허공을 날아갔다.
“나도 저 경공 배우고 싶다.”
“봉팔 형님이 무극군림보를 어떻게 배웁니까. 제발 헛소리 좀 하지 마시오.”
“누가 무극군림보를 배운데? 비슷한 무공 있잖아. 천무의 내공심법이라면 천마군림보 같은 무공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한 거다.”
“생각하는 게 참.”
“놔두쇼. 봉팔 형님이 이상한 생각하는 게 어디 한두 번이오.”
고참 무극단원들이 고개를 저으면서 김봉팔을 앞질러 갔다.
“나만 주군의 경공이 멋있나?”
허리를 올곧게 편 채 다리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으나 몸이 앞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이 얼마나 기이한 광경인가.
죽기 전에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은 모습이었다.
* * *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게이트 안.
금발의 청년이 무기에 술식을 열심히 각인하고 있었다.
그때 청년의 수하로 보이는 이가 나타났다.
“그로가 님. 파천자가 스페인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입국 허가를 내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와?”
금발의 청년.
대륙육좌에 있는 그로가의 눈이 커졌다.
미끼를 덥석 문 것.
일이 너무 쉽게 풀려 오히려 의문이 들었다.
“자신감에서 나오는 행동인가? 혹시 혼자인 거냐?”
“아닙니다. 그의 호위들이 같이하고 있습니다.”
“혈신이 호위대를? 성격이 변한 건가? 아니면 세월이 많이 흘러서?”
그로가는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파천혈신은 고독한 존재.
그에게 패배하고 정보를 모았다.
그에 대해서는 하나도 빠짐없이 샅샅이 알아냈다.
정보에는 파천혈신의 성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떤 자도 곁에 두지 않는 고독한 성격의 소유자.
심지어 제자도 곁에 두지 않았다.
언제나 바람같이 나타나서 바람같이 사라지는 존재.
그가 호위대를 거닐고 다닌다고 하니 혼란이 온 것이다.
“모르겠어.”
“그로가 님. 파천자가 움직이는 경로로 추측하옵건대 오좌가 있는 제단으로 가는 듯합니다.”
‘카오스 게이트가 어디서 생성되는지 정확히 판단한 걸 보면 혈신이 확실한데 이 찜찜한 기분은 뭐지?’
“오좌께 가시겠습니까?”
수하의 질문에 그로가가 고개를 저었다.
“알페인은 미끼다. 혈신이 얼마큼 강한지 그가 확인해 줘야지.”
“오좌와 힘을 합치시려는 것 아니었습니까?”
“합쳐야지.”
오좌, 알페인을 던져 줘서라도 파천혈신의 정보를 얻어야 했다.
상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맞서는 건 어리석은 짓.
오좌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방법이 그로가로선 최선이었다.
“알페인이 죽으면 내가 나태의 힘까지 먹으면 돼.”
지잉-
그가 게이트 밖으로 나왔다.
뒤를 따르는 카오스 몬스터들.
그들을 본 사람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모, 몬스터….”
“카오스 게이트가 열렸어!”
“으아아악.”
“도, 도망쳐!”
사람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나 이놈들은 일반 몬스터가 아닌 카오스 종.
그것도 블랙급 몬스터였다.
질투의 군단이 괌을 지키는 수비대를 잡아 죽이는데 일반인들이 도망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얼마 가지 못해 몬스터에게 찢겨 죽었다.
몬스터들이 사람들을 살육하거나 말거나.
그는 수하와 말하면서 베네로딕이 죽은 장소로 갔다.
“그래서 내가 이곳까지 온 거니까.”
그로가는 땅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길에 따라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와 동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수정의 파편이 모여들었다.
베네로딕을 불사의 존재로 만들어 줬던 힘.
그는 하나로 모인 수정을 취했다.
“흐읍!”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칠좌는 실력이 안 좋은 것뿐이지.
탐욕의 힘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잘만 사용했더라도 다른 녀석보다 강했을지 모른다.
그로가가 신음하고 있는 그때.
바닥에서 이상한 게 나왔다.
이빨과 비슷한 형태의 그림자.
그 괴상한 게 그로가를 둘러쌌다.
그러더니.
콰직-
그를 덮쳐버렸다.
이빨 사이로 검은 액체가 흘렀다.
다물어졌던 이빨이 양 갈래로 벌어졌다.
그 안에 있던 그로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
시간이 흐르자 스켈레톤 한 마리가 일어나더니 살이 붙었다.
이빨이 마법진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그로가가 눈을 떴다.
“크크. 크하하하.”
그가 목청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었다.
미소를 지은 채 몸을 살폈다.
“이게 불사의 힘이란 말이지?”
생명의 힘이 넘쳐흐른다.
마치 사람의 목숨을 천 개도 넘게 가지고 있는 듯했다.
이러니 불사의 존재라고 불렸겠지.
그가 계속 웃고 있는 사이.
이마에 크리스털 수정이 툭 튀어나왔다.
불사의 힘이 완전히 자리 잡은 것.
그로가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오좌의 힘까지 먹는다면… 상상만 해도 즐거워. 기념으로 이곳을 내 영역으로 만들어 주지.”
그의 눈이 검게 번쩍이는 순간 괌은 균열화가 완료된 대지로 변했다.
* * *
“주군. 생각보다 심각한데요?”
“빨리 움직였는데 벌써 이 정도나 오염이 됐다니.”
검게 물든 땅에서 마기가 흘러나왔다.
그 마기는 또 다른 땅을 오염시켰다.
균열이 퍼지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오염의 원인을 빠르게 제거하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나겠어.”
이준이 땅을 박차려는데 어디선가 미약한 숨소리가 들렸다.
가까운 곳인데도 불구하고 뒤늦게 알아차렸다.
몸을 돌려 기척이 들린 곳으로 갔다.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
결계가 있었다.
이준은 그 결계를 아무렇지 않게 통과했다.
사형준은 가만히 있었고, 김봉팔은 이준을 따라 앞으로 걸었지만.
쿵!
“억.”
벽에 가로막혀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평범한 결계가 아니에요.”
이지안이 결계를 매만지며 말했다.
“아고, 빨리 말해 주지 그랬냐 지안아.”
“다들 알아차린 게 늦었어요. 그리고 가주 오빠와 저희가 같다고 생각하는 삼촌이 잘못된 거예요.”
그녀가 정곡을 찔렀다.
이준의 행동이 평범해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준에 한해서였다.
그의 동작 하나, 하나가 평범하지 않았다.
손끝에 무공의 묘리와 깨달음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저 평범해 보일 뿐이었다.
잠시 후.
결계 안에서 나온 이준의 품에는 기절한 여자가 있었다.
“지안아. 치료를 부탁해.”
여자의 몸은 망신창이였다.
피로 얼룩진 옷가지.
하얀 피부가 상처로 가득했다.
그중에는 목숨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상처도 있었다.
“네.”
이준이 바닥에 여자를 내려놓자 이지안이 바로 치료했다.
그녀가 익힌 천무의 주계열은 현무였다.
현무 계열에 있는 의술.
신의 이의태의 손녀답게 그녀는 싸움만이 아니라 의술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봐라 침을 꽂는 손이 번개같이 빠르지 않나.
치료 계열의 각성자는 귀했기에 이준은 뿌듯했다.
‘이대로 시간만 지난다면 신의를 가뿐히 뛰어넘겠어.’
장침을 몸에 꽂는 그녀의 손놈림은 예사롭지 않았다.
속도와 정확도, 판단력을 모두 갖춘 이지안.
그녀의 손에 의해 여자의 몸에는 침이 빼곡히 박혀 있었다.
“주군. 이 여자는 왜 결계 안에 있었을까요?”
“몬스터한테 당한 상처야. 싸우다가 피할 곳을 찾아 이곳에 왔고 결계를 친 후 기절한 거지 않을까 싶어.”
말을 끝낸 이준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는 모여드는 몬스터에게 가 있었다.
“기절한 여자의 냄새를 맡고 몰려온 것 같은데.”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부탁해.”
사형준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무극단과 함께 몬스터를 향해 쇄도했다.
백호에게 수련받은 각성자들.
무극단은 옛날의 무극단이 아니었다.
카오스 몬스터라도 무극단이 모여서 공격한다면 버티지 못하리라.
쾅!
무극단과 몬스터가 요란하게 격돌했다.
이준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뗐다.
“어때 보여?”
“조금만 늦었으면 목숨을 잃었을 거예요.”
“널 데려오길 잘했네.”
기절한 여자의 정체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신비롭다고 해야 할까.
큰 키에 예쁜 외모를 가졌다.
창백한 얼굴에도 가려지지 않은 미모였다.
그걸 떠나서 몸 안에 깃든 힘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다.
“아.”
이준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드래곤 하트를 꺼내 들었다.
블루 드래곤의 심장.
먹으면 무한한 마력을 준다는 아티팩트였다.
드래곤 하트와 여자의 몸에 깃든 힘이 비슷했다.
“설마 아니겠지.”
이준은 드래곤 하트를 여자에게 가져다 댔다.
가만히 있던 아티팩트가 작게 움직였다.
“헉.”
이준은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서양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미인.
사람들의 눈에 띄기도 쉬웠을 텐데 여태껏 정체를 숨기고 있었던 게 놀라웠다.
“암흑대제가 여자였다니.
암흑대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몇 살인지도 모르는 신비의 각성자.
암흑대제에게는 하나의 소문이 있었는데, 드래곤 하트가 반응을 한 것 보니 아무래도 그 소문이 맞는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