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5화
이준이 철혈검가에 도착했다.
정문에는 박정연이 마중 나와 있었다.
“준아!”
그녀는 이준을 오랜만에 보자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녀가 이준의 품에 안기려는데.
“이거 안 놔? 뒤진다.”
박혁진이 그녀의 옷을 붙잡았다.
“보는 눈이 많아.”
이준이 철혈검가에 나타나자 사람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옛날에도 인기는 많았던 이준.
지금은 그전보다 훨씬 많았다.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
“어쩌라고! 이참에 어디 도망가지 못하게 꽉 도장 찍어야지.”
“이 누나가 못 하는 말이 없어.”
두 남매가 티격태격하자 이준이 웃었다.
“여전하네. 잘 있었어?”
“성마회 때문에 골치 아팠는데 네가 해결해 준 덕분에 한시름 놨어.”
베네로딕을 제거하자 철혈검가에 있던 성마회 인원이 자취를 감췄다.
철혈검가는 그들을 찾아봤지만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아직 다 끝난 건 아니야.”
이준의 말에 박혁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안에 검제 님 계시지?”
“어. 널 기다리고 계셔.”
“들어가자.”
이준이 철혈검가 안으로 들어갔다.
가주전이 아닌 검제가 머무르는 처소로 향했다.
검제는 호미로 밭을 갈고 있었다.
“여전하시네요.”
“오셨…소?”
이준의 목소리에 검제가 허리를 폈다.
그가 이준을 보면서 침음을 삼켰다.
“그새 강해진 것 같소.”
“그렇게 됐어요.”
“거기서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소?”
“저도 몰라요. 그런데 여기가 거의 끝이 아닐까 싶어요.”
“허허. 인간이라 보기 민망하구려.”
SS급인 검제의 눈에도 이준은 평범해 보였다.
하나 그가 강해졌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주변의 공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자연이라고 할까.
이준이 숨을 쉬는데 공기와 풀, 나무 등이 너무도 자연스레 동조하는 게 느껴졌다.
숨을 쉬면 주변 공기가 흔들릴 법도 할 터.
이준에게는 그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걸음을 옮길 때 땅의 미세한 진동조차 없으니.
그의 경지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검제가 감탄하는 사이.
“제가 늦었습니다.”
검왕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괜찮아요.”
“부인도 오셨소?”
검제가 검왕의 뒤에 있는 여자를 향해 말했다.
그녀는 검제의 부인인 김혜연이었다.
“파천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와 봤어요.”
그녀의 시선은 이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검제처럼 이준의 경지를 보고 감탄하는 게 아니라 다른 걸 보는 느낌이랄까.
“기분 나빴을 텐데 미안해요.”
“괜찮아요. 다 살펴보셨을까요?”
박정연과 박혁진의 할머니다.
나쁘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네.”
김혜연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가지 않았다.
박정연이 그녀의 곁으로 가서 속삭였다.
“할머니 준이 어때 보여요?”
“외모는 합격이야.”
“성격도 좋아요. 츤데레 아시죠?”
“알지. 무심한 척 챙겨 주는 스타일 아니냐.”
“그렇게 절 챙겨 준다니까요.”
“여자의 마음을 녹일 줄 알아. 그런데 여자관계는?”
“주변에 적들이 많아요.”
“명문이더냐?”
“신기랑 마벽의 마련이 제일 걸림돌이에요.”
“한 명은 신기의 빙화일 테고 다른 한 명은 혈마의 딸이겠구나.”
“맞아요.”
“내 손녀가 꿀릴 일은 없지만, 여자관계가 좀 복잡한 건 안 좋은데….”
“아니에요. 준이는 잘못이 없어요.”
박정연이 이준을 두둔했다.
두 여자의 속삭임은 모두에게 다 들렸다.
이에 민망한 건 검제와 검왕 그리고 박혁진이었다.
“미안하오. 내가 대신 사과드리겠소.”
“손님을 앞에 두고 이런 실례를… 철혈의 가주로서 얼굴을 들지 못하겠습니다.”
“할머니가 올 때부터 예상했어.”
세 사람의 말에 이준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별것도 아닌데요. 괜찮습니다.”
“마음도 넓어.”
“그렇죠? 배경에 무공은 말할 것도 없다니까요.”
속물 같은 말이었으나.
각성자에게는 혈족 계승이 가장 중요했다.
혈족 계승할 무공이 높을수록 각성자의 가치는 상승한다.
이준의 값어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수준.
중국의 땅덩어리를 전부 살 돈으로도 이준의 값어치를 다 하기엔부족했다.
이 시대 최고의 신랑감.
나이도 어리니 빨리 결혼해서 자녀를 얻는다면 더 좋은 혈통이 탄생할지 모른다.
박정연은 이 사실을 강조한 것뿐이었다.
“이 할미는….”
“그리고 준이한테 등급이 엄청 높은 요정의 꿀도 있을 거예요.”
“무조건 결혼에 찬성이다. 아니지. 이 할미가 밀어 주마.”
“정말이죠?”
“네 아빠를 갈궈서라도 결혼할 수 있게 자리를 깔아 줘야지.”
요정의 꿀이란 말에 김혜연은 이준이 너무도 예뻐 보였다.
사람이 완벽했다.
인성이 모자라거나, 몸이 약하거나 아니면 무공이 강하지 않거나.
하나의 약점 정도는 가지고 있을 법도 한데 이준은 무려 사업 수완까지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손녀사위로 이만한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아니, 없었다.
“하, 정말 미안하오.”
김혜연과 박정연의 행동에 검제가 계속 미안해했다.
* * *
한편 이지안은 테구르의 안내로 게이트를 돌아보고 있었다.
“저….”
“테구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요.”
“테구르…?”
“네 아가씨.”
“저기는 어떤 곳이에요.”
게이트 중앙에 위치한 웅장한 건물.
경건함이 묻어 나오는 건축물이었다.
“큼큼. 저기로 말할 것 같으면 주인님과 고금제일인이자 큰 어르신, 그러니까 주인님의 사부님이 계시던 혼원문입니다요.”
“가주 오빠의 사부님이요?”
“그렇습니다요. 파천혈신이라는 가장 위대한 무인이 잠든 성지라 할 수 있습니다요. 제 자랑을 하나 하자면 주인님이 큰 어르신으로 인해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이 제가! 제일 충신인 테구르가 혼원문을 다시 만들었습죠.”
테구르가 어깨를 한껏 올려 보였다.
이지안의 칭찬을 기다렸다.
이쯤에서는 잘했다는 말이 들려올 차례였으니까.
한데 이지안은 칭찬이 아닌 질문을 던져 왔다.
“파천혈신이 이 게이트에 있었어요?”
“6개월 전까지만 해도 살아 계셨습죠.”
“지금은 돌아가셨다는 말인가요?”
“애석하게도 우화등선 하셨습니다요.”
“가주 오빠의 사부님이 이 게이트에 계셨다니, 그래서 가주 오빠가 슬퍼했구나.”
“하지만 이 테구르가 주인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걸작을 만들어 놨습죠. 헤헤.”
“어떻게요?”
“음. 그건 비밀입니다요. 주인님이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요.”
무극자의 모습을 녹화한 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다른 이에게 말하지 않기로 이준과 약속한 테구르.
약속하나는 칼같이 지키는 녀석이었다.
“궁금하긴 하지만 물어보지 않을게요.”
이지안은 궁금증을 꾹 참았다.
이준이 가르쳐 주기 전까지는 물어보지 않는 게 그녀의 성격이었다.
“저 테구르.”
“무엇이 더 궁금하십니까요?”
“혼원문이란 곳 구경해도 돼요?”
“저긴 주인님 이외에는 못 들어가는 곳입니다요.”
“아.”
이지안이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준의 뿌리인 혼원문을 구경하고 싶었는데 안 된다고 하니 실망한 것이다.
“죄송합니다요. 저긴 제 권한 밖입니다요. 큰 어르신께서 혼원문은 혼원의 계승자 말고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요. 전 큰 어르신의 허락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아가씨는….”
테구르가 말을 얼버무렸다.
이준의 말이 없었기에 혼원문은 무리.
주인의 권한을 넘볼 수 없었기에 미안함을 드러냈다.
“어쩔 수 없죠.”
“대신 제가 아가씨의 기분을 풀어 드리겠습니다요.”
“전 괜찮아요.”
“아닙니다요. 주인님의 동생인 아가씨의 기분을 풀어 드리는 것도 종복으로서의 역할. 이 테구르는 유능한 종복이기 때문에 아가씨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요. 제게 창을 잠시 보여 주시겠습니까요?”
이지안은 등 뒤에 있는 창을 꺼내 테구르에게 건넸다.
테구르는 창을 받아서 요리조리 살폈다.
“백설, 오랜만에 봅니다요.”
“백설을 아세요?”
“헤헤. 이 창, 제가 만들었습니다요.”
[백설]
종류: 무기
등급: SS
설명: 불의 신봉자 ‘테구르’가 만든 아티팩트로 불 속성을 담고 있는 창이다. 착용자의 능력에 따라 흑염 속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효과: 공격력 +150%, 불 속성 +150%
*흑염 사용 가능(각성)
“테구르가 이 창을 만들었어요?”
“제가 유능하다고 하지 않습니까요. 헤헤.”
[테구르 좋아한다.]
파랑이가 옆에서 꼬리를 살랑이며 말했다.
“헤헤. 파랑 님 왜 그러십니까요.”
테구의 입이 찢어질 듯 귀에 걸렸다.
녀석은 사뿐한 걸음으로 백설을 가지고 대장간으로 갔다.
이지안은 테구르의 뒤를 따랐다.
“잠시 여기에 앉아 계시면 제가 빠르게 작업을 끝내겠습니다요.”
“뭐 하려고요?”
“백설을 업그레이드해서 드리겠습니다요.”
테구르가 망치로 백설을 내리쳤다.
망치와 백설이 닿는 중간에 마법진이 만들어졌다.
망치가 백설을 훑고 지나가자 빛을 뿜어냈다.
앉아서 구경하던 파랑이가 폴짝 뛰어 이지안의 품으로 갔다.
[테구르 능력 있는 몬스터야. 기다리고 있으면 엄청난 무기를 받을 수 있을걸?]
“헤헤. 쑥스럽습니다요.”
파랑이의 칭찬에 테구르가 좋아 죽으려고 했다.
작업하면서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녀석.
파랑이의 칭찬은 녀석의 작업 속도를 높여주었다.
* * *
박정연과 김혜연을 간신히 보낸 검제는 이준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제는 유럽에 열린 게이트였다.
일반 게이트가 아닌 카오스 게이트.
아시아에 있는 한국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으나 다른 문제가 있었다.
“유럽으로 관광하러 간 한국인들이 대거 실종됐다는 말인가요?”
“그렇소. 실종자 가족들이 찾아 달라고 계속 연락해 오고 있는데 참 난감하오.”
“각성자들은 마법 학회의 허락 없이는 입국조차 못 하는데 우리보고 어쩌라는 건지.”
검왕이 난색 해 했다.
동양과 서양의 교류는 거의 단절되어 있었다.
무공이나 마법을 배우기 위해 유학 가는 이들이 있었으나.
이것도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리고 통과된 소수만 유학이 허락됐다.
여러 번의 외교 시도 끝에 겨우 이루어낸 성과였다.
반면 일반인들은 각성자보다 유럽에 가는 게 훨씬 수월했다.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유럽에 온다고 해 마법서를 도둑질해 갈 일도 없고, 위험 부담이 없었으니.
일반인들의 여행은 간단한 절차만 받으면 가능했다.
물론 그 속에는 동양에 마법의 위대함을 알리려는 속셈도 있었지만.
그건 아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실종자 가족들은 우리보고 해결해 달라고 하는 거죠?”
“그렇소. 나나 파천자라면 해외에 입국 허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오.”
다른 때였으면 신경도 쓰지 않을 일.
베네로딕의 기억을 읽고 나서는 유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태였다.
“실종된 장소가 어딘가요?”
“프랑스 파리, 스페인 마드리드, 영국 런던 등에서 실종됐소.”
“스페인 마드리드라.”
“짚이는 점이 있소?”
“스페인 마드리드에 카오스 게이트를 여는 제단이 있어요.”
베네로딕의 기억을 읽었을 때 보인 곳.
대륙칠좌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카오스 게이트를 세계로 퍼트리고 있었다.
그 제단은 악마의 힘으로 만든 건축물.
마계와 인계를 연결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멍청한 새끼들. 카오스 게이트를 열면 천외천의 힘이 더 커질 텐데. 만약 천주라도 넘어오면 지들이 계획한 건 전부 물거품이 되는 것도 모르고 쯧쯧.’
천주는 대륙칠좌가 상대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사부가 왜 천주를 천재라고 칭했는지.
지금의 경지에 올라서 알 수 있었다.
과거에 봤던 그의 경지를 SSS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대륙칠좌가 대사형의 경지를 알았으면 이런 병신같은 짓거리를 하지 않았을 거야.’
천주 대사형은 미완성의 무공인 파천멸기로 자신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