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1화
빛에 휩싸인 베네로딕이 눈을 떴다.
곁에 있던 루실의 몸이 폭죽처럼 터졌다.
육편이 사방으로 튀면서 서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혈수의 흔적이 가득한 방 안.
그의 몸은 상하지 않았으나.
하얀 로브에 피가 튀었다.
옷이 더럽혀지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베네로딕으로서는 기분이 굉장히 안 좋았다.
하나 그보다 더 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일이 있었다.
“기뢰가 터지지 못하도록 봉인해 놨는데 내 마력을 뚫고 나왔어…?”
루실의 몸에는 파천멸기가 들어 있었다.
차마 자신의 힘으로도 파천멸기를 전부 소멸시키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마력으로 봉인해 놨는데 그걸 뚫고 폭발했다.
“어떤 게 진짜 모습이란 말이냐!”
베네로딕은 혼란스러웠다.
악마의 눈으로 파천자를 보았다.
마법사가 사용하는 제3의 눈과 차원이 다른 천리안.
악마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악마의 눈으로 상대방의 마력은 물론 신체, 잠재력, 수명 등 많은 걸 보는 게 가능했다.
그걸로 파천자를 주시했는데 그는 자신이 알던 파천혈신이 아니었다.
자신 있게 괌에서 보자고 한 이유도 이 때문.
한데 봉인 마법을 뚫는 힘이라니.
기뢰가 루실의 몸에 숨어 있던 기간도 이틀.
그 시간이라면 몸 안에 숨어 있던 내기의 힘도 차차 약해졌을 터.
자신이 펼친 봉인 마법을 뚫고 나온다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나답지 않게 흥분했군.”
그가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파천혈신이 깨어났다는 게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황.
지금부터 흥분할 필요는 없었다.
이번 건 상대의 도발에 걸린 자신의 탓.
루실의 몸에 더 강한 봉인 마법을 걸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일어난 일이라 여겼다.
이성을 되찾은 베네로딕이 루실이 있던 곳을 슬쩍 쳐다봤다.
루실은 그의 오른팔.
슬퍼할 법도 하지만 베네로딕은 개의치 않아 했다.
“안타깝긴 하지만 인형은 또 만들면 돼.”
서재를 나간 그는 곧장 괌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기대 반 두려움 반.
파천자가 파천혈신인지.
내일이면 모든 게 판단이 난다.
파천혈신이 아니면 파천자는 죽을 것이고.
파천혈신이면 그가 얼마나 힘을 되찾았는지 판단하고 움직이면 된다.
그도 분명 자신과 같이 각성자 시스템이 있을 터.
옛날과 같은 파멸적인 힘은 아직 회복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그와 싸운다면 자신이 질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도망칠 방법은 많았다.
지금은 과거와는 많이 다른 세상이니까.
* * *
신들의 땅.
무릉도원이라 부르는 휴양지, 괌.
뜨거운 태양 아래 엄청난 인파가 몰려 들었다.
비행기를 타고 온 이준은 많은 사람으로 인해 인상을 찌푸렸다.
“사 대주.”
“예, 주군.”
“괌이 게이트 청정 지역이긴 하지만 원래 이렇게까지 사람이 많았던가?”
“이 정도로 아닌 걸로 압니다.”
인산인해.
사람들로 가득했다.
특히 공항이 아닌, 다른 루트로 넘어오는 사람들이 더욱 많았다.
“엄청난데?”
“돈값 한다니까.”
“이래서 비행기 말고 마법 학회에서 운영하는 포탈로 오자고 한 거구나.”
사람들은 포탈로 넘어오면서 신기해했다.
포탈은 서양 각성자의 전유물.
민간인은 허가 없이 탈 수 없었다.
이번에는 특별히 프랑스 마법 학회에서 괌으로 가는 포탈을 열어주어서 일반인도 타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그보다 기대되지 않아?”
“서양 마법사와 동양 무인의 만남이라.”
“생각만 해도 벅차.”
“그래도 역시 마법사가 최고겠지?”
“당연한 걸 물어. SS급 마법사는 유럽도 한꺼번에 날릴 수 있는 강함을 지녔다고.”
외국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데 김봉팔이 뛰어왔다.
“주구우우운 이것 좀 보십시오.”
그의 손에 있는 태블릿 PC
이준은 태블릿 PC를 받아서 화면을 봤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건가. 존나 약아 빠졌네.”
1시간 전에 뜬 따끈따끈한 기사.
프랑스 마법 학회 산하 성마회의 탑주 베네로딕의 인터뷰였다.
오늘 괌에서 자신을 만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거기다 덧붙여서 구경 갈 사람은 일정한 돈을 내면 프랑스 마법 학회가 운영하는 텔레포트로 괌까지 보내 준다는 게 나와 있었다.
서양과 동양 각성자의 만남.
이 역사적인 순간을 어찌 함께하지 않을 수가 있나.
엄청난 인파가 몰린 이유였다.
“그래 봤자 죽는 건 똑같겠지만. 가자.”
이준은 무극대를 데리고 공항을 빠져나갔다.
“주군. 호텔은 반대 방향인데요?”
“바로 목적지로 갈 거야.”
베네로딕과 만날 장소는 옛날 골프장으로 사용됐던 컨트리클럽이었다.
지금은 잔디만 깔려 있을 뿐.
골프장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약속 시간은 많이 남았는데요 어? 주군. 같이 가요!”
김봉팔의 말을 무시한 이준이 땅을 박차고 사라졌다.
사형준은 고개를 돌려 김봉팔에게 말했다.
“우린 놀러 온 게 아니다. 명심해라. 부대주.”
“알았소.”
사형준도 이준을 따라 경공을 펼쳤다.
“으휴. 그럴 줄 알았소.”
“가주님 저기압인 거 모르오?”
“사람이 말이야. 눈치가 있어야지.”
“그러니까 매일 까이는 거 아닙니까.”
무극대원들도 김봉팔에게 한마디씩 하고 이준과 사형준의 뒤를 따랐다.
마지막에는 막내인 현이가 쐐기를 박았다.
“전… 부대주님처럼 안 될 거예요.”
김봉팔은 졸지에 혼자 남게 됐다.
그는 경공을 펼쳐 사라지는 무극대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난 주군 기분 풀어 주려고 그랬다고 이 자식들아!”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편 이준은 경공을 펼치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주인님. 주변에 마법 결계가 넘쳐 나.]
‘내가 사부님이라고 착각해서 준비를 철저히 했네. 전부 도망칠 수 있는 마법 결계야.’
[그냥 두진 않을 거지?]
‘지금부터 건드리면 베네로딕이 더 경계할 거야. 환영, 환각을 일으키는 마법 결계는 놔두고.’
[텔레포트를 연결시켜 주는 결계만 지우자.]
‘아, 그리고 잘못 건드리면 괌이 초토화될 수 있는 결계도 있어. 이건 조심히 손을 써야 할 건데.’
[나한테 맡겨 줘. 내 마력이면 대 마법사도 알아차리지 못할 거야.]
품에 있던 파랑이가 허공을 밟고 움직였다.
하늘을 나는 아기 여우.
녀석이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있는 결계에 마력을 심어 놓았다.
[됐어.]
‘결계는 그대로 유지가 되고 있는데?’
[신호만 주면 한 번에 박살 낼 거야.]
이준은 신기했다.
파랑이의 마력이 결계에 깔린 마력에 잘 스며들었다.
같은 마력이라 해도, 전부 속성이 다를 터.
삐끗했다간 결계가 발동하거나 폭발할 건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여기에 하나만 더 추가할 수 있어?’
[어떤 거?]
‘결계를 박살 냄과 동시에 균열이 일어나게 하는 거지.’
[균열을?]
‘베네로딕은 사람들을 방패막 삼아 내 행동을 제안 하려 할 거야. 이게 놈의 두 번째 수작이지.’
[내가 아는 주인님은 남 눈치 안 보고 깽판 치는데.]
‘내가 막 나가면 날 천하의 나쁜 놈으로 만들려는 거지 않을까?’
[주인님 착한 사람이었어?]
‘파랑아. 그건 조가 하는 말이잖아. 네가 왜 해?’
[난 하면 안 돼?]
‘어. 그거 나쁜 말이니깐 하지마.’
흑염마조는 무극자 사부에게 물들었지만, 파랑이는 아니었다.
순진한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
순수한 녀석이라 하나, 하나 가르쳐야 했다.
[아, 나쁜 말이었구나. 알았어. 안 할게.]
‘무튼 균열을 일으켜서 나랑 베네로딕한테 신경 못 쓰게 할 거야.’
[그때 쓱 하려는 거지?]
‘맞아. 균열만큼 사람들 눈 속이기 쉬운 게 없잖아. 베네로딕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거야.’
[좋은 작전이다! 신호 주면 바로 시작할게.]
파랑이가 펄쩍 뛰었다.
재밌다는 목소리와 함께 괌 전체에 펼쳐진 결계에 마력을 주입했다.
절대종에 속하는 파랑이라 괌 정도의 크기에 마력을 집어넣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 * *
“파천자가 벌써 도착했어요?”
“네. 호텔로 안 가고 바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합니다.”
“아직 두 시간이나 더 남았군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시에 도착할 수 있게 대기하세요.”
“알겠습니다.”
베네로딕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약속 장소에 먼저 가는 건 멍청한 짓.
딱 정시에 도착하든지 아니면 늦게 도착하는 게 기 싸움에서 좋았다.
“비그마.”
“부르셨습니까. 탑주.”
“결계 점검은 어때요?”
“아주 좋습니다. 한국 각성자들이 경공을 펼쳐 약속 장소로 가는 중인데 결계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합니다.”
“파천자도요?”
“그는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만 손을 쓰진 않았습니다.”
“이것만 보면 그는 아닌데….”
파천혈신은 남의 목숨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성격이 바뀌었다는 개소리는 있을 수 없었다.
더 잔인하고 무서워지면 모를까.
“예?”
“아니에요. 파천자가 모를 리 없겠죠. 하지만 잘못 만졌다간 괌이 통째로 날아간다는 걸 알고 가만히 있는 거예요.”
베네로딕은 파천자에 대해 깊은 생각에 빠졌다.
시간이 흐르고 약속 시간이 다가왔다.
“갈까요?”
“모시겠습니다.”
그가 성마회 마법사를 이끌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수백의 마법사가 펼치는 블링크.
가히 장관이라 할 수 있었다.
“시간의 마법사다!”
“어, 어디?”
“저기!”
그의 쇼맨십은 컨트리클럽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사람들의 소리에 이준도 고개를 돌려 허공을 보았다.
블링크로 접근해 오는 마법사 무리들.
아주 지랄을 하구나란 생각을 했다.
“시간의 마법사는 무슨. 사람의 생기나 빨아먹는 괴물이.”
이준의 차가운 음성을 들었을까.
베네로딕이 거리를 유지한 채 멈춰 섰다.
“어제 얼굴은 봤지만, 다시 제 소개를 하죠. 저는 프랑스 마법 학회 산하 성마회의 베네로딕 포비입니다.”
주변에 보는 시선이 많았다.
베네로딕은 그들을 위해 다시 쇼를 시작했다.
“사신가의 가주 이준.”
이준이 짧게 말하자 외국인들이 야유를 보내냈다.
“우우우우!”
“예의를 지켜라!”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원숭이잖아?”
인종차별적인 말까지 하는 외국인도 있었다.
하나 이준은 그런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베네로딕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날 본 소감은?”
“파천멸기는 지녔는데… 내가 과거에 알던 파천멸기는 아니군요. 힘을 아직 못 찾은 건가요? 아니면….”
베네로딕의 입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좋아 죽으려는 표정.
얼마나 흥분했으면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
가짜라는 말을 입밖으로 내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실망이네.”
이준은 무극기를 살짝 드러냈다가 다시 숨겼다.
베네로딕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파천혈신! 역시 당신이었어. 날 부르려고 약한 척했던 겁니까!”
“자기 혼자 착각하고 화내고 다 하네. 한 번만 더 보여 줄 테니까 자세히 느껴 봐.”
이준이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베네로딕을 향해 기운을 개방했다.
화아악!
거대한 위압감이 베네로딕을 향해 쏟아졌다.
“헙!”
“이래도 내가 파천혈신인 것 같아?”
“파천혈신이… 아니야? 어떻게 그의 무공을 계승할 수가 있었던 거지? 각성자라면 규격 외의 힘을 가지지 못할 텐데.”
깨어나고 힘을 되찾는 동안 알아낸 사실이 있었다.
이 세상에서는 규격 외의 힘은 혈족 계승이 안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서양을 예로 들자면 불멸의 마법서나, 제금의 창술, 제왕의 혼 같은.
신의 힘을 넘보는 마법은 혈족 계승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혹시나란 생각에 제금의 창술을 가진 놈을 깨우자 그제야 그 창술이 놈에게 계승됐다.
제왕의 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규격 외의 힘은 이 세계의 마법사나 기사만이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확실해졌어.”
“뭐가?”
“당신이 그가 아니라는 사실 말이에요.”
“그게 너한테 그렇게 커?”
“당연하지요. 파천혈신은 이기지 못하겠지만 너는 내가 죽일 수 있거든!”
베네로딕의 입가에 살기가 맺혔다.
그 순간 하늘에 수십 개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서로 연결되는 마법진들.
사다리가 놓여질수록 엄청난 양의 마력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