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6화
신기지가의 별관.
40대로 보이는 여자가 방에 누워서 피부관리를 받고 있었다.
“아가씨. 학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나한테!?”
여자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프랑스 마법 학회의 연락은 언제나 이휘에게로 갔다.
한국으로 귀국한 인원 중에는 그의 직책이 가장 높았으니까.
한데 학회에서 자신에게 연락을 준 것이다.
무슨 일일까.
“여, 연결해.”
그녀가 헐레벌떡 일어나 다른 방으로 갔다.
그곳 중앙에는 머리통만 한 수정 구슬이 있었다.
잠시 후.
수정 구슬이 빛나더니 허공에 투명한 창이 열렸다.
“헉! 베네로딕 님이 직접!”
창 너머에 보이는 사람은 다름 아닌 베네로딕이었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수연. 고향에 돌아간 느낌은 어떤가요?]
“가, 감회가 새롭습니다.”
[성마회의 일원으로서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용무로 제게 연락을…?”
[한국에 파천자라는 각성자를 만나 보세요.]
“파천자는 이휘의 소관 아닙니까?”
[이휘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어요.]
“헙!”
[아무래도 파천자에게 죽임을 당한 것 같은데 수연이 한 번 만나 봐야겠어요.]
“미, 미친놈! 제 핏줄을 죽이다니.”
여자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준과 이휘는 이복 관계.
피가 한쪽밖에 연결이 안 됐다고 해도 혈족이다.
그런데 동생을 죽이다니.
유교 사상이 강한 한국 사회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각성자 시대로 접어들며 유교 사상이 옅어졌다고 하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유교 사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베네로딕 님.”
[무엇이든.]
“이휘의 본 힘은 SS급을 넘을 텐데 파천자에게 당했다는 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저 또한 그게 궁금해서 수연에게 파천자를 만나 보라고 하는 거예요. 제 부탁을 들어주시겠어요?]
베네로딕이 정중하게 말했다.
여자, 강수연은 고민에 빠졌다.
‘그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파천자가 나타났어. 이휘가 사신가를 제멋대로 한다는 사실을 듣고 나타나서 충돌한 건가?’
파천자는 사신가의 가주였다.
동생인 이휘가 나타나 가문을 마음대로 주무르니 가만히 있었겠나.
듣기로는 홀로 수련한다고 사신가를 잠시 떠났다던데, 이휘의 소식을 듣고 돌아온 듯싶었다.
그 결과 한쪽은 목숨을 잃은 것이고.
‘파천자는 이휘가 프랑스 학회 소속이라는 걸 몰랐나? 알았으면 그렇게 쉽게 목숨을 취하지 못했을 건데.’
서로 다른 세력에 있으면 단순하게 움직이지 못한다.
작은 일로 부딪히다가 큰 싸움으로 번지기 마련.
아이들끼리 싸우다가 부모 싸움으로 커질 수 있었다.
한 가문을 이끄는 가주라면 충분히 알고도 남았을 터다.
‘힘만 센 멍청이인가? 그러고 보니까 파천자는 아직 성인도 되지 않았어. 이휘에게 당했던 악감정이 남았다면 이런 일을 저지를 수도 있겠어.’
그녀는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수연?]
“네?”
[제 부탁을 들어주시겠냐고 물었어요.]
“베네로딕 님의 말씀인데 당연히 따라야지요.”
[고마워요. 제 부탁을 들어주는 수연한테 선물을 줘야겠군요.]
“서, 선물이라 하시면!?”
[제가 줄 선물이 여러 개인가요? 후후.]
베네로딕이 짙게 미소를 보였다.
그에게서 나온 검은 기운이 창을 뚫고 나와 강수연의 몸으로 들어갔다.
“흐윽!”
그녀의 몸이 활자로 꺾였다.
눈이 뒤집히며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제부터 수연은 제힘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게 됐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허억… 허억….”
강수연이 바닥에 널브러져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몸을 일으켰다.
“…저보고 이휘를 대신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수연은 눈치가 빨라서 좋아요.]
“가,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연의 활약을 기대 하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마법 통신구의 빛이 사라졌다.
강수연은 몸을 살피며 미소를 지었다.
“나에게도 베네로딕 님의 힘이 들어왔어. 이 힘이라면 뭐든지 가능해.”
그녀가 힘에 심취해 있을 때였다.
콰아아앙!
멀리서 굉음이 들려왔다.
그녀가 있던 건물이 흔들리기도 했다.
“아가씨!”
“뭐야?”
“파천자가… 쳐들어왔습니다.”
“그 녀석이 왜!?”
강수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우선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 * *
“이런. 또 내기를 잘못 발산했네. 미안해서 이를 어쩌지?”
이준의 얼굴은 미안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듯한 표정이었다.
“끄어어….”
“이, 이러고도 당신이 무사할 줄 알아?”
“마법 학회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신기지가의 정문이 통째로 날아갔다.
마정석으로 만들어진 첨단 보완 장치는 물론.
몬스터의 충격에도 충분히 버틸 수 있는 단단한 담장도 가루가 됐다.
정문을 폐허로 만든 이준.
기를 발산한 것만으로도 주위가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준을 향해 마법을 겨누던 마법사들은 어떻게 됐나.
양 손목이 사라졌다.
바닥이며 건물이며 조경이며.
모든 게 초토화가 됐는데 마법사는 오직 손목만이 잘렸다.
“내기가 제멋대로 날뛰는 걸 어쩌냐. 마법사인 너희가 통제를 해 주든가. 손목이 날아가서 이제 마법은 평생 못 쓰는 건가?”
말과는 달리 내기의 컨트롤이 신의 경지에 있었다.
수문 위사 각성자들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게.
마법 학회 각성자들만 노린 것.
신체 부위 아무 곳이나 날린 것도 아니고 정확히 손목만 잘라 냈다.
한, 두 명이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수만 족히 백 명을 넘었으니.
이준의 내공 컨트롤은 사람들의 입을 떡 벌리게 했다.
“아까 그 자신감은 어디 갔을까?”
“으으….”
이준은 노엘을 향해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날렸다.
그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두려움에 잔뜩 휩싸인 채 이준과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고 애를 썼다.
“어어? 도망치면 안 되지. 여길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가면 어떡하냐. 이러면 내가 지유한테 곤란해지잖아.”
“으어어어….”
정확히 말하면 정문을 초토화시킨 범인은 이준이었다.
그런데 이준은 이 일을 노엘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타이밍 좋게 신기지가의 가주인 한지웅과 한지유가 정문으로 달려왔다.
“이…준…?”
“하, 하. 지유야 안녕?”
“네가 여긴 어떻게? 그리고 이곳은 왜 이렇게 된 거야.”
이준이 뒤통수를 긁으며 무안해했다.
“쟤들이 날 향해 마법을 날리려고 하지 뭐야. 방어하니까 이렇게 됐네. 그렇죠. 아저씨.”
이준이 수문 각성자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 그렇습니다. 아가씨. 저놈들이 파천자 님께 다짜고짜 마법을 겨눴습니다.”
“이건 당신이, 커헉!”
이준이 한 마법사의 입을 발로 틀어막았다.
“하, 하하. 들었지?”
마법 학회 마법사들은 억울했다.
마법을 겨눈 건 사실이나 이곳을 초토화시킨 건 이준이었다.
손목이 날아간 것도 억울한데 정문을 폐허로 만든 범인으로까지 지목됐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물론 한지유도 이준의 말을 온전히 믿지 않았다.
그녀는 이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신기지가 안으로 들어오려는 이준을 마법사들이 막아서 이런 사달이 일어났겠지.
“6개월간 모습도 보이지 않다가 여긴 왜 온 거야.”
한지유의 목소리는 뾰족했으나 반가움이 한껏 묻어나 있었다.
수심 가득한 얼굴이 싹 사라진 상태였다.
“수련할 시간도 모자라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냐.”
“너도 마법사들을 봤듯이 가문에 일이 생겼어.”
“여기 일 끝나면 학교에 갈 거지?”
“…응.”
“그러면 빨리 해결해야겠네.”
이준이 팔을 걷자 한지유가 고개를 저었다.
“너라도 타 가문의 일에 개입하는 건….”
“지유야. 내 사부가 나한테 한 말이 있어. 뭔 줄 알아?”
이준이 뜬금없는 말을 했다.
예전이었다면 개소리하지 말라고 했을 테지만 그의 음성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뭐라고 하셨는데.”
“힘을 가지고 있다면 황제가 사는 황궁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이 한국 땅에선 내가 곧 법이라 이 말이지. 내가 네 가문에 끼어들겠다면 끼어드는 거야. 설령 네 아버지라도 나를 말릴 수 없어. 안 그래요?”
이준이 한지웅에게 물었다.
그의 눈빛을 읽은 한지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서는 파천자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강력한 무력을 지닌 사람은 그만한 권한을 가질 수 있다는 뜻.
한국 최고 각성자인 이준이기에 타 가문에 개입할 자격이 있었다.
도왕 최강규가 자신의 가문을 최고로 만들려고 했던 이유도 다 이 권한 때문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싶었으니까.
“들었지?”
“사람들이 욕할 수 있어.”
“내가 신기지가에 개입하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아니면 나보다 강하든지.”
이준의 막무가내식 행동.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설득이 됐다.
“하아아. 난 여전히 너한테 민폐만 끼치고 있어.”
“나중에 갚으면 되지.”
이준이 해맑게 웃었다.
무장해제 시켜 버리는 미소.
그를 보던 한지유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그녀 또한 입가에 작은 호선이 그려졌다.
그러던 그때 불청객이 나타났다.
* * *
별관에서 나온 강수연이 이준을 보자 반갑게 인사를 했다.
“당신이 그 유명한 파천자인가요? 프랑스에서도 귀가 따갑게 들었어요. 처음 봬요. 강수연이라 해요.”
그녀가 손을 내미는데 이준은 멀뚱히 쳐다만 봤다.
“아직 소개를 다 안 해서 그런가. 이러면 좀 반가워하려나요? 여기에 있는 지유 이모되는 사람이에요.”
그제야 이준이 고개를 돌려 반응했다.
“이모?”
“응. 이모야.”
“너한테 이모가 있다는 건 못 들었는데.”
전생의 기억을 되돌아봐도 한지유에게 이모는 없었다.
그녀의 엄마는 외동딸로 태어났다.
사촌 누나나 동생도 없었기에 한지유에게 이모 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게….”
한지유가 난감해하자 한지웅이 대신 대답했다.
“아내의 이복동생입니다.”
“이복… 동생이요?”
“네.”
“사이는 좋았어요?”
“보시다시피 원수에 가깝습니다.”
“형부!”
한지웅이 선을 긋자 강수연이 버럭 소리쳤다.
“사실이잖아. 예의상 처제라고 부르지만 죽은 아내가 알면 기절할 노릇이지.”
“그래도 내가 언니와 한 핏줄인 건 변함이 없어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이준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뭐야, 나랑 이신과 비슷한 관계잖아?”
각성자 시대는 자식이 중요했다.
자식이 한 명뿐이면 어떻게든 애를 더 낳으려 했다.
그래야지만 혈족 계승이 확실해지고 가문이 번성하니까.
먼 옛날로 회귀한 세상.
가문 중심의 사회가 형성되어 이복형제가 많이 생겼다.
가족 상잔이 일어나는 것도 이때문.
권력을 차지하겠다고 핏줄을 죽이는 건 빈번했다.
신기지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기요. 아줌마.”
“아, 아줌마!?”
“괜히 분란 일으키지 말고 다시 프랑스 마법 학회로 돌아가는 게 어때요? 들어보니까 신기지가 사람도 아니구만.”
강수연이 신기지가에 있는 건 한지유의 이모라는 명분이었다.
그런데 한지웅과 한지유는 그녀를 가족으로 여기지 않았다.
예의상 이모라고 할 뿐이었다.
“여긴 내 힘이 필요해!”
“성마회 소속이라는 사람이 굳이 여기에 있으려고 하는 이유가 뭐예요?”
“난 언니의 가문을….”
“다른 소속이면서 왜 신기지가에 감 놔라 배 놔라 하고 있어요.”
“…그건.”
“할 말 없네. 아줌마가 생각해도 웃기죠? 자기가 했던 말과 행동이 다 달라서 말이에요. 그러니까 반박을 제대로 못 하지. 그렇다고 내 앞에서 힘으로 밀어붙일 수도 없고.”
이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굉장히 거슬렸다.
뭔가 무시와 경멸이 담긴 느낌이었다.
“좋아요. 신기지가에 월권을 행사한 점은 사과할게요. 하지만 파천자가 학회의 마법사들을 상하게 한 건 묵인할 수 없어요.”
강수연은 신기지가를 먹는 건 차후의 일로 미뤘다.
그보다 우선인 건 이준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이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