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4화
“아무도 준이 소식 몰라?”
박정연이 팔짱을 낀 채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물었다.
“나한테는 연락 안 왔어.”
“저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지안이는?”
“사신가에서도 가주 오빠의 행방을 찾고 있어요.”
“대체 준이는 어디로 사라진 거야!”
박혁진, 허수, 이지안까지.
세 사람도 이준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이 셋 중 허수만이 이준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금역으로 가는 통로는 여전히 존재해. 문만 닫혀 있는데, 무슨 일이 있으신 걸까.’
허수는 이준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역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문이 닫혔다는 메시지와 함께 그의 몸을 튕겨 냈으니까.
금역은 이준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게이트부터 반응할 터.
그런데 금역은 문만 꼭꼭 걸어 잠글 뿐.
다른 반응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으셔야 할 텐데.’
허수가 이준을 걱정하고 있는 사이, 진경수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수야.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선생님이 걱정돼서 그러지?”
“그렇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힘내야지.”
“예. 형님.”
진경수가 축 처진 허수를 위로했다.
그때 아무 말 없이 한지유가 검을 챙겨 일어났다.
그러더니 운동장으로 가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준에게 받은 초식 훈련.
하나, 하나 꼼꼼히 펼치며 자세가 흐트러지면 초식을 처음부터 다시 펼쳤다.
“우리도 지유처럼 훈련하자.”
“그래요. 훈련하고 있으면 선생님께서 오실 거예요. 수야 일어나.”
정예은이 허수의 팔을 붙잡고 운동장으로 잡아끌었다.
허수는 정예은의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운동장으로 나왔다.
나머지 학생들도 훈련을 시작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무공 수련을 하면서 이준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뿐.
잡념을 잊기 위해 몸을 열심히 움직였다.
한지유는 초식을 되짚으면서 속으로 되뇌었다.
‘준이가 돌아오기 전까지 장백검문의 무공을 마스터해 놓겠어.’
그래야 이준이 기뻐할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특별 1반 학생들이 날마다 수련에 매진하고 있던 와중, 학교에서 게이트 토벌 참가 명령이 내려왔다.
특별 1반뿐만이 아니라 무사고 전교생이 해당됐다.
운동장에 모인 전교생과 선생들.
그들을 향해 한민성 이사장이 입을 열었다.
“최근 한국에 대규모의 게이트가 열렸다는 걸 알고 있을 거예요. 오대 가문과 마벽의 각성자만으로는 사람들을 전부 보호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무사고가 뒤를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대규모 게이트가 열렸다고 해도 무사고 학생들은 언제나 제외였다.
그들은 차세대를 이끌어 갈 각성자.
불상사가 발생하여 전 세대의 각성자들이 불귀의 객이 될 때를 대비하여 뒤를 이을 각성자가 있어야 했으니까.
그 때문에 언제나 무사고나 사마고 학생들은 열외 대상이었다.
“꽤 심각한가 봐.”
“이 선생님이 사라졌을 때 이 난리가 일어나다니.”
“불안한데.”
“천외천이 일부러 일으킨 게이트는 아니겠지?”
“설마.”
학생들이 웅성거릴수록 불안감은 급속도로 퍼져만 갔다.
이를 보고 있던 한민성이 주의를 끌었다.
“여러분!”
학생들이 입을 다물고 한민성을 보았다.
“이제 우리 무사고나 나설 때입니다. 옛날처럼 약했던 무사고는 사라졌습니다. 여러분의 능력을 믿으세요. 아니, 파천자께 수련받은 여러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파천자란 이름이 나오자 학생들은 자신감이 생겼다.
한국의 최고 각성자이자 세계 랭킹 3위인 파천자.
그런 사람에게서 훈련을 받았다.
S급 각성자 밑에서 조언만 들어도 실력이 상승하는 마당에.
그보다 훨씬 강한 사람에게 지옥 훈련을 받았는데 몬스터가 두렵겠나.
“나 특성도 개화했다고! 나도 잘 싸울 수 있어!”
“이참에 고딩의 무서움을 보여 주자.”
“몬스터 그까짓 거 내가 아작을 내 주겠어.”
학생들은 어느새 의욕을 불태웠다.
“자, 여러분의 이명을 널리 알리고 오세요. 저 또한 신기의 이름으로 참전하니, 모두 전장에서 봅시다.”
“와아아아!”
학생들이 함성을 질렀다.
전의를 불태운 그들은 각 가문에 배정되어 게이트 토벌에 참가했다.
* * *
그 시각.
프랑스 파리의 어느 밀실에서 비밀 회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힘은 적응돼 가고 있어?”
호리호리한 남자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어. 제대로 안착한 것 같아. 오빠는?”
“나도 얼추 모든 힘을 받아들인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어때요?”
왼쪽 입가에 점이 있는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에는 30~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나도 좋다. 이 힘은 정말 엄청나.”
“단전이 폐쇄되어 가문에서 쫓겨났을 때까지만 해도 절망에 빠졌었는데 내게 마력이 생길 줄이야.”
“모두 이휘 덕분이야.”
“고마워.”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밀실에 있는 모두가 한 거구의 청년을 보았다.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제가 아니고 베네로닉 님의 은혜입니다.”
“그분에게 빚을 진 건 두말할 필요가 없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심어 주신 분인데.”
“이 힘만 있으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어.”
그들의 눈에는 희망보다는 분노가 가득했다.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광기가 눈에 잔뜩 깃들어 있었다.
그들의 광기에 이휘의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때마침 한국에 균열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해요.”
“우리에게는 딱 좋은 기회군.”
“베네로닉 님께서도 저희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걸 허락했습니다.”
“오오!”
“드디어 내 것을 찾을 때가 왔어.”
사람들은 흥분에 들떴다. 얼마나 그리웠던 고향이던가.
모든 걸 앗아갔다고 해도 그리운 곳이었다.
그런데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단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심지어 단전이 깨진 상태도 아니었다.
새로운 힘.
서양의 마력을 받아들인 상태.
무공에 절대 밀리지 않는.
어쩌면 무공보다 더 뛰어난 마법과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자신들이었다.
그런 힘을 가지고 고향으로의 귀환이다.
금의환향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그때 그들의 흥분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괜찮겠어? 한국의 구조가 새롭게 개편된 것 같던데. 그리고 우리의 주적도 버젓이 있잖아.”
입가 옆에 점이 있는 여자가 이휘를 보면서 말했다.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고 있던 이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놈 이야기는 다신 꺼내지 마. 경고야.”
“감정만 앞서면 안 돼. 네 형은 전 세계 랭킹 3위에 올라 있어.”
“베네로딕 님의 힘을 개방하면 그까짓 놈 가뿐히 이길 수 있으니까 신경 꺼.”
“만에 하나라도….”
“지금 베네로딕 님의 힘을 무시하는 거야? 이 악마의 마력을?”
이휘가 오른쪽 팔을 들어 보였다.
주먹에 인장이 맺혔다.
그 인장을 타고 검붉은 기운이 주먹을 덮었다.
사이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 마기에 모두가 흠칫했다.
“내가 베네로딕 님의 힘을 의심하다니! 절대 아니야.”
“이준 그 새끼는 내가 목을 따 버릴 테니 카즈하 누나는 일본이나 손에 넣어 놔. 누나 가족의 복수는 내가 해 줄 테니까.”
“알았어.”
그녀의 이름은 사사키 카즈하.
25살의 나이로 사사키 가문의 장녀였다.
마법학회 프랑스 지부의 사조직인 성마회의 일원이었다.
“모두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세요.”
이휘의 말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밀실을 나갔다.
그가 제일 늦게까지 남아 있는 남자를 붙잡았다.
“형은 돌아가서 할 일이 있어요.”
“네가 어떤 명령을 내릴지 알고 있다. 중국으로 돌아가면 천외천이란 놈을 조사하라는 거지?”
남자의 이름은 류일천.
천마의 아들이었다.
“네. 베네로딕 님의 명령이에요.”
“천외천이 그분의 관심을 받을 정도로 대단한 놈들인가?”
“저희는 그저 하라는 대로 따를 뿐이에요. 저희 생각을 집어넣을 필요는 없어요.”
“그렇지. 우리는 베네로딕 님이 시키는 일을 하면 될 뿐이야.”
“연락 주세요.”
“알겠다.”
모두가 밀실에서 빠져나갔다.
이휘도 통로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여자가 그의 뒤를 따랐다.
“드디어 가문으로 복귀하시는 겁니까?”
“그토록 기다렸던 날이 왔어. 어머니가 잡혀 있는 곳은 알아냈어?”
“철혈검가의 뇌옥에 붙잡혀 계십니다.”
뿌득-
이휘가 이를 갈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분노와 증오가 가득했다.
“천한 핏줄 따위가 감히 내 어머니를 그딴 곳에 가둬놔? 가만두지 않겠어.”
“가문도 그에게서 돌려받으셔야 합니다. 도련님.”
“그래야지. 폐인이 된 신이 형에게도 베네로딕 님의 힘을 전해 주고 말이야. 귀국하면 할 일이 산더미겠어. 그리고 베네로딕 님께 바칠 드래곤 하트가 서초 게이트에 있다고 하니, 준비해 줘.”
“네. 도련님.”
“고마워.”
“별말씀을.”
짐을 챙긴 이휘가 성마회의 일원과 함께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동안 동양과의 관계를 일절 끊고 지냈던 서양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죽여라!]
[저놈들은 사람을 죽이는 악마야!]
[넌 언제나 혼자였어.]
[나만이 널 구원해 주는 구원자다.]
이준의 귀에 유혹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그 음성에는 살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살육에 대한 유혹은 멈추지 않았다.
혼원신공이 날뛰니 일어난 부작용.
심지어 세상이 붉게 보이기까지 했다.
‘파랑아 내 마기를 흡수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먹어.’
“뀨우!”
파랑이는 이준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파랑이가 마기를 흡수했습니다.]
[파랑이가 마기를 흡수했습니다.]
[파랑이가 마기를 흡수했습니다.]
……
……
……
[포식량: 90%]
파랑이가 마기를 먹어 준 덕분에 그나마 살 만했다.
‘배부르면 소화 시키고 쉬다가 해도 돼.’
“뀨뀨!”
[본좌가 예상했던 것보다 혼원신공이 덜 미쳐 날뛰는군.]
‘네가 생각한 게 뭔데?’
[혼돈의 악마가 작은 주인을 먹고 한바탕 피바람을 일으키는 거지.]
‘무서운 소리 하지 말아 줄래?’
[참 불가사의한 존재란 말이야.]
‘누가?’
[작은 주인 말이다.]
흑염마조는 이준의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머리 전체가 살육으로 가득할 터.
그럼에도 이준은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과 이야기를 나눌 정신도 있었다.
상식 밖의 인내심.
인간이 어떻게 천살성과 마신지체의 살육 의지를 버티는 걸까.
두 가지 특징 중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살인 충동은 광인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 두 가지를 버티면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그보다 더한 혼돈의 악마가 유혹하기도 했다.
이 모든 걸 견뎌야지만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
이준은 악마가 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다.
[둔재라고 들었는데, 천재과였다가 … 이제는 그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군.]
‘이제 알았냐?’
[어떤 정신력을 가져야지만 살인 충동을 버틸 수 있는 거지?]
‘다 이 몸이 뛰어나서 그래.’
[흠… 별종인 건가?]
‘어감이 안 좋다?’
[생각나는 단어가 딱히 없다.]
‘뭐 됐고, 이 정도면 1년 동안이 아니라 몇 달 정도면 나갈 수 있지?’
[정신력과는 별개다. 작은 주인이 혼원의 기를 컨트롤하지 못하면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 작은 주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람이 죽어 나갈 수 있어.]
이성을 유지하고 있으나.
혼원의 기운을 컨트롤하는 건 무리.
계속 대화를 나눠보려 했으나.
녀석이 거부했다.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이거 컨트롤할 수 있는 거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