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6화
“끌끌끌. 정말 재밌는 놈이 나타났구나.”
이준의 엄포에 합죽이가 된 가주들이었으나 진 가주만이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전과 다른, 진 가주의 모습에 이준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백마존인가 보네.”
“우리를 알고 있다니 듣던 대로 위험한 놈이구나 낄낄.”
“날 보고 싶었으면 직접 오지, 이 병신의 몸을 왜 빌린 거야. 모양 빠지게.”
“넌 우리가 무섭지 않느냐?”
“내가 왜 무서워해야 되지? 오히려 너희가 날 무서워해야 하지 않나?”
이준의 웃는 얼굴 위로 짙은 살기가 올라왔다.
백마존은 천주의 수하.
저들은 꼭 죽여야만 하는 자들이었다.
사부를 죽음으로 몰아간 놈들이었으니까.
“낄낄낄. 우리가 널? 지주를 죽였다고 기고만장해 있구나. 아이야, 우리가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은 건 무서워서가 아니다. 벼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어서다. 알겠느냐.”
이준의 살기에도 백마존은 개의치 않아 했다.
도리어 이상한 말을 지껄였다.
‘뭐? 벼가 익기를 기다려?’
개똥 같은 소리였다.
지주가 죽은 걸 전혀 신경쓰지 않는 태도.
같은 편이 맞나 의심이 들었다.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야? 내가 더 강해지면 너희가 위험할 텐데.”
“낄낄.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자신감 오지네.”
“지금보다 더 강해져라. 아니면 넌…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백마존이 신경을 긁었다.
마치 덜 자란 영물을 성장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먹겠다는 말로 들렸다.
뭐랄까 엿 같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백마존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사부의 무공을 보여 주면 조금이라도 긴장하려나.
이준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몸에서 무극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에 진 가주의 눈이 커졌다.
예상했던 상판대기였다.
하나 들려오는 말에 인상을 찌푸려야만 했다.
“그 정도의 파천멸기라면 합격점을 주겠다.”
“뭐?”
어이가 없었다.
극성으로 끌어 올리지 않아도 무극기였다.
혼원신공이 11성에 오른 지금.
무극기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기운보다 파괴적이었다.
그런 기운을 보고 합격점이라니.
정신이 나간 건가.
아니면 나비 효과로 인해 백마존도 전생보다 더 강해진 건가.
혼란이 왔다.
“네게 1년의 시간을 주마. 가진 재주를 다 발휘해서 강해지거라. 때가 되면 우리가 찾아가겠다.”
“그냥 지금 뜨자.”
백마존이 도발에 성공했다.
이준은 당장이라도 백마존을 찾아 죽이려는 듯 으르렁거렸다.
“낄낄. 생사경에 올랐다고 자만하지 말거라. 너만이 생사경의 경지에 오른 게 아니란다 아이야.”
자신의 경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직접 본 것도 아닌, 대리인을 통해서 말이다.
생사경에 오른 자신을 훤히 보고 있는 듯 하자 거북함이 들었다.
“여흥은 충분히 즐겼으니, 이만 가마.”
진 가주의 말이 끝날 때쯤이었다.
“어, 어르신.”
“이제 저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중소 가주들이 백마존에게 물었다.
“너희는 이제 쓸모가 없어졌으니 알아서 하거라.”
“예!?”
“마, 말씀이 틀리지 않습니까.”
“분명 저희를 거둬 주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저희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그들은 발등을 찍힌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백마존이 자신들을 버릴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도왕이나 검산 회장과 같은 힘까지 줬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버린다고?
그 누가 버림을 당할지 예상이라도 했겠나.
“쓰레기만도 못한 버러지에게 파천멸기의 파편을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지. 주제를 파악하는 것도 고수의 소양이다.”
“어르신께서 버리시면 저희는 죽은 목숨입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자, 자비를!”
중소 가주들이 엎드려서 진 가주를 향해 빌었다.
백마존에게 버려지면 낙동강 오리알 신세.
살길이 전무해진다.
하나 백마존은 그들을 거둘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그가 이준을 향해 말했다.
“이놈들은 선물로 주지. 대화 즐거웠다. 낄낄.”
백마존의 말이 끝나는 순간 진 가주의 고개가 떨어지면서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쓰러진 진 가주.
그리고 남은 중소 가문의 가주들.
그들은 덜덜 떨어야만 했다.
이준이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심기가 굉장히 불편해 보였다.
“히이엑!”
중소 가문 가주들은 이준에게도 필요 없었다.
그들은 나라를 배신한 각성자.
목숨을 살려 둘 필요가 없었다.
“사, 살려!”
“억.”
이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의 몸에서 나온 무극기가 중소 가주들을 감싸자.
푸확!
뇌수와 함께 핏물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나라를 배신한 각성자에게 내리는 가장 자비로운 행동이었다.
이준이 서 있는 배를 박차자.
쾅 소리와 함께 배가 산산조각 났다.
학생들이 있는 크루즈로 돌아온 그가 한민성에게 말했다.
“이제 가죠.”
한민성은 원래부터 이준의 가차 없는 손속을 알고 있었다.
그보다 그가 놀란 건 다른 것이었다.
‘생사경이라니. SSS 등급이 실제로 존재했어.’
SS 등급도 까마득한데 SSS 등급에 있다고 하니.
그동안 그가 어려웠던 이유를 이제야 깨닫게 됐다.
대단하다고 표현하는 것도 실례 같았다.
* * *
“와, 도착했다.”
“수학여행 오는데 뭐 이리 우여곡절이 많냐.”
“인정.”
“자자, 모두 짐 풀고 각자 베이스캠프를 짓는다. 실시.”
“예에.”
학생들은 크루즈에서 내리자마자 출발하기 전에 정했던 장소로 이동했다.
울릉도에는 마을이 하나도 없었다.
오직 울릉도 수비대가 기거하는 곳 뿐.
이 또한 가문 연맹회가 와해되는 바람에 유명무실해진 상태였다.
학생들은 울릉도 수비대가 살았던 곳으로 가서 각자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특별 1반 학생들 또한 바삐 움직였다.
진경수는 텐트를 치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 좀 이상하지?”
“그래 보여요. 백마존이 진 가주를 통해서 나타난 이후로 줄곧 저 상태인 것 같은데….”
“제가 가 볼까요?”
“아니에요. 형님. 막내인 제가 가 볼게요.”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맞대고 있는 네 명.
진경수와 박혁진, 그리고 허수와 홍원찬이었다.
그중 막내인 홍원찬이 허리를 펴려고 하자 박혁진이 말렸다.
“네가 간다고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
“나도 같은 생각이야. 정연이나 지유면 몰라도.”
“두 분은 캠프를 설치하느라 바쁩니다.”
허수의 말대로 박정연과 한지유는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사실 그녀들도 이준이 저기압이라는 걸 바로 눈치챘다.
하나 이때는 말을 거는 것보다는 혼자 놔두는 게 좋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이준을 가장 잘 아는 두 사람.
특히 박정연은 여러 번 이준에게 가려던 걸 꾹 참았다.
그러던 그때 한지유가 이지안을 불렀다.
“지안아.”
“네. 언니.”
“준이한테 가 봐. 배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진 것 같은데 네가 말을 걸어 보는 게 좋겠어.”
“제가요?”
“응. 준이가 너라면 괜찮아 할 거야.”
이준은 같은 가문인 이지안을 끔찍이 아꼈다.
그가 조용석을 괴롭힌 이유도 이지안 때문이라고 공공연하게 소문이 날 정도였으니.
훈련할 때도 남모르게 이지안을 편애하기도 했고.
모두가 그 사실을 알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준이 이지안을 이성이 아닌, 친여동생처럼 아끼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알겠어요.”
이지안이 고개를 끄덕이곤 이준에게 갔다.
“괜찮으세요?”
“뭐가?”
“계속 저기압이시잖아요.”
“그렇게 보여?”
“네. 다들 걱정하고 있어요.”
이준이 고개를 들어 특별 1반 학생들을 보았다.
베이스캠프를 설치하면서 자신을 향해 계속 곁눈질을 하는 게 아닌가.
자신과 눈이 마주치면 후다닥 고개를 돌렸다.
이준이 피식 웃었다.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 난 괜찮으니까 애들한테 가 봐.”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말아요. 오빠한테는 사신가를 포함한 특별 1반 선배님들이 있잖아요.”
이지안의 위로였다.
전생과 달리 외톨이가 아니었다.
친구는 물론 사신가란 든든한 아군이 있지 않나.
“알아. 그래서 예전과 같은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
그랬기에 지금과 같은 상황을 쉽게 넘기면 안 됐다.
백마존은 타인의 눈을 통해서 무극기를 봤다.
그럼 위험을 인지하고 경계를 해야할 터.
한데 백마존은 경계보다 호기심을 보였다.
다른 건 더 없냐는 느낌이었다.
‘전생보다 실력이 더 강해진 건가? 하지만 세계 랭킹에서 내 위에 있는 사람은 고작 두 명뿐이야.’
[??? - 1위]
[??? - 2위]
[파천자 이준 – 3위]
백마존이 전생보다 강해졌다면 세계 랭킹의 판도가 지금과는 많이 다르지 않을까.
그만큼 백마존은 전생이나 현생이나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찜찜함은 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빠.”
‘그들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괜히 들쑤시고 다녀서 좋을 건 없었다.
전력이 부족한 쪽은 자신.
백마존이 마음 놓고 활동을 시작한다면 손해 보는 건 그들이 아닌, 자신이었다.
“가주 오빠!”
“어?”
“무슨 생각했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이준은 이지안과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눴다.
시답잖은 것부터 무공에 관한 것까지.
노력하는 이지안의 모습에 이준은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그의 기분이 좀 풀려 보인걸가.
특별 1반 학생들도 합세했다.
* * *
그 무렵.
이준과 대화를 끝낸 백마존의 입에서 선혈이 흘러나왔다.
“낄낄 대단한 놈이야. 그 사이에 나에게 타격을 줬어.”
거리가 가까운 것도 아니었다.
수천 킬로가 떨어진 거리.
그럼에도 무극기는 백마존의 심령에 타격을 가했다.
“목숨을 부지한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돼.”
“살이 떨리게 강하군.”
“각성자란 존재가 우리보다 강할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백마존들이 수군거렸다.
지주의 수하에게 이준에 대해 얼추 들었다.
천주와 같은 파천멸기를 지니고 있는데 어찌 강하지 않겠나.
약한 게 이상했다.
“1년이면 어디까지 강해질 것 같나?”
“아직 약관(20살)도 안 됐는데 생사경에 도달했으면 천주만큼 강해지지 않을까.”
“평생을 무공에 바쳐도 화경에 도달하지 못한 놈들이 수두룩한데 천재군.”
백마존은 진 가주를 통해서 말하던 것과는 달리 이준을 인정하고 있었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각성자 시스템이 한몫하고 있어.”
“아주 놀라운 기능이야.”
“우리의 경지도 훤히 보여.”
“이 시스템만 있으면 강해지는 건 시간문제다.”
백마존은 각성자 시스템을 신기하게 봤다.
무림에서 넘어온 그들에게도 생긴 각성자 시스템.
배우고 있는 무공은 물론, 인적 사항까지 주르륵 나왔다.
“이걸 이용해서 우리도 강해진다.”
“파천자를 상대할 수 있도록 1년간 죽어라 수련만 하는 거야.”
“수련이라면 자신 있지.”
“인주와 지주는 천주의 계획을 전혀 모르지만 우린 달라. 천주를 실망시키지 말자.”
백마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사형제도 모르는 천주의 진짜 목적을 알고 있었다.
왜 파천혈신의 무공을 지닌 이준을 그냥 두는지.
왜 그가 더욱 강해질 때까지 기다리는지.
천주와 백마존만이 알고 있었다.
“1년 뒤, 파천자 사냥을 시작한다. 모두 폐관에 들라.”
백마존이 있는 곳에 일마존의 목소리가 들렸다.
“존명!”
자리에서 일어난 그들이 손을 내리긋자 허공에 생기는 균열들.
자신에게 할당된 공간으로 들어가더니 곧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