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5화
[제자 놈아. 이 사부가 우화등선한 게 그리 아니꼬운 게냐.]
예전의 괴팍한 말투였다.
사라지기 전의 애정 있는 말투가 아니었다.
“당연히 아니꼽죠. 제자를 놔두고 자기만 우화등선했는데 좋을 리가 있겠어요?”
[끌끌끌. 이 사부를 만나고 싶다면 너도 우화등선할 수 있게 강해지거라. 물론 네게는 백 년도 이르겠지만 말이다.]
무극자 사부의 비꼬는 웃음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어찌나 얄미운지 보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났다.
씩씩거리고 있는데 사부가 자신을 불렀다.
[제자야. 준아.]
목소리만 들리던 무극자 사부의 모습이 보였다.
눈앞에 나타난 사부의 모습에 이준의 눈이 커졌다.
그러다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왜요.”
눈앞의 사부는 가짜였다.
사부의 모습만 하고 있을 뿐.
기도도 느껴지지 않았고, 생명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홀로그램.
사전에 미리 녹화된 모습이었다.
이를 마법으로 구현해 낸 녀석은 테구르일 테고.
[사부가 보고 싶으면 이곳으로 언제든 오거라.]
“그럴 생각이었어요.”
[너무 자주 오지는 말고.]
“제 마음이거든요.”
형체 구현이 다 끝났는지.
사부가 초상화로 빨려 들어갔다.
실감 날 정도로 기가 막히게 구현해 놓았다.
“또 올게요.”
[그러거라.]
이준이 피식 웃었다.
영혼이 소멸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만 생각했던 사부였다.
“참, 별난 노인네라니까.”
이준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어떠셨습니까요?”
테구르가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이준은 녀석의 어깨를 붙잡았다.
“넌 앞으로 내 왼팔이다.”
“제, 제가 말입니까요? 왼팔은 샥쿠 님 아니셨습니까요.”
“네가 해. 아주 만족스러웠어.”
“감읍할 따름입니다요.”
테구르가 뛸 듯이 기뻐했다.
녀석의 신분 상승 욕구는 엄청났다.
눈치가 빠른 이유도 그 때문.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면 아부는 필수였다.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거야?”
“그게 사실….”
테구르는 이준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했다.
* * *
무극자가 사라지기 일주일 전.
이준이 특별 1반 학생들을 가르치러 학교에 갔을 때 무극자는 테구르를 호출했다.
“부, 부르셨습니까요. 큰 어르신….”
테구르는 혼원문에 오자마자 곧바로 몸을 최대한 낮추었다.
십미호보다 강한 힘을 가진 절대적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태생이 그린급 몬스터였던 테구르는 무극자가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다.
하나 그는 주인의 스승.
싫어도 마주해야 했기에 두려움을 꾸역꾸역 참고 혼원문에 번질나게 드나들었다.
“황금이 말로는 네가 손재주가 뛰어나다고 하던데.”
“마, 맞습니다요.”
“서양의 마법도 부릴 수 있느냐?”
“어, 어떤 마법을 말씀하시는지….”
“내가 사라진 후, 준이에게 전할 말이 있느니라.”
일회성으로 남기는 건 무극자도 가능했다.
그러나 듣고 싶을 때 다시 듣게 하는 건 무극자도 힘들었다.
“마법 공학으로 크, 큰 어르신이 생각하신 걸 하실 수 있게 만들어 오겠습니다요.”
“준이가 오기 전에 만들어 오거라.”
“예, 예!”
테구르가 몸을 일으켜 혼원문을 내려갔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무극자 앞에 나타났다.
“이것입니다요.”
테구르가 무극자에게 손바닥만 한 사각형 모양의 나무를 건넸다.
“이 버튼을 누르면 작동하는 건가?”
“그렇습니다요. 다시 한번 누르면 녹음이 완료되는 것입니다요.”
“알았다.”
“자, 잠시만.”
“뭐지?”
“제가 잠시 할 일이 있어서… 결례를 죄송합니다요.”
테구르가 마법 공학으로 만든 나무 상자를 무극자의 손에서 가져왔다.
그리고 상자를 작동시키자 빛이 흘러나오고 그 빛을 이용해 무극자의 곳곳을 훑었다.
“뭐 하는 짓이냐.”
“큰 어르신의 모습을 영상에 담고 있습니다요.”
“내 모습을?”
“제가 눈치가 좀 빠릅니다요. 큰 어르신께서 곧 떠나실 것 같으니 주인님을 위해 영상에 담아 놓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요.”
테구르는 무극자가 불편하지 않게.
재빠르고 정확하게 무극자의 모습을 담았다.
“이제 큰 어르신께서 녹음하고 싶은 걸 하시면 됩니다. 전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요.”
테구르가 조심히 몸을 돌리자.
무극자가 테구르를 향해 말했다.
“내가 사라지거든, 준이가 가장 힘들어할 때 이걸 주거라. 알겠느냐.”
“명을 받들겠습니다요.”
“가 보거라.”
“넵!”
* * *
그때를 떠올리던 테구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서운 줄만 알았던 큰 어르신이었는데 주인님께만은 자상하신 것 같습니다요.”
“응. 나한테만 자상하시네.”
이준이 빙긋 웃었다.
그늘진 얼굴은 어느샌가 예전의 밝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혼원문도 제 모습을 찾고 있고, 영영 못 볼 줄 알았던 사부도 홀로그램으로나마 볼 수 있게 됐다.
씁쓸하고 외롭던 감정이 다 날아갔다.
“구르야.”
이준이 테구르의 앞 자를 빼고 말했다.
애칭으로 보였다.
“옙! 주인님.”
“날 생각하는 마음이 아주 기특해. 내가 조에게 말해 널 불의 신봉자 중 제1 충복으로 만들어 주마.”
“저, 정말이십니까요?”
“당연하지. 사부님과 말을 섞을 용기도 가졌으니 자격은 충분하지.”
“가, 감사합니다요. 앞으로 충성을 다해서 모시겠습니다요!”
테구르가 이준을 향해 거수경례를 취했다.
이준도 녀석에게 거수경례를 해 주었다.
그는 테구르 덕분에 밝은 모습을 되찾게 됐다.
* * *
그 무렵.
수련동에서 나온 박씨 남매는 검제와 철혈여검을 볼 수 있었다.
“너희였느냐.”
검제는 두 사람을 보고 안도했다.
철혈검가 구석에서 엄청난 기도가 느껴졌다.
이에 검제와 철혈여검이 바짝 긴장을 했다.
철혈검가에 천외천이 불쑥 나타난 게 아닐까 하고.
우려와는 달리 검제와 철혈여검을 긴장하게 한 사람은 박씨 남매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보고 싶었어요.”
오랜만에 조부와 조모를 본 박정연이 철혈여검의 품에 뛰어들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그동안 왜 이렇게 소식이 없었어. 게이트가 닫혀서 이 할미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철혈여검 김혜연이 박정연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녀의 음성에는 손주에 대한 걱정이 한 가득이었다.
“정말 놀라운 경험을 했는데 들어 보실래요?”
“그래. 그동안 너희가 수련동 게이트에서 겪은 이야기를 해 보거라.”
더불어 기도가 변한 손주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네 사람은 평상에 나란히 앉았다.
박정연은 수련동 게이트에서 청룡과 만난 이야기를 꺼냈다.
이후에는 청룡의 수련을 받으면서, 어떤 훈련을 했는지.
하나, 하나 자세히 이야기했다.
박혁진은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청룡을 본 것뿐만이 아니라 수련까지 받았다니. 이 할미도 보지 못한 사신수를 손주들이 먼저 봤구나. 그래서 너희 기도가 이리 변했한 것이야?”
김혜연과 검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신수에게 선택된 각성자가 자신들의 손주들이었다.
평생 있을까 말까한 기연을 손주들이 얻은 것이다.
검제는 호기심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지금 실력은 어떻게 되느냐.”
“SS급 초입에 올랐어요.”
“허, 허허. 어느새 이 할애비와 비슷해졌구나.”
검제는 허탈하게 웃었다.
청룡에게 수련을 받았다고 SS급 초입, 현경 초입에 올랐다.
70 평생을 검만 잡았는데, 손주들이 자신의 경지를 따라잡았다.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투지가 불타올랐다.
명색에 할아비인데 손주들에게 약한 모습은 보일 수 없었으니까.
“이제 준이한테도 비벼 볼 수 있게 됐어요.”
“애석하게도 그건 무리다.”
박혁진이 자신감 있게 말했지만 검제가 고개를 저었다.
“SS급 초입에 들어섰으면 너희도 세계 랭킹을 볼 수 있을 듯하니, 직접 확인해 보거라.”
박씨 남매는 동시에 홀로그램을 열었다.
훈련으로 인해 각성자 시스템을 열지 않은 두 사람이 새로 생긴 세계 랭킹 창을 켰다.
[새로운 (진)세계 랭킹이 갱신되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강한 200인이 표시됩니다.]
[검화 박정연 – 140위(NEW)!]
[검룡 박혁진 – 141위(NEW)!]
“제가 할아버지 바로 밑에 있어요!”
박정연이 소리치며 좋아했다.
가장 존경하는 할아버지 밑에 랭크 됐다는 건 굉장한 성과였으니까.
“창제, 아니 이제는 파천자라 불러야겠지. 그를 찾아보거라.”
“파천자요?”
“너희가 없는 동안 이명이 바뀌었다.”
박정연은 이준을 찾기 위해 랭킹 창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이준의 랭킹을.
[파천자 이준 – 3위(NEW)!]
“헉!”
“이 할애비가 왜 무리라고 했는지 알겠느냐.”
“악! 이 자식은 랭킹이 왜 이렇게 높은 거야!”
박혁진은 절친의 순위가 생각보다 훨씬 높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청룡에게 수련받아 뒤에 바짝 따라붙었을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
생각보다 이준은 굉장히 높은 곳에 존재했다.
“너 혼자 계속 치고 나간다 이 말이지? 아직 1, 2위 비었으니까 내가 꼭 따라잡고 말겠어.”
박혁진의 눈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이제는 친구의 발목을 잡지 않을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먼 것 같았다.
그로 인해 박혁진의 수련 욕구는 불탔다.
“저 다시 수련하러 갑니다.”
수련동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돼 쉴 법도 하지만, 바로 검을 들었다.
“어디 이 할아비가 수련 상대가 돼 주마.”
“빡세게 부탁드려요!”
SS급 각성자 두 명의 격돌.
철혈검가에 때아닌 폭풍이 휘몰아쳤다.
* * *
일본의 대균열 이후.
세상은 빠르게 변해 갔다.
한국에서 제일 큰 이슈는 가문 연맹회의 붕괴였다.
사신가는 물론 철혈과 만독, 신기, 진씨 가문이 이탈했다.
오대 가문이 나가자 제 살길을 모색하는 중소 가문들.
그중에서도 큰 가문이 가문 연맹회를 유지하려고 움직였으나 체제의 붕괴를 막을 순 없었다.
그 사이 오대 가문과 마벽의 수뇌부들이 모였다.
철혈에서는 검왕 박영섭이, 만독에선 철왕 정현재가, 신기와 진씨에서는 한지웅과 진병철이 대표로 왔다.
그들은 아직 회의장에 오지 않은 사신가의 대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철왕. 무슨 좋은 일이 있었습니까?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하하, 좋은 일이라니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철왕이 손을 저으면서 부정하자 검왕이 대신 말했다.
“아무 일도 없긴, 예나와 예은이가 SS급 무공을 얻어 좋아죽겠다고 나한테 전화한 사람이 누구지?”
“크흠. 그때는 너무 놀라 체통을 잊었다.”
“헉! 두 영애께서 SS급 무공을 말입니까? 정말 축하드릴 일입니다.”
이에 뇌마 홍엽상이 제 일인 것처럼 축하해 줬다.
다른 대표들도 철왕을 부러워했다.
“모두 감사합니다.”
“헌데 어떻게 SS급 무공을 얻었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노하우는 없습니다. 그저 파천자께서 우리 아이들을 좋게 봐주셨지 뭡니까.”
“허, 특성뿐만 아니라 무공도 개화를 해 주신다는 말입니까? 파천자께서는 정말 대단합니다.”
“대단할 뿐인가요. 인성은 어찌 그리 좋은지. 가진 거 다 퍼 주십니다.”
그들의 말에 신기가주 한지웅이 실소했다.
이준은 절대 가진 걸 다 퍼 주지 않았다.
필요한 것만 퍼 주는 대신 그만큼 회수해 갔다.
물론 이준이 주는 게 너무 커, 그 사실을 까맣게 잊을 뿐.
손해보는 장사를 안 하는 이준이었다.
사대 가문이 모두 그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그중 제일 많이 받은 건 신기지가.
장백검문의 무공뿐만 아니라, 신기지가의 문제점을 뜯어고칠 수 있게 해 줬다.
자신의 목숨 또한 구해 주기도 했다.
그래서 가주들의 말에 신기가주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던 그때 철왕이 중요한 사실을 말했다.
“아, 노하우라면 하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