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3화
패천기공은 무극기의 원류였다.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파멸적인 무공.
무극자 또한 이 패천기공을 통제하려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하늘도 떨게 만드는 고금제일인조차 제어를 실패한 무공.
사용하는 즉시 한 도시를 넘어 지역을 아예 날려버리며 시전자조차 잡아먹는 미완의 무공이었다.
위험성을 인지한 무극자는 선택해야만 했다.
무공을 폐기할 것인지.
아니면 무공은 그대로 남긴 채 사용을 금할지.
이대로 무공을 폐기하기엔 무극자는 패천기공이 너무도 아까웠다.
혼원신공과 더불어 최고의 무공을 만들었다고 자부했으니까.
결국 폐기하지도 못하고 후세에 남기지도 않았다.
대신 패천기공의 안전한 부분만 골라 새로운 무공을 만들었다.
그게 바로 무극기였다.
무극기는 시전자를 해치지 않을뿐더러 절대적인 공격과 방어를 담당했다.
가장 이상적인 무공.
그 무공의 원류가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파직-
사신전을 보호하던 결계에 균열이 생겼다.
이준의 풍살로 생겼던 균열이 무극자의 패천기공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무공.”
무극자의 입에서 짧은 음성이 들려왔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공간의 색이 사라졌다.
온통 회색으로 뒤덮였다.
다시 제 색을 되찾자.
콰아아앙!
사신전이 터졌다.
그 어떤 공격에도 버티던 장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결계가….”
이준도 입을 떡 벌렸다.
사신전에 펼쳐진 결계에는 사신수의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그 어떤 공격도 버틸 수 있었던 것.
인간이 부수는 게 가능한 영역이 아니었다.
그런데 무극자 사부는 사신수의 힘마저도 망가트렸다.
다행인 건 사신전만 무너진 거다.
아무리 강한 공격이어도 혼원문에는 사신전보다 더 단단한 결계가 주변을 보호하고 있었다.
“이게 패천기공의 일공이다. 다음이 마지막이 될 것이니 잘 봐두거라.”
패기를 뿜어내던 무극자 사부가 힘을 거둬들였다.
“후우우.”
그가 심호흡을 한 후 눈을 번쩍 떴다.
눈이 붉은색으로 물든 순간.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진천.”
짧은 중얼거림의 결과는 결코 작지 않았다.
이준은 저도 모르게 욕을 해 버렸다.
“미친!”
혼원신공을 극성으로 펼치는 건 물론.
천살성까지 다시 깨워 무극기를 펼쳤다.
무극자의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기운이 거대한 해일처럼 주변을 덮쳤다.
일그러진 게이트의 하늘.
얼마나 큰 힘이 일어났으면 갈라진 하늘 사이로 바깥세상이 보이는 걸까.
강기공의 극치였다.
무형의 기가 주변의 공간마저 찢어 발기고 있었다.
현경의 고수라도 패천기공이 펼쳐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다.
SSS급 초입, 생사경에 오른 이준이기에 무극자 사부가 펼친 패천기공을 느낀 것.
다른 사람이었다면 ‘뭐 하는 짓이지?’이런 생각을 하고 죽었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할 때 빛무리가 자신을 덮쳤다.
패천기공의 진천에 휩싸였다.
하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감았던 눈을 뜨자 주위가 삭막했다.
혼원문이 사라졌다.
그것도 흔적도 없이.
자신과 사부가 서 있는 공간은 허허벌판이 되었다.
아니, 죽은 땅이라 하는 게 옳았다.
나무와 풀잎, 토양이 패천기공으로 인해 생명을 잃었다.
보여 줬던 기운이라면 4대 성지의 금역마저도 통째로 날렸을 터.
그 와중에 사부는 자신을 생각한 것이다.
이곳은 자신이 주인으로 있는 곳이니까.
“아.”
저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혼원문은 사부님이 있던 공간.
허탈했다.
멍을 때리고 있는데 무극자 사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았…느냐….”
그토록 정정하던 사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겨우 목소리를 내어 말하는 것 같이 힘겨워 보였다.
“보지… 못했어요.”
“아니 넌… 보았느니라. 이 사부의 마지막 정수를….”
“사부님….”
이준의 눈동자가 떨렸다.
이제 영영 사부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아쉽고 서운했다.
꼭 이렇게 헤어져야만 하는지.
조금 더 곁에 있으면 안 되는지.
사부는 부모에게서도 느껴 보지 못한 든든한 우산이 되어 준 사람.
그런 사부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네게 패천기공을 전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구나…. 너라면 그 무공을 제어할 수 있으리라 본다.”
“열심히 수련할게요….”
“고금제일인의 제자라면 그래야지. 그동안… 즐거웠느니라.”
“저도 사부님을 만나 좋았어요.”
이제는 무극자의 형체가 어깨 위쪽만 남았다.
무극자는 그 어떤 때보다 홀가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렸다.
“이 못난 사부의 제자가 되어 줘서… 고맙구나. 또 보자꾸나.”
그 말을 끝으로 무극자가 먼지처럼 사라졌다.
“사부님. 정말 감사했습니다.”
무극자가 서 있는 곳을 향해 이준이 아홉 번의 절을 올렸다.
그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 * *
4대 성지의 금역 하늘.
흑염마조가 게이트를 열고 나타났다.
[한발 늦었어.]
작은 모습을 한 채 혼원문이 있던 자리의 하늘을 맴도는 흑염마조였다.
상공을 날다가 이준이 상체를 일으키자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큰 주인은 과거에도 훌쩍 떠나더니 지금도 예고 없이 사라졌군.]
“혼원문이라도 남겨 놓고 가시지.”
[작은 주인이 큰 주인을 그리워하며 쓸쓸하게 지내길 원치 않아서 일거다.]
“알아. 그래도 한 번씩은 떠올릴 수 있잖아.”
[큰 주인이 그렇게 좋았나?]
“계승을 못 한 실패작을 구원해 준 게 사부님이잖아. 부모이자, 친구였던 분인데 안 좋았을 리가 있어?”
[그래도… 큰 주인은 좋겠군. 자기를 진심으로 위해 주는 제자가 있어서 말이야.]
“영혼이 소멸됐으니 이제 사부님은 영영 못 보겠지?”
흑염마조가 침묵했다.
침묵은 곧 긍정.
이준이 쓰게 웃었다.
당연했다.
영혼까지 소멸된 사람을 어떻게 다시 볼 수 있을까.
미련이 남아 그냥 물어본 것이다.
그런데 흑염마조가 이상한 말을 했다.
[피의 운명은 작은 주인이 생각한 것보다 더욱 가혹하다.]
“응? 무슨 말이야?”
[미래에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흔들리지 마. 큰 주인은 작은 주인이 감정에 약하다는 걸 항상 우려했다.]
“뜬금없이 뭐라는 거냐.”
[본좌가 작은 주인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사부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로 대신한 흑염마조였다.
이준은 별거 아닌 듯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해 안 되는 걸 억지로 생각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그보다 여긴 어떻게 하지?”
삭막하게 변한 혼원문 자리.
이준이 공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부와의 추억은 얼마 없었으나 마음이 허했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
[같이 생각해주마.]
흑염마조와 파랑이가 옆에 있어 줬지만,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다.
어렸을 적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만큼 자신의 마음에 사부가 크게 자리잡은 것이다.
주인의 기분이 안 좋은 걸 느껴서일까.
파랑이가 얼굴을 비비면서 애교를 부렸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허공을 응시했다.
거기에는 무극자 사부가 자신을 향해 허허롭게 웃고 있었다.
무림인에게는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했던 사부였으나.
자신에게는 항상 따뜻했던 사람.
사부가 사라진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보고 싶었다.
“내가 이러고 있으면 사부님께서 안 좋아하시겠지?”
[아끼는 제자가 슬픔에 빠졌는데 좋아할 스승이 어디에 있겠나.]
흑염마조의 말에 이준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애써 무극자 사부를 잊어보려고 몸을 움직였다.
혼원신공을 끌어올리며 사부가 보여줬던 패천기공을 떠올리는데 흑염마조가 고개를 저었다.
[작은 주인. 그 상태로 패천기공을 생각하는 건 자살행위다. 다른 일을 찾아봐.]
“그런…가?”
이준이 혼원신공의 운용을 멈췄다.
정신을 집중해도 모자란 게 패천기공이었다.
그런데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패천기공을 생각한다?
무극자를 따라 저승으로 가는 길이었다.
“여기서 나가는 게 좋겠어.”
이준은 게이트를 열어 바깥으로 나갔다.
게이트에 있으면 사부가 계속 떠오를까봐 밖에서 일을 찾았다.
하나 바깥에 있어도 이준의 멍 때림은 계속되었다.
* * *
특별 1반이 수련하는 운동장.
잠깐 쉬는 시간이었다.
“벌써 10분이 넘은 것 같지 않습니까?”
허수가 진경수를 향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선생님이 왜 저러시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허수 넌 아는 거 없어?”
“제가 형님, 아니 선생님을 많이 안다지만 이번에는 모르겠습니다.”
“네가 가서 한 번 물어봐.”
“저 분위기에 말입니까?”
이준은 앉은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은 공허했다.
마치 나사가 빠진 사람처럼.
어깨는 축 틀어져 있는데 또 하찮지는 않았다.
쓸쓸한 모습이 이준에게 다가가는 걸 되려 꺼리게 만들었다.
무려 20분이라는 쉬는 시간이 주어지자.
더는 안 되겠는지 차경진 나섰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이준에게 물었다.
“가주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
하지만 이준은 여전히 멍을 때렸다.
차경진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이준을 불렀다.
“가주님!”
“…네?”
“안색이 안 좋습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아무 일도 없어요.”
“근래 들어서 가주님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제가…요?”
“네.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행동하고 계십니다.”
“아….”
이준은 자기도 모르게 시간을 봤다.
5분만 쉬게 하려고 했는데 벌써 20분이나 흐른 게 아닌가.
“제가 딴 생각을 했나 보네요. 다시 훈련 시작하죠.”
이준의 말에도 특별 1반 학생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준을 바라봤다.
언제나 씩씩하고 해맑았던 이준.
최근 들어서는 그 해맑음이 외로움으로 바뀐 상태였다.
그래서 그런지 학생들은 이준을 대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예전이었다면 쉽게 다가가 말을 걸었을 터.
갑자기 더 올라간 명성과 이준의 분위기 때문에 학생들은 눈치만 보고 있었다.
“가주님께서 이러시면 학생들도 수련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차경진의 팩트에 이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아.”
흠칫.
차경진을 포함한 모두가 움찔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자기 목을 붙잡는 학생들.
“…읍!”
“컥!”
“흡…!”
그들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에서 몸부림을 쳤다.
이를 본 이준은 아차 싶었다.
“이런!”
이준은 혼원신공을 운용하여 주변의 대기를 안정시켰다.
몸부림치던 학생들도 그제야 숨이 쉬어지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하악… 하악!”
이준은 SSS급 초입이자 생사경 초입에 오른 각성자였다.
기분에 따라 주변 환경이 변하는 경지에 있었다.
그의 한숨은 차경진과 학생들의 숨통을 조이기에 충분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해야겠습니다.”
이준이 자리를 박차고 사라졌다.
학생들은 숨이 안정되자 이준을 걱정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
“그치? 정말 이상하다는 말이야.”
원래 무사고 출신들은 이준을 잘 알아서 현재 이준의 상태가 심각하다가 여겼다.
하나 류가을을 비롯한 사마고 출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분이 안 좋을 때도 있지 않아? 사람이 항상 웃고만 지낼 수는 없잖아.”
류가을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동의하는 말.
하지만 이준은 달랐다.
기분이 엿같으면 오히려 더 웃는다.
저렇게 ‘나 쓸쓸하고 외로워요.’라고 티를 내지 않았다.
류가을의 말에 한지유가 이준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입을 열었다.
“보통은 그렇지만 이준은 달라. 언뜻 기분파처럼 보이지만 흥분하거나 화가 나면 좀처럼 마음을 알 수 없는 게 이준이야. 한마디로 포커페이스와 감정 컨트롤을 정말 잘하는 거지.”
한지유의 정확한 판단이었다.
이준을 겪으면 생기는 의문.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예상도 해보고 의중을 떠보기도 하지만 모두 실패.
오히려 이준을 상대하는 이들이 마음을 간파당한다.
이게 이준.
마음을 철저히 숨기던 이준이 대놓고 감정을 드러냈다는 건 정말심각한 일이었다.
“호, 혹시!”
허수가 놀란 표정을 짓자 정예은이 되물었다.
“왜? 뭐 생각나는 거라도 있어?”
“주화입마 아니실까?”
“…….”
“에라이! 저게 어딜 봐서 주화입마야.”
“억, 죄송합니다.”
정예은 대신 언니인 정예나가 허수의 등을 때리면서 응징했다.
“아니면 허수가 혼자 연애한다고 배가 아프신 건가?”
진경수의 말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남자들을 뺀 여자들이 한심한 눈으로 진경수를 보았다.
“무시해. 그냥 뇌가 없는 놈이야.”
“네. 언니.”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이준의 상태가 왜 저러는지 원인을 찾았다.
한편 이준은 무사고의 기숙사 뒤편 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