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1화
“호호호. 패기로워서 마음에 들어.”
지주가 요사스럽게 웃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준을 가지고 싶어 하는 탐욕이 이글거렸다.
“섭혼음을 써도 나한테는 안 먹혀.”
이준이 귀를 후벼 파면서 말했다.
귀찮은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그는 지금 혼란스러운 상황.
지주가 여자라는 것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조야. 물어볼 게 있어.]
[뭐냐 작은 주인아.]
[사부님의 제자들은 다 남자 아니었어?]
[맞다. 그건 왜 물어보지?]
[내가 지금 지주를 마주했는데 여자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정말인데. 네가 나와서 확인해 봐.]
파지직-
허공에 거대한 균열이 생겼다.
오사카를 정화하고 보금자리로 돌아갔던 흑염마조가 다시 나왔다.
이준의 말에 자존심이 상했던지.
이전보다는 몸집을 키운 상태였다.
그래 봤자 독수리의 몸만 했다.
이준의 머리에 내려앉은 흑염마조가 검은 눈을 빛냈다.
[저, 정말이구나.]
흑염마조도 상당히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흑염마조는 평생을 무극자와 같이 보냈다.
무극자의 성격, 행동, 버릇, 대인 관계까지 모르는 게 없었다.
특히 제자에 관해서는 유독 자세히 알았다.
무극자가 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녀석은 마조와 황금이 뿐이었으니까.
[풍뢰공을 익히고 있고, 파천멸기의 파편도 몸에 있어….]
[탁소여라는데 탁능기한테 누나나 여동생이 있었어?]
[그럴 리가! 큰 주인은 천애 고아만 거둬들였다.]
흑염마조와 이준이 전음을 주고받는 사이.
지주의 비명이 들렸다.
“흑염마조!”
“지주, 흑염마조라 하셨습니까.”
“저, 저 까마귀를 보세요!”
[누굴 보고 까마귀라고 하는 것이냐!]
흑염마조가 지주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흑염을 뿌리면서 화를 냈다.
존자들은 기억의 저편을 끄집어내며 흑염마조를 떠올렸다.
“정말입니다!”
“흉조가 어떻게….”
“이곳에 있으면 안 될 새가 아닙니까.”
“설마….”
“아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지주.”
흑염마조를 떠올린 존자들이 불안해했다.
당당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겁을 잔뜩 집어먹었다.
이에 지주가 빼액- 소리쳤다.
“분명 그 노괴는 죽었어!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고!”
흑염마조는 파천혈신의 상징이었다.
파천혈신과 같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던 흉조가 나타나자 무서웠다.
혹시라도 파천혈신이 살아 있을까 봐.
진정한 재앙은 자신들이 아니라 파천혈신이었다.
“각성자 따위가 인주를 가볍게 제압한 것도 이, 이상했습니다.”
“천주도 풀지 못한 마겁의 봉인을 푼 것도 그렇고….”
“파천멸기를 사용한다는데.”
“모두 무,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그 괴물은 백 년 전에 죽었습니다!”
“우리가 시체를 확인하지 못했지 않소.”
“그건….”
존자들의 눈이 좌우로 거칠게 흔들렸다.
이준과 조금이라도 떨어지려고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때였다.
[맙소사!]
[왜? 뭐 생각났어? 출생의 비밀이라든지.]
[둘째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
[탁소여.]
[탁능기, 탁소여. 그래, 맞아! 놈이 변태라는 걸 잊고 있었어.]
[변태?]
이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주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래. 놈은 문란하기로 유명했지. 남색을 즐기는 거로도 유명했는데 둘째가 남자를 탐하는 걸 큰 주인에게 들켜 몇 번 주의를 받았었다.]
[슈발. 진짜?]
[여자의 몸으로 들어갈 줄은 상상도 못 했군.]
[그러니까 탁능기, 탁소여는 동일인물이라는 거지?]
[그렇다. 큰 주인도 없으니 둘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첫째밖에 없다. 하지만 첫째는 사형제들에게 관심이 없는 인물이니 둘째가 뭘 하든 상관치 않았을 것이다.]
지주가 동성애자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이혼대법으로 여자의 몸으로 갈아탄 것.
쇼킹했지만 곧바로 수긍했다.
[옛날이라고 동성애자가 없었던 건 아니잖아?]
[미친놈이군. 그렇게 주의를 시켰는데도 큰 주인이 없다고 이젠 여자의 몸으로 들어가 또 저런 짓을 하고 다니다니. 주인이 알면 난리를 쳤을 거다.]
사부는 옛날 사람.
무림에서 공포로 군림했다던 사부였다. 제자가 문란한 생활을 일삼으며 제 품위를 깎아 먹는 짓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흑염마조의 말대로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사부님이 몰라서 다행이야.]
[작은 주인아. 재밌는 생각이 났다.]
[뭔데?]
흑염마조의 목소리가 들려올수록 이준의 입가에 생긴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 * *
[지주. 지금이라도 물러나야 합니다.]
[만약 저자가 괴물이 맞다면 전멸하고 말 겁니다.]
[후일을 도모하셔야 합니다.]
[빨리 결단을!]
존자들이 지주에게 전음을 보내며 재촉했다.
[아직… 몰라요. 흑염마조가 나타났다 해서 저놈이… 노괴일 리 없어요.]
지주는 말하면서도 긴가민가했다.
창제가 파천혈신이 맞으면 도망치지도 못한다.
파천혈신의 영역은 일반 무인과는 차원이 달랐다.
누군가의 목숨을 희생시켜서 도망치는 전략을 구상한다?
개소리.
파천혈신 앞에서 도망칠 수 있는 무인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 무서운 천주 사형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괴물이 아니라도 흑염마조가 나타났습니다. 신마회에는 흉조가 아닙니까.]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림원들의 사기가 꺾인 지는 오래입니다.]
[만약… 노괴가 맞으면 도망치는 건 무의미해요. 존자들은 그의 앞에서 도망칠 수 있어요?]
[…….]
[하아….]
[불가능… 합니다.]
존자들은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파천혈신에게 도망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됐나.
10리(3.9km)는커녕 1리(390m)도 벗어나지 못하고 다 죽었다.
오죽하면 파천혈신이 마음만 먹으면 100만 황군의 호위를 받은 황제도 손쉽게 죽일 수 있다고 하지 않나.
굳이 황제를 죽이지 않아도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자신이라는 걸 아는 파천혈신이었다.
그 때문에 황제는 그냥 살려 둔 것이다.
수틀리면 그 누구든 목숨을 따 버릴 수 있는 게 파천혈신이었으니까.
[노괴인지 확인을 해 봐야….]
지주가 전음을 날리는데 이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탁소여, 아니 탁능기. 네가 기어코 본좌의 말을 어겼구나.”
[…어겼구나.]
이준은 흑염마조가 말하는 대로 따라 했다.
그러자 지주가 사시나무 떨듯 부들댔다.
“바, 방금 뭐, 뭐라고 했…?”
“본좌가 분명 좌도를 멀리하라고 했거늘! 풍뢰공을 이용해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어.”
이준의 입에서 풍뢰공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무극자가 지주에게 사사한 신공이었다.
“지, 진짜 당신이라고!?”
“낙혈곡. 네가 가장 잘 알 것이다.”
낙혈곡이란 단어가 모두에게 또렷이 들렸다.
낙혈곡은 무극자가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춘 곳이다.
인주와 지주가 무극자를 끝까지 추격하던 절벽이기도 했다.
“혈신이 맞았어!”
“그가 살아 있었다니….”
“으으….”
“…설마 했는데…”
파천혈신이 죽었다고 생각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에 대한 공포가 옅어진 것 같았는데 아닌가 보다.
오히려 그를 보니 옛 기억이 생생해졌다.
[조야. 성공한 것 같지?]
[큭큭. 작은 주인을 큰 주인으로 착각하고 있군. 멍청한 놈들.]
게임은 끝났다.
기고만장하던 사혈림은 사기가 걲인 지 오래였다.
패잔병보다 못한 느낌이랄까.
싸울 의지조차 내비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준은 연기를 계속했다.
“고개를 들고 서있다라.”
그의 회안이 번들거렸다.
몸에서는 무극기가 뿜어졌다.
파천멸기도 아닌, 상위호환의 기운.
지주는 물론 이곳에 모여 있는 모두가 파천멸기의 파편을 몸에 지녔다.
마기는 상위에 있는 마기에 지배당하는 성질을 가졌으니.
그녀를 포함한 모두의 속이 울렁거리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무극기는 그들에게 복종하라고 압박을 가했다.
하나 둘씩 무릎을 꿇는 사혈림의 무인들.
존자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푸웁!”
만변존자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그 장면을 봐서 그런 걸까.
나머지 존자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오체투지를 했다.
지주 또한 저도 모르게 무릎을 굽히려는 순간.
“거, 거짓말! 네가 노괴일 리 없어!”
격하게 부정했다.
여태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파천혈신.
그가 사라지고 10년을 더 생사를 확인한 끝에 종결을 냈다.
파천혈신은 이제 세상에 없다고.
그런데 뜬금없이 무림도 아닌, 다른 곳에서 모습을 보이다니.
이게 말이 되나.
혈신의 영물인 흑염마조가 나타났어도 믿기 힘들었다.
“많이 컸구나. 네가 목소리를 낼 생각을 하다니.”
“당신이 혈신이더라도 무섭지… 않아. 당신이 없는 동안 내 무공도 많이 발전했어!”
“목소리에 두려움은 감추고 말하거라. 네 감정이 다 보이지 않느냐.”
이준의 말에 지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속마음을 다 들키자 존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예전의 혈신이 아니에요! 우리가 얻은 파천멸기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니 두려워하지 말아요.”
지주의 외침이었다.
오체투지를 하던 존자들이 고개를 들어 서로의 눈을 마주 봤다.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놀고먹지 않았다는 걸 저 사람에게 보여 주세요!”
지주의 간절한 외침에 존자들도 힘을 얻었다.
“이 기회에 과거의 두려움을 떨쳐 내는 거예요.”
지주의 목소리가 떨리는 게 존자들에게도 들렸다.
그래서인지 존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혈림의 무인에게 내공을 담아 말했다.
“혈신은 과거의 망령. 모두가 힘을 합치면 그를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저들의 용기에 칭찬할 법하지만, 이준과 흑염마조는 전음으로 욕을 했다.
[병신들인가. 사부님이셨으면 쟤들 모조리 죽었겠지?]
[끔살이다. 큰 주인은 자기에게 이를 드러내면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린다.]
[죽는 방법도 가지가지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도발했으니 싸워야지. 옆에 사혈림에 강한 사람이 있잖아.]
[은서단의 강령파쇄음이라. 기겁하겠어. 크크.]
파닥-
흑염마조가 이준의 머리를 박차고 하늘로 올라갔다.
공중을 선회하는 녀석.
날개에서 타오른 흑염이 밑으로 떨어졌다.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 * *
이준이 천외천의 한복판에 떨어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혈림의 무인들이 미야와키 칸나를 둘러싸았다.
[내가 싸울 테니까 잘 보고 있어. 앞으로 네가 사용해야 할 무공이야.]
[네.]
그녀가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뜬 그녀의 눈은 사기로 가득했다.
“내 무기는 아니지만 이 비파도 꽤 쓸 만해.”
깨어난 은서단이 비파를 손으로 뜯기 시작했다.
비파에서 경쾌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컥!”
“몸이 안 움직여.”
“내공이 멋대로, 으헉!”
사혈림 무인들이 은서단에게 쇄도하다가 바닥에 처박혔다.
내공이 끊기고 몸이 굳은 것.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비파 소리에 따라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움직였다.
익숙한 비파음에 귀모존자가 가장 먼저 알아챘다.
“이런! 요화의 강령파쇄음이다. 모두 귀를 보호해!”
“이미 늦었어.”
강령파쇄음이 계속 이어질 때마다 사혈림의 무인들은 고통에 신음했다.
강시에게는 최악의 무공.
죽음과 가장 가까운 선율을 자극해 강시에게 타격을 가했다.
사혈림의 무인들은 생강시.
죽은 자의 몸에 새 영혼을 담은 게 그들이었다.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백 년 가까이 타인의 몸에서 생활했지만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아닌.
존재가 애매한 게 강시였다.
그런 이들에게 죽음과 가까운 선율을 듣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
까악!
끼아아악!
지금처럼 육체와 영혼이 나뉘게 된다.
사혈림 무인들의 머리 위에 연기가 일렁였다.
거기서 나온 비명들.
약한 이들은 몸과 영혼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몸과 분리된 영혼은 이승을 떠돌게 될 테지만, 그마저도 은서단에 의해 막혔다.
그녀가 손으로 뜯고 있는 비파로 영혼이 흡수됐다.
그녀가 사용한 무공은 강령파쇄음.
불안정한 영혼을 다시 땅 속으로 돌려보내는 음공이었다.
“깔깔깔깔! 네깟 놈들이 나 요화에게 대적할 수 있겠느냐!”
그녀는 오랜만에 마음껏 살생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