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0화
미야와키 칸나의 안내로 도쿄로 올라가고 있는 이준이었다.
“정말 끔찍해요.”
경공을 펼치며 가던 칸나의 말.
이준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가 밖으로 튀어나오면 안 되는 이유죠.”
생명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땅.
마치 종말을 맞이한 듯한 광경이었다.
“천외천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엄청난 짓을 벌이는 걸까요?”
“음….”
이준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천외천은 어떤 생각을 하고 세상을 파멸로 이끌었을까.
‘무자비한 파괴와 멸망을 원했어.’
동시에 뭔가를 갈구하는 느낌이었다.
원하는 게 있는 듯했다.
무언가를 찾는 느낌이랄까.
‘천외천은 왜 세상의 파멸을 원했지?’
이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그저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려 했던 행동.
자신을 건드린 것에 대한 응징을 했다.
단순히 피에 굶주린 악마들이라 파멸을 원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좀 이상했다.
굳이 수십 년간 음지에 숨어 세상을 장악하려고 한 이유가 뭘까.
문득 천주가 세상에 한 말이 떠올랐다.
[태양지체와 마신지체를 타고난 각성자는 들어라. 너희에게 날 쓰러트릴 기회를 주겠다. 자신 있는 놈은 내가 있는 천산으로 오거라.]
‘태양지체와 마신지체의 몸을 원했던 건가? 더욱 강해지려고?’
그건 아니었다.
이 신체를 타고난 이는 아시아의 각성자가 아닌 서양의 각성자에게 나타났다.
태양지체를 타고난 이는 성결기사란 이명을 가진 자였다.
등급은 무.
그가 어느 경지에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서양의 각성자들은 성결기사를 최고 중 한 명이라 칭했다.
그와 동등한 각성자는 단 한 명뿐.
마신지체는 아니었지만 천마지체를 타고난 이가 있었다.
이명은 암흑대제.
그도 성결기사와 마찬가지로 등급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유일하게 아는 건 두 각성자의 무력이 거의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천주를 죽이기 위해 힘을 합심했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태양지체를 차지하려고 했으면 성결기사를 흔적도 없이 죽이지 않았겠지. 강해지려는 의도는 아니야.’
전 세계에 방송된 천주의 힘.
세상에서 제일 강하다는 각성자 두 명이 처참하게 죽어버리자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다.
천외천을 막을 방법이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많았다.
천외천은 항복한다고 목숨을 살려 주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오로지 파멸만을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꺼림칙한 건 그때 천주의 표정이었다.
‘분명 원하는 게 있었어. 사신수의 신물 말고도 다른 걸 말이야. 그게 뭘까.’
이준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천주가 원하는 걸 알아내면 그를 상대하기 훨씬 수월할 것 같았다.
하지만 천주가 원하는 게 뭔지 떠오르지 않았다.
단서가 잡힐 듯 말 듯.
애매할 때 칸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 사마?”
“네?”
“제 이야기 듣고 계셨나요?”
“뭐라고 했죠?”
“천외천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엄청난 짓을 벌였는지 물어봤어요.”
“아, 자신들의 강함을 증명하려고 하는 게 아닐까요?”
이준은 대충 둘러서 말했다.
“이런 살육을 자행하면서요?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 나오면 자기들도 위험하지 않아요?”
“그 몬스터를 조정하는 게 천외천이에요.”
“앗, 그랬지.”
“아무튼 천외천은 위험한 놈들이에요. 지금까지는 제가 억지로 강시를 부쉈지만, 칸나의 도움이 필요해요.”
“저, 저요?”
미야와키 칸나가 화들짝 놀랐다.
필요하다는 말이 그녀의 귀에 쏙 들어왔다.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나고야에서는 무서웠는데 지금은 너무 상냥하셔. 어머, 저 미소 봐.’
[정신 차려라 이년아! 이준은 네가 감당할 그릇이 못 된다.]
은서단의 만류에도 미야와키 칸나는 들어먹지 않았다.
이준의 인형을 꽉 쥔 채 몽롱하게 그를 쳐다봤다.
[이년 제정신이 아니야. 저 살귀가 어디가 좋다고 쯧쯧.]
은서단이 혀를 찼다.
그녀로서는 미야와키 칸나가 이준과 붙어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녀가 익힌 무공은 사기에 기반을 둔다.
그런데 이준이 기운을 뿜어내면 그 사기가 미쳐 날뛴다.
마치 옛 주인을 영접한 듯.
제어가 안 되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 * *
4대 성지의 금역, 혼원문 구역.
무극자가 뒷짐을 쥔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무극자 님 또 어디를 가시려고요?]
[나도 곧 떠날 때가 되지 않았느냐. 황금아.]
무극자가 쓸쓸한 표정으로 옆에 있는 황금이에게 말했다.
[그냥 여기에 있으면 안 돼요? 무극자 님은 가능하시잖아요. 막내 공자님이 섭섭해하실 거예요.]
[노부는 천기를 거슬렀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건 무극자 님의 경지가 지고해서.]
[황금아. 노부가 얼마나 산 줄 아느냐.]
무극자의 물음에 황금이가 고민하다가 이내 대답했다.
[제가 곁에 있었던 것만 해도 130년은 넘어요.]
[맞다. 강호인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90년은 훌쩍 넘게 살았지.]
[남들은 더 살고 싶어서 안달인데 무극자 님은 왜 자꾸 그러세요.]
[고독이 날 집어삼키는구나.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무극자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의 미소는 모든 걸 초탈한 것처럼 보였다.
하나 언뜻 비치는 감정에서는 기쁨, 초조, 불안,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무극자의 곁을 100년 넘게 지켰던 황금이라 그 감정이 뭔지 안다.
드디어 무극자의 궁극적인 뜻이 이루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더욱 슬픈 황금이었다.
[막내 공자라면….]
[됐다. 황금아. 혼원을 이은 전승자의 숙명이며 사신수와의 약속이니라.]
[막내 공자가 무극자 님을 많이 미워할 거예요.]
앞으로 벌어질 일은 안 봐도 뻔했다.
이준은 가장 좋아하는 사람에게 분노하게 될 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안다. 알고 말고. 그래도 녀석은 잘 이겨낼 것이다. 고금제일인인 노부가 인정하는 유일한 제자 아니겠느냐.]
[하아아.]
황금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무극자의 마음을 알기에 더는 말리지 않았다.
[네가 옆에 있어 주거라. 노부가 믿을 수 있는 게 너와 마조밖에 없구나.]
[알겠어요.]
[고맙구나.]
무극자가 황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게이트 안의 광경을 눈에 담으려고 애를 썼다.
제자인 이준이 만든 세계.
강과 바다.
들과 산.
얼음과 사막.
나무와 꽃.
좌우로 뻗은 건물과 몬스터까지.
활기차고 평화로운 광경을 눈에 담았다.
아주 오래도록.
[그러고 보니 준이를 만난 지 벌써 1년이 흘렀구나. 참 빠르게 지나갔어. 아주 음울한 아이였는데.]
그랬던 아이가 게이트의 주인이 되었다.
여러 종족을 거느리게 됐고 말이다.
이제 더는 가르칠 것도 없었다.
남은 거라곤 딱 하나.
자신이 주는 관문만 통과하면 됐다.
이 시험을 통과한다면 역천에게 도전할 자격이 주어질 터.
이후는 이준의 몫이었다.
[준이 녀석의 슬픔이 오래가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황금이에게는 단호히 말했지만, 무극자 또한 제자인 이준이 걱정됐다.
* * *
도쿄에 거대한 붉은 기둥이 치솟았다.
도쿄 타워에서 나온 기둥을 시작으로 도쿄 전역으로 퍼졌다.
끝내는 일본 전체에 붉은 기둥이 올랐다.
엄청난 마기에 몬스터들이 기둥으로 몰려갔다.
하지만 붉은 기둥에 닿는 순간.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그걸 깨달은 몬스터들은 붉은 기둥 근처도 가지 않았다.
나고야에서 출발했던 이준과 칸나도 드디어 도쿄에 도착했다.
“결국 역천진이 발동됐네.”
못 막을 걸 알고 있었다.
고리의 게이트 폭발을 일부 막은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혼자 움직이는 것에 한계가 있었으니.
역천진이 발동한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준 사마… 저 기둥은 뭐기에 엄청난 마기가 나오는 거예요.”
“천외천을 불러들이는 술법이라고 보면 돼요.”
“무시무시한 마력과 내공이 느껴져요.”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저걸 막지 못하면 지금보다 더 큰 재앙이 닥칠 거예요.”
천외천이 넘어오는 걸 막지는 못해도 늦춰야 했다.
다음 상대는 끝판왕이었다.
사혈림이 까다롭다면 다음 상대는 그냥 강했다.
일선 같은 강자가 제일 약할 정도.
그들이 넘어온다면 자신이라 하더라도 모두를 지키는 건 무리였다.
“제가 했던 말 기억하고 있죠?”
“네. 강시가 나타나면 이 비파로 강령파쇄음을 사용할게요.”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곤 마기가 제일 강력한 곳으로 움직였다.
도쿄 타워 인근에 도착하자 이준과 칸나를 감싸는 이들이 나타났다.
“네가 이준이라는 아이구나.”
그들 중 제일 연장자로 보이는 노인이 앞으로 나왔다.
‘탈령존자. 그 옆으로는 비영, 귀모, 만변, 환일. 나머지 존자가 다 있네.’
이준이 존자를 눈에 담고 있을 때였다.
미야와키 칸나가 누군가를 보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월령검 님!?”
그녀가 보고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월령검 야마모토 아카기였다.
“월령검은 천외천과 손을 잡았다고 제가 말했죠?”
“월령검 님. 어떻게 된 거예요?”
칸나가 아카기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묵묵부답.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는 월령검이었다.
“괜히 힘 빼지 말아요. 저 사람은 우리와 싸워야 할 적이에요.”
이준이 파멸겁을 꺼내 들었다.
2단계의 파멸겁을 보이자.
“어머. 대사형도 거부한 마겁을 당신이 풀었군요.”
“…누구?”
“절 몰라요? 너무 서운한데.”
이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에서 제일 강한 기운을 지닌 여자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야.’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이곳에 있는 이들의 얼굴을 얼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정보와 대조해 보니 거의 맞아떨어졌다.
그런데 저 여자만 정보가 없었다.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전 사혈림의 림주인 탁소여예요.”
지주의 요사스러운 목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소개에 이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당신이 지주라고!? 왜 남자가 아니지?”
전생에 지주는 남자였다.
여자라는 낌새조차 없었고, 목소리도 걸걸했다.
여리여리해 보이긴 했지만 그게 다다.
남장 여자는 절대 아니었다.
순간 이준의 말에 지주의 이마가 와락 구겨졌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호호호. 전 원래 여자였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사부님의 제자는 모두 남자라고 했어.”
또한 사부와 흑염마조가 말하지 않았던가.
사저는 없고 사형제만 있다고.
자신이 아는 사실대로라면 지주는 남자여야 했다.
“사부?”
“당신 탁능기라고 알아?”
탁능기라는 이름이 불리자 지주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네가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지?”
지주의 가면이 단번에 벗겨졌다.
깔깔거리며 요사스러운 미소로 존댓말을 쓰더니.
지금은 반말로 돌아섰다.
‘저 반응은 분명 탁능기를 알고 있는 눈치야. 탁소여, 탁능기. 이름이 비슷한데 남매일까?’
이 또한 나비 효과로 일어난 현상인 건지.
좀 혼란스러웠다.
“날 굉장히 잘 아는 것 같은데, 네 무공과 연관이 있는 듯싶구나. 혹시 파천혈신의 무공을 익힌 것이냐? 사제에게 들어보니 네가 파천멸기를 보인다고 하더구나.”
“파천혈신은 너희 천외천에서 금기된 이명인 걸로 아는데 잘도 부르네.”
“내 질문에 그 어떤 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알고 싶으면 직접 캐 보던지.”
이준이 지주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하수를 향해 보이는 도발.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었다.
“저 싹퉁머리 없는 놈이!”
“지주, 말 섞을 가치도 없습니다. 어서 공격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제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존자들이 버럭 소리쳤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허공에 귀기가 진동했다.
“그만. 제 말 안 끝났어요.”
지주의 제지에 존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이성을 가라앉히고는 이준에게 제안했다.
“그 실력이면 많은 걸 가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랑 손잡지 않겠어?”
자신을 도발한 것과는 별개.
천외천에 대한 것도 많이 알고 능력도 각성자치고는 굉장히 좋았다.
천외천으로 영입하면 요긴하게 쓰일법해서 이준에게 제안했지만.
“내가 왜? 굳이 너희랑 손 안 잡아도 마음만 먹으면 다 가질 수 있는 게 나야.”
이준은 그녀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