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6화
살을 주고 뼈를 취한 천살성은 인주의 남은 한쪽 팔까지 뜯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너무도 쉽게 인주를 놓아주었다.
“기회를 주지. 한 번 발악해 봐라.”
“크으윽!”
그러고는 뒷짐을 쥔 채 넘어진 인주에게서 몸을 돌렸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SS급. 현경에 있는 인주를 무시하는 태도였다.
고수들끼리의 싸움에서 빈틈을 보이는 건 자살행위.
천살성의 행동은 자칫 큰 화를 불러올 수 있었다.
“으으… 감히 너 따위가 날 내려본단 말이냐!”
인주가 분노를 터트렸다.
그의 몸에서 파천멸기와 귀기가 무럭무럭 솟았다.
그들이 있는 곳을 덮친 기운.
약한 각성자는 그 기세만으로 미치광이가 될 만큼 사악한 기운이었다.
하나 천살성이 허공에 손을 털자.
공기를 뒤덮었던 파천멸기가 말끔히 사라졌다.
“그 미완성의 무공으로는 날 이기지 못해. 날 이기려면.”
화아악-
사신가를 넘어 서울 전역을 순식간에 덮은 회색의 기가 천살성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인주가 보였던 파천멸기보다.
더 강력한 살의를 지닌 채.
오직 인주를 향해 쏟아지는 무극기였다.
“무극기는 가져와야지. 아, 넌 사부님께 제대로 된 무공을 받지 못했나?”
도발도 이런 도발이 없었다.
파천혈신은 천지인의 주인에게 역린과도 같았다.
평생을 옆에서 수발을 들었지만 그의 진정한 무공을 전수받지 못 했다.
인주는 꼴랑 묵룡심법과 몇 개의 무공이 끝.
파천혈신의 무공 중 제일로 약한 무공이었기에 그것도 불만이 많았다.
또한 파천혈신이 천명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인정한 제자야말로 진정한 전인이라고.
모두가 쉬쉬하며 천지인의 눈치를 봤다.
그들은 몇십 년의 세월 동안 파천혈신의 제자처럼 행동했으니까.
자존심이 팍 상한 천지인의 주인들.
여태까지 파천혈신을 사부로 모셨던 게 허무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의 진전을 이으려고 그동안 얼마나 머리를 숙이고 잘 보이려고 노력했나.
그럼에도 그는 자신들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천주에게는 제대로 된 무공을 전수해 줬다.
파천신공이라는 혈신의 진신무공을.
이때까지는 괜찮았다.
그가 천주에게 자신의 뒤를 이을 제자는 아니라고 선언하기 전까지는.
이로 인해 그들이 참았던 분노가 터지고 파천혈신을 배신하게 됐다.
신마회에서 파천혈신의 이름을 내뱉지도 못하게 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아킬레스건을 천살성이 자극한 것이다.
“닥치지 못하겠느냐!”
인주는 남은 한쪽 팔에 장력을 가득 모았다.
파직-
얼마나 강한 기류가 모여들었길래 전기가 흐를까.
인주는 붉은 눈동자를 띈 채 천살성을 노려봤다.
“어디 이것도 막아 보아라!”
내기가 응축된 묵룡장이 인주의 손을 떠났다.
묵룡장은 허공에서 회전하며 이준을 향해 날아갔다.
“묵룡장의 단점이 뭔지 아나?”
천살성이 묵룡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바로 내가 익힌 혼원신공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지.”
모든 걸 파괴하려는 묵룡장이 천살성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혼원신공이 묵룡진기를 흡수합니다.]
[혼원신공이 파천멸기를 흡수합니다.]
파천멸기가 담긴 기운.
저렇게 쉽게 소멸될 장력이 아니었다.
“어떻게…!”
“네가 익힌 무공이 누구 거라고 생각하나.”
“파천혈…신….”
“그래. 내가 익힌 무공은 묵룡심법이나, 풍뢰공, 파천신공이 아닌, 그 세 무공을 아우르는 혼원이다. 네가 내게 지는 이유를 알겠지?”
천살성은 인주에게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인주의 멘탈을 아주 개박살 내 버리려는 거다.
“네, 네가! 네놈 따위가 그 괴물의 전인이라는 말이냐!”
“아주 멍청하지는 않군.”
“거짓말!”
인주가 격하게 부정하며 묵룡장을 연달아 날렸다.
하지만 모두 천살성에게 막혔다.
처음에는 묵룡장을 그냥 맞아 주고 뼈를 취했던 것.
무공의 깊이가 이준과 다른 천살성은 인주에게 재앙 그 자체였다.
“아니야! 아니야아아!”
인주가 드디어 미쳤다.
뇌에 타격이 컸는지 아예 폭주해 버렸다.
“재밌어.”
천살성이 진하게 웃었다.
그의 악취미.
사람을 망가트리는 건 예부터 있었던 천살성의 버릇이었다.
제 말로 인해 또 한 사람이 이리 망가지니 만족한 것이다.
“그래, 절망에 빠져야지. 하나 이것도 다 네가 여태 저질렀던 악행의 업보가 돌아오는 것뿐이다.”
“으아아악!”
인주가 천살성에게 달려들었다.
무지막지한 공력이 주먹에 담겨 있었다.
천살성은 인주의 주먹을 쉽게 잡았다.
으드득!
악력을 이용해 인주의 손을 부숴 버렸다.
그도 모자라.
푸확-
“어어억!”
남은 한쪽 팔까지 뽑아 버렸다.
천살성의 발에 가슴이 치인 인주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더 저항해야지.”
천살성이 인주의 허벅지를 밟으며 힘을 주었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인주가 고통을 꾹 참았다.
“그 신음 마음에 안 들어.”
아직 부족했는지.
다리와 허리를 잡고 양쪽으로 힘을 줬다.
“크아아악!”
몸에서 다리가 분리되자 그제야 인주가 고통에 울부짖었다.
“크크. 크하하하.”
천살성이 인주를 내동댕이치며 크게 웃었다.
얼굴에 미소를 띤 것치고는 굉장히 섬뜩했다.
* * *
이준의 잔인한 손속을 본 사신가의 가솔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까지 봐 왔던 가주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
적을 처참히,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잔인하게 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가주가 자신들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기에.
저 분노는 적의 손에 죽은 가솔들의 복수였다.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람에게는 한없이 친절하나 적에게는 염왕.
명성이 어떻든.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이준은 개의치 않아 했다.
이준에게는 오직 하나.
가족을 건드린 적에게 어떻게 대갚음할 것인가만을 생각했다.
“가주….”
“이제 그만… 하셔도 됩니다.”
“가주께서는 죽은 이들의 복수를 충분히 하셨습니다.”
“…이제 본인을 생각하셔요.”
사신가의 가솔들이 이준에게 용기를 내어 말했다.
이준의 저 잔인한 손속은 분노와 슬픔을 가리기 위한 행동.
이만하면 충분했다.
“가주님!”
“주군. 더는 손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저희가… 약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우뚝.
천살성이 그제야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가솔들을 봤다.
“옳은 말이다. 너희가 약하기 때문에 내가 나온 것이지.”
이준이라면 자책을 했을 터다.
자신이 약하기 때문에 이런 사달이 났다고.
다신 가문이 공격당하지 않게 하겠노라고 말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천살성이었다.
오직 이준만을 생각한 그였다.
“내가 나오지 않게끔 강해져라. 적이 강하다는 핑계는 안 통한다. 천무를 익힌 자격을 증명해. 그러지 못하면… 내가 손수 약점을 없애 버리겠다.”
천살성이 회안을 빛냈다.
그의 말은 협박.
강해지지 못하면 죽이겠다는 압박이기도 했다.
가솔들은 섬뜩함을 느꼈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자신들은 가주의 약점.
자신들이 약하면 가주의 발목을 잡게 될 터다.
일본에 있어야할 가주가.
가문에 급히 나타난 것만으로도 자신들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거다.
“가주님께 폐가 안 되도록 강해지겠습니다.”
“지켜보도록 하지.”
천살성이 고개를 돌렸다.
인주는 목숨만 간신히 붙어 있었다.
“허억… 허어억…!”
“여기서 끝낸 걸 고마워해라.”
천살성이 주먹을 말아 쥐자.
인주의 몸이 회색 기운에 감싸였다.
푸확!
회색 기운이 인주를 혈수로 만들곤 천살성의 몸으로 돌아왔다.
끼아아악!
허공에서 귀를 찢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인주의 혼이 완전히 소멸했다는 증거였다.
천살성이 몸을 돌려 백호에게 시선을 보냈다.
“시간을 끌어 줘서 고맙다.”
[마신지체를 얻었으면 네가 그 몸을 차지하면 될 텐데 무슨 생각이냐.]
백호의 물음에 천살성이 입만 끔뻑였다.
[이준에게 듣지 못했나?]
[들었지. 너무 얼토당토않아서 말이다.]
[내가 도와준다는 게?]
[마신지체면 주인의 영혼이 강하더라도 네가 차지할 수 있지 않나.]
[날 인정해 주는 녀석을 죽이고 싶지 않다.]
[흥. 고작 그런 이유로 이준을 돕는다고? 믿을 수 없다.]
[너희 사신수는 여전하군. 자기 생각이 모두 맞는 양 떠들어 대는 건 변하지 않아.]
[뭐야!]
[인주에게서 시간을 끌어 준 건 고맙다만, 더는 선을 넘지 마라. 내가 몸을 먹든 말든 나와 이준이 일이다.]
[감히 천살성 따위가!]
[사신수가 처음으로 천살성 따위에게 소멸되는 것도 재밌겠군. 상처를 회복하지 못한 너라면 지금도 가능할 것 같은데.]
천살성이 살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천살성의 트레이드 마크.
마소가 보이면 꼭 피를 봐야 했다.
[이, 이!]
[농담이다. 쫄지 마. 너무 오래 밖에 있었어. 이제 들어가야겠다. 또 보자.]
천살성이 내면으로 들어갔다.
대기에 진동하던 살기도 사라졌다.
“쿨럭쿨럭!”
이준이 무릎을 꿇고 연신 기침했다.
피가 한 바가지 쏟아졌다.
“가주님!”
“주군, 괜찮으십니까.”
“제가 상태를 한 번 보겠습니다.”
동의각주인 이의태가 다급하게 다가왔지만 이준의 손에 가로막혔다.
“괜찮아요. 쿨럭쿨럭! 심법을 돌려야 하니 호법 좀 서 주세요.”
이준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혼원신공을 돌렸다.
내부가 엉망이었다.
천살성이 나오기 전 내공이 동난 상태였다.
인주를 상대할 때 묵룡장을 몸으로 맞아줬더니.
기혈이 엉켰다.
천살성이 아니고 이준이었다면 바로 각혈을 했을 터.
천살성이라 버텼다.
그는 내부가 엉망이고 내공이 없어도 인주를 죽일 수 있었다.
그에게는 이준이 사용하지 못하는 다른 힘이 있었으니까.
“주변에 적이 없는지 철통같이 경계하게.”
“예! 동의각주 님.”
“사 대주는 가주님의 호법을 서고, 나머지는 동료의 시신을 묻어 주도록 하세.”
이의태의 명령에 사신가의 가솔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소름 끼치게 차갑던 가주가 되돌아온 것을 느꼈으니까.
* * *
“완성했…!”
진혈천마강시를 완성한 지주가 기뻐하려는 그때였다.
“사제의 기가 사라졌어.”
지주는 황급히 무언가를 찾았다.
종이었다.
인주의 영혼을 불러왔던 그 종.
딸랑-
오직 지주의 귀에만 들리는 종소리가 울렸지만.
“없어?”
인주의 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인주를 생강시로 만들어 놓은 상태라 수백 킬로를 떨어져 있어도 기운을 느끼는 게 가능했다.
그런데 인주의 기가 사라졌다.
“따라와.”
그녀의 말에 누워 있던 여자.
사사키 유우가 벌떡 일어나서 지주의 뒤를 따랐다.
쾅-
존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지주가 들어갔다.
실험실에 있던 그녀가 갑자기 나타나자 존자들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주를 뵙습니다.”
“어쩐 일이십니까.”
“인주의 기가 사라졌어요. 어떻게 된 거예요.”
“으음….”
“결국 인주도.”
“뭔가 알고 있군요.”
“그게….”
“답답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하세요.”
“추령에 이어, 음양, 무건, 색안까지 전부 죽은 듯합니다.”
“뭐라고요!?”
십이 존자 중 남은 사람은 다섯뿐이었다.
그들 모두가 도쿄에 있어서 변을 당하지 않은 것.
그들도 밖에 있었다면 추령과 음양처럼 됐을 터다.
“전부 창제에게 죽은 게 아닐까 합니다.”
“되살아났던 사제가 그리 쉽게 당할 정도로 이준이 강한가요?”
“인주의 말대로라면 지주와 막상막하지 않겠습니까.”
인주에게 이미 이준의 이야기를 들어서 일을 빨리 진행 시킨 게 아닌가.
그럼에도 번번이 계획은 틀어졌다.
“고리의 게이트를 터트려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준이 계속 방해하네요.”
“인주가 죽었으니 다음은 저희 차례입니다.”
“알고 있어요.”
“역천진을 빨리 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진혈천마강시를 더 만들고 실행하려고 했는데.”
“저희가 생각한 것보다 창제가 더 강한 듯합니다.”
“차라리 백마존을 불러들이시는 게….”
“그래야겠어요. 일본의 균열 정도면 백마존은 데려올 수 있으니까요. 그것도 실패하면 우리의 목숨을 걸어야 할 거예요.”
“명심하겠습니다.”
“모든 게이트와 강시를 내보내세요.”
“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