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0화
“더 할 거야?”
“나 말고는 다 지친 것 같으니 포기하지.”
중년인이 항복을 선언했다.
“잘 생각했어. 싸워 봤자 결과는 똑같아.”
이준이 빙그레 웃었다.
첫째 관문은 통과.
다음 관문으로 나갈 차례였다.
그가 파멸겁을 회수하고 중년인을 향해 말했다.
“다음 시험 치르게 문 좀 열어 줘.”
“그 전에 보상부터 받아라. 내 힘은 이미 있으니 나머지 환영의 힘만 받아 가면 될 것이다.”
중년인이 세 환영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들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세 가지 색상의 빛은 허공을 날아 이준의 몸으로 들어갔다.
그와 함께 이준의 심장에 자리한 세 개의 표식이 반응했다.
[심장에 ‘물의 표식’이 자리 잡았습니다.]
[심장에 ‘불의 표식’이 자리 잡았습니다.]
[심장에 ‘자연의 표식’이 자리 잡았습니다.]
[혼원신공(SSS)이 표식에 반응합니다.]
심장에서 거대한 힘이 생겨났다.
그 힘은 몸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혈관을 헤집어 놓았다.
“어억!”
이준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고통.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핏줄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건 덤이었다.
자리 잡은 네 개의 표식 중 물의 표식이 맹렬히 회전했다.
그다음은 불의 표식 차례.
심장 위에 박힌 속성들이 순서대로 힘을 드러내며 이준의 내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푸웁!”
내상을 입은 듯 그의 입에서 피 분수가 뿜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바람, 뇌의 표식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자 혈 자리는 엉망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자연의 표식이 심장 위에서 맹렬히 회전했다.
이준의 몸이 초록색으로 반짝였다.
“으음….”
터질 듯한 얼굴이 가라앉았다.
자연의 기운이 몸 전체를 돌면서 걸레짝이 된 혈을 치유했다.
내공이 흐르는 경로를 전보다 더 넓혀 준 네 속성.
단전의 그릇 또한 배로 넓어졌다.
제 할 일을 마친 기운은 심장으로 돌아가 잠들었다.
[혼원신공(SSS)이 10성에 도달했습니다.]
[특성의 모든 효과 해제가 풀렸습니다.]
[사대 기보 세트 효과 해제가 풀렸습니다.]
[천살성의 봉인이 풀렸습니다.]
혼원신공이 10성에 도달하자 사신수의 환영이 걸어 놓은 페널티가 풀렸다.
첫 관문일 뿐인데 벌써 1성이 오른 것.
남은 관문을 다 깬다면 12성 대성의 경지에 오르는 게 아닐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10성에 든 지금만 봐도 전과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우리의 할 일은 끝난 것 같군. 다음 관문으로 가라.”
이준이 눈을 뜨자 사신수의 환영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끼이익-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렸다.
이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 관문으로 향했다.
[제 2관문 - ‘심’]
깜깜하던 앞에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림자의 얼굴을 본 순간 알아챘다.
2차 관문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그림자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을 한 자신이었다.
“또 보네.”
[오랜만이다.]
천살성이 반갑게 맞이했다.
“우리 잘 지내고 있는 거 아니야?”
[맞다.]
“그러면 2차 관문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나도 모른다.]
이준과 천살성은 어리둥절했다.
처음 만났던 천살성이었다면 서로 몸을 가지려고 싸웠을 터.
현재는 천살성을 잘 설득해 같이 살고 있는 상태였다.
“내가 널 다스리는 게 2차 관문의 목표 같은데 말이야.”
[잘하고 있지 않나? 내가 무자비하게 살육하는 것도 아니고 그 어떤 천살성보다 잠잠히 있었다.]
“그러게. 흠.”
이준과 천살성은 깜깜한 주변을 요리조리 살폈다.
이 관문을 만든 무극자도 생각지 못했던 상황이 펼쳐졌다.
천살성은 오직 살인만을 추구하는 살귀.
이준의 천살성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도리어 몸의 주인을 잡아먹으려 한 게 10 중 10이었으니까.
천살성을 지닌 인간이 모두 살귀가 된 이유였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앉아서 이야기나 하자.”
[그래도 되나?]
“상관없겠지. 굳이 싸울 필요는 없잖아.”
[그것도 그렇다.]
이준이 자리에 앉자 천살성도 그 앞에 앉았다.
“내 얼굴을 보고 있으니까 섬뜩하긴 하네. 봤는데도 적응이 안 돼.”
[실없는 소릴 하는군.]
“살기는 잘 제어가 되는 거야?”
[열받는 일만 없으면 그럭저럭 잘 조절된다.]
“아, 열받는 일….”
[죽어라 싸웠는데 지랄할 때 다 죽이고 싶더군.]
인주를 죽이고 사람들을 살렸는데 욕이 난무했다.
그 무력을 가지고도 사람들을 다 살리지 못했냐고 말이다.
물론 자신을 칭송해 주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지만 천살성을 자극한 건 일부의 악플들인 것 같았다.
“무시해 버려. 모든 사람한테 좋은 이미지로 남을 순 없어. 그리고 꼭 정치질하는 애들이 있거든. 비판이 아닌 비난은 무시가 답이야.”
[난 그러지 못한다. 힘을 가지고 있는데 가만히 있는 건 멍청한 짓거리다.]
“알지. 나도 그냥 엎어 버리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그래서 지금 엿을 먹이고 있잖아.”
[봉문 말인가?]
“응. 3개월이 지났는데, 밖은 아주 난장판일걸?”
[넌 그걸로 만족하나? 나였으면 세상을 피로 물들였을 것이다.]
천살성의 목소리에 스산한 한기가 느껴졌다.
누가 살귀의 화신 아니랄까 봐 살기가 아주 지독했다.
“놔둬. 때 되면 제발 도와달라고 난리 칠 거니까.”
[난 그게 더 역겹다.]
“그때는 아주 비싼 값을 토해 내게 해야지. 내가 공짜로 움직이겠어?”
[가장 비싼 건 피의 대가다.]
“그게 가장 쓸모없는 거야. 우리 물질로 해결하자.”
[흥. 난 피가 가장 큰 대가라 본다.]
“내 힘만 낭비하는 거라니깐.”
[아니다. 살육이야말로….]
이준과 천살성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두 사람은 모를 것이다.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2차 관문은 시작되었다는 것을.
* * *
이지안과 탁하늘의 비무가 끝난 지 일주일.
잘 넘어간 듯 보였지만 뒤늦게 후폭풍이 몰려왔다.
이사장실로 빗발치는 문의 전화.
그것도 안 되니 학부모들이 단체로 몰려와 한민성을 괴롭혔다.
“이사장님! 특별 1반 정원 수 좀 늘려 주세요.”
“많은 학생이 혜택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학교에 기부도 많이 할 테니, 제발 제 아들 좀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이에 한민성은 땀을 삐질 흘리고 있었다.
“특별 1반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어머님.”
“학교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이사장님 아니세요? 그러지 말고 특별 1반 정원 수 좀 늘려 주세요.”
“맞아요. 특별 1반은 타 학급보다 인원수가 현저히 적다고 하던데, 이러면 특혜입니다.”
“들어 보니까 오대 가문의 자식들만 있다고 하던데요.”
“모두 오해입니다.”
신입생인 이지안이 3학년 탁하늘을 이겼다.
그것도 너무 쉽게.
여기까진 한민성이 계산한 영역이었다.
신입생과 전학생들에게 특별 1반은 범접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걸 인지해 주기 위해 말이다.
하나 딱 여기까지였다.
설마 학부모가 미쳐 날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특별 1반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고 했지만 학부모들은 막무가내로 나왔다.
‘이걸 어쩐담.’
한민성은 굉장히 난감했다.
“특별 1반의 모든 권한은 제가 아니라 이준 선생님에게 있습니다.”
“이준 선생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저희가 만나 보겠습니다.”
“그래요. 왜 입학식 때 안 보이셨던 거죠?”
“신력권가가 봉문을 했어도 이준 선생님은 나오실 거 아니에요?”
한 학부모의 목소리가 높아지니 다른 학부모들도 덩달아 목소리가 커졌다.
혼자 있으면 용기가 안 나지만 여럿이 있으면 자신감이 생기는 것과 같았다.
“말씀드렸다시피 특별 1반은 학교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이 선생님이 학교에 안 나온 이유도 모릅니다.”
“이사장님이 어떻게 모를 수 있나요?”
“우리가 이러고 있으니까 모르는 척하시는 거 아닌가요?”
“제가 학부모님들께 어떻게 거짓말을 합니까.”
한민성은 학부모를 달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들은 물러설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전 이준 선생님을 만날 때까지 여기서 꼼짝도 하지 않을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자자, 모두 자리 깔고 앉읍시다.”
학부모들이 단체로 이사장실에 드러누웠다.
‘이 광경을 이준 선생이 본다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학부모들은 이준의 성격을 전혀 몰랐다.
그가 어떤 인간인지 안다면 절대 이런 행동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럼 제가 확인 전화를 해 보겠습니다.”
한민성의 말에 학부모들의 눈이 반짝였다.
그가 한숨을 쥔 채 폰을 들었다.
이준에게 전화를 걸자 연결음이 들렸다.
“안 받는 것 같은데….”
끝내 연결되지 않고 끊기려는 그때였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반가운 이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이준과 천살성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실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얼마나 입을 나불댔는지 턱이 아파 왔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관문은 어떻게 깨는 거야? 너랑 싸워야 클리어되는 건가?”
이준의 말을 관문지기가 듣기라도 했는지.
[천살성을 완벽히 제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2관문을 클리어했습니다.]
[마지막 관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개꿀! 야. 2관문 클리어한 것 같아.”
이준이 고개를 돌려 천살성을 봤는데 사라지고 없었다.
“갈 거면 간다고 말하지 섭섭하게 말이야.”
[네 안에 잠들어 있을 테니 걱정 마라.]
이후 천살성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 관문만 남았네.”
2관문은 손쉽게 통과했다.
사부가 알면 기절초풍할 터.
자기 딴엔 어렵게 만들었을 텐데 제자가 이리 쉽게 통과하니 화가 날 거다.
나중에 무극자 사부를 놀려 줄 걸 생각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르릉-
또다시 철문이 열렸다.
어두운 통로를 지나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호수였다.
환영진이 펼쳐져 있다지만 실제와 같은 모습을 연상케 했다.
“여긴 또 어디야?”
이준이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그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왔느냐.”
그는 음성이 들려오는 곳을 바라봤다.
“누구… 어!?”
“허허. 뭘 그리 놀라느냐?”
“사, 사부님?”
이준이 바라본 곳에는 무극자 사부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긴 백발을 동여맨 노인.
소싯적 많은 여자를 울렸을 법한 얼굴.
하얀 장포를 입은 게 꼭 신선 같았다.
“사, 사부님이 왜 여기에 계세요?”
“널 오랫동안 기다렸느니라.”
“마지막 관문이 그럼 사부님이세요? 아니죠?”
“맞느니라.”
“헐.”
이준이 입을 떡 벌렸다.
처음 무극자 사부를 봤을 때 그부터 살폈지만,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보이는 건 안개.
모든 게 가려져 있는 뿌연 안개였다.
“제자야.”
“네… 네!?”
무극자 사부의 음성에 이준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라.”
“무슨 말씀이세요?”
“나를 대적하려면 적어도 혼원신공이 12성 대성을 이루어야 할 터. 너는 10성밖에 되지 않았구나.”
“그러면 세 번째 관문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도전을 못 하는 거지.”
“살짝이라도 해 보면….”
이준은 무극자 사부를 보며 말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덤빌 엄두가 안 났다.
필패.
처참히 깨지는 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분이 내 사부구나…’
위대해 보였다.
싸우기도 전에 사람의 의지를 꺾어 버리는 위엄.
이준의 눈엔 너무 멋있었다.
“혼원신공이 12성 경지에 이르면 오거라. 많이는 못 기다리느니라.”
“계속 이곳에 계시게요?”
“옛날에도 말했지만, 언제까지 네 옆에 있을 순 없느니라. 무엇보다 네가 관문에 든 이상 사부에게도 시간이 없어.”
“…시간이 없다는 말씀은… 이제 제 곁에서 사라진다는 말씀이세요?”
“오랜 시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관문에 안 들걸 그랬어요.”
이준이 시무룩해 하자 무극자 사부가 짓궂게 말했다.
“사부가 그리 좋으냐.”
“아니거든요. 놀릴 사람 없어서 그래요.”
“사부가 없다고 외로워하지 말거라. 네게도 좋은 인연들이 있지 않느냐.”
“그래도… 제게는 사부가…”
“뭐라고? 안 들린다. 크게 말하거라.”
“됐습니다. 저 갈래요.”
이준이 몸을 돌렸다.
왔던 길로 돌아가려는 모양.
무극자는 이준의 등에 대고 말했다.
“사부가 옆에 없어도 언제나 웃거라. 그게 네 모습이니라.”
“알았어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최대한 빨리 올게요.”
“오냐.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사신전을 나온 이준은 혹시 몰라 무극자를 불러 보았지만.
“사부님.”
사부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 대신 전화가 울렸다.
폰 액정엔 한민성 이사장이란 이름이 떠 있었다.
“여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