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4화
사람들을 피해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갔다.
근처 산에 도착해서 혼원신공으로 살기를 제어했다.
[혼원문에 들어가야겠다.]
“네.”
이준도 심각성을 깨달았다.
자신이 있는 곳 주변, 파랗게 돋아난 새싹이 메말라 비틀어지고 있었다.
오직 살기로 인해서 생긴 결과였다.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혈신의 지도를 꺼냈다.
[혈신의 지도(개방)]
등급: SSS
난이도: SSS
설명: 파천혈신이 제자들과 등을 지고 은거한 장소를 가리키는 지도입니다. 그곳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로 1인 전승 문파인 혼원문을 만들었습니다. 혼원문에 출입할 수 있는 자는 딱 한 명. 혼원신공을 9성까지 익힌 제자여야만 가능합니다. 만약 혼원문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파천혈신. 즉 무극자의 모든 진전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효과: 혼원문 출입 열쇠.
혼원신공이 9성이 되고 혈신의 지도를 꺼내자 메시지와 함께 새로운 홀로그램이 떴다.
[혈신의 지도가 활성화되었습니다.]
혼원문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는 내비게이션이었다.
이준은 손을 움직여 최종 목적지가 어딘지 찾았다.
“강원도 설악산!”
팟-
내비를 따라 바로 움직였다.
‘중국에서 돌아가신 게 아니었네요.’
[제깟 놈들이 내 뒤통수를 친다고 죽을 것 같으냐. 그저 죽은 척 해 준 것이니라.]
‘그리고 혼원문을 창시한 거다?’
[그렇지. 내 깨달음을 온전히 담아 놓은 곳이다.]
이준은 피식 웃으며 앞으로 쭉 뻗어 나갔다.
무극군림보를 사용하니 공간이 수시로 바뀌었다.
그의 신형은 상위 각성자도 모를 만큼 빨랐다.
“억!?”
그러다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멈춰 섰다.
[왜 그러느냐?]
“제일 중요한 걸 빠트렸어요.”
[무엇인데?]
“가문의 이름이요.”
[후우우. 제자야. 전화로 전해도 되지 않느냐.]
이준의 얼빠진 말에 무극자 사부가 참을 인을 새기며 말했다.
천살성과 동화하고 성격이 바뀐 줄 알았건만.
어째 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살성이 되는 것보다 낫긴 하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사가 빠진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이중성격이랄까.
어떤 이유때문에 성격이 바뀌는지 알고 있는 무극자였다.
천살성과 이준의 성격 차이 때문.
천살성의 성격은 냉소적인 반면 이준은 해맑았다.
극명하게 갈린 두 개의 성격을 지니게 됐으니.
간혹 천살성의 냉소적인 성격이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엉뚱할 때도 있고 말이다.
“전화가 있었지?”
이준은 멈췄던 몸을 다시 움직였다.
[그래. 생각해 둔 가문 명은 있느냐.]
“제가 작명 센스가 없어서 그냥 혼원가문으로 할까요?”
[가아아알!]
이준의 뇌가 흔들렸다.
무극자 사부의 일갈은 그 어느 때보다 컸다.
9성의 혼원신공을 지니고 있으며 현경의 경지에 다다랐건만 무극자 사부의 호통은 견딜 수 없었다.
“윽!”
이준이 머리를 붙잡았다.
“취, 취소입니다.”
[말했지 않느냐. 혼원문은 1인 전승이라고. 제자의 가문이라도 혼원이란 이름을 쓰게 할 순 없다.]
무극자 사부의 음성은 굉장히 단호했다.
사부의 무공은 천무에서 기인한 무공.
그의 심득이 전부 들어가면서 만든 게 혼원신공이었다.
사신수호무인 천무에 뿌리를 두긴 했으나 전혀 다른 무공.
무엇보다 그는 혼원이란 이름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인정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 혼원이란 단어를 쓰게 하고 싶지 않은 그였다.
“아, 알겠어요.”
[다른 이름을 찾아보거라.]
“혼원이란 이름을 많이 아끼시네요.”
[흥. 사람들이 많이 안 쓸수록 가치가 올라가는 이치이니라.]
“그렇담 어떤 이름을 쓰지?”
3개월간 고심해서 내린 결론이 혼원이란 단어를 쓰는 거였다.
무극자 사부의 반대로 인해 다시 생각해야 해서 머리가 아팠다.
이지안도 학교에 갔겠다 신력권가의 이름을 버릴 때가 왔다.
여러 종류의 무기와 무공을 쓸 텐데 권가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할 순 없었다.
[단순하게 수호 가문으로 해라.]
참고로 말하자면 무극자도 작명 센스는 최악이었다.
혼원이란 이름도 몇 년을 고심해서 생각해 낸 단어였다.
그의 무공에 왜 무극이란 이름이 붙었을까?
무극이란 이름에 자부심을 가진 것도 있지만 무공 명을 지을 수 없어서 자신의 명호를 따 만든 것이다.
그걸 알 리 없는 이준이었다.
“오! 단순하면서도 뭔가 있어 보여요.”
[그렇지? 이 사부가 한 작명 하느니라. 끌끌.]
그 사부에 그 제자라고 이준도 무극자 못지않았다.
그 덕분인지 수호 가문이란 이름이 이준의 귀에 선명히 박혔다.
“역시 사부님이십니다.”
[홀홀. 사부는 제자를 가르치라고 있는 것이니라.]
그 사이 강원도 설악산에 도착했다.
3월이지만 아직도 추운 산 정상.
이준은 혈신의 지도를 꺼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 순간 산 정상 한 지점에서 혈신의 지도가 반응했다.
“여긴가?”
혈신의 지도에서 나온 빛이 이준의 몸으로 흡수된 순간 허공에 하얀 게이트가 생겼다.
[들어가거라.]
“예.”
이준이 게이트에 몸을 던지자 설악산에 생겼던 균열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 * *
지잉-
[규격 외 지역인 혼원문에 입장하셨습니다.]
두근두근.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마치 옛날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흥분이 되었다.
이에 혼원신공도 저절로 반응했다.
몸에 흐르던 살기도 안으로 쏙 들어갔다.
“뭐, 뭐 이리 웅장해요?”
[홀홀홀. 이 사부가 생각보다 소탈하지?]
무극자 사부의 말과는 정반대였다.
처음 혈불을 봤던 레드존 게이트인 극락사보다 훨씬 더 웅장하달까.
눈에 보이는 전각은 굉장히 컸다.
갓 지어진 것처럼 깨끗했으며 하나하나가 국보로 정해질 만큼 장인의 손길이 담겨 있는 듯 보였다.
무엇보다 광활할 정도로 넓은 대지에 입이 떡 벌어졌다.
“사부님.”
[말하거라.]
“1인 전승 문파라면서요.”
[그렇지?]
“그런데 이 무식한 크기는 뭐예요? 이 넓은 곳을 혼자 쓰려고 만든 거라고요?”
[명색에 고금제일인이 만든 문파인데 당연히 이 정도의 크기는 되어야지. 나보다 약한 문파의 장문인조차 산 하나 크기의 문파는 가지고 있느니라. 내가 보기엔 많이 작은 크기인데 네겐 큰 것이냐?]
“관리하기 엄청 빡셀 것 같은데….”
경공을 쓰지 않고 걸어 다닌다면 전각 사이에 이동 시간만 20분은 걸릴 것 같았다.
괜히 무식하게 넓다고 표현했을까.
혼원문을 보자 압도된 게 가식이 아니었다.
“사부님의 스케일은 정말 제 상상을 뛰어넘네요.”
[네 배포가 아직 작은 것이니라.]
“그보다 저 뭐부터 해요?”
[우선 조사전에 들거라.]
“조사전이 어딘데요?”
[제일 큰 전각 뒤편에 있다.]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곤 걸음을 옮겼다.
혼원문에 다가갈수록 건물의 웅장함에 압도되었다.
왕이나 황제가 사는 곳도 이 정도는 아니지 않을까.
제일 큰 전각을 지나 뒤편에 있는 작은 전각으로 갔다.
“헉!”
[왜 그러느냐?]
“저 잘생긴 사람은 누구예요?”
족자가 여러 개 걸려 있었다.
그중 젊은 남자는 이준이 봐도 잘생겼다.
[어떠냐?]
“설마… 사부님은 아니시죠?”
[네 사부이니라. 홀홀.]
“미친!”
이준은 저도 모르게 욕을 하고 말았다.
무극자 사부는 자기가 항상 잘생겼다고 입이 마르도록 말했다.
하지만 믿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허풍을 떨 수 있었으니까.
무극자 사부도 그중 한 명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볼 수 없기에 제자에게 하는 뻥이라 여겼다.
그런데 웬걸.
정말로 잘생겼다.
그 어떤 여자가 봐도 한눈에 반할 만큼 말이다.
[지금 사부에게 욕지거리를 한 것이렸다?]
“너, 너무 잘생기셔서 저도 모르게 실수했어요.”
[그래? 큼큼. 그런 실수라면 한 번 봐주겠다. 너무 당황하면 그럴 수도 있느니라.]
굉장히 관대해진 무극자 사부였다.
“혹시 그림 그리는 사람 협박한 건 아니죠?”
[네 심정 잘 안다. 자기가 제일 잘생겼다고 여겼겠지.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의기양양 살다가 벽에 부딪힌 거겠지. 그것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산을 마주한 느낌일 테니. 네 맘 잘 안다.]
뭐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전 같았으면 재수 없다고 속으로 말했겠지만, 실제를 보니 저 재수 없는 게 사실이라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사부의 얼굴은 그림으로 다 담아지지 않았다.
“열아홉을 살면서 제일 충격적인 날이네요.”
[다 이해하느니라.]
“사부님 옆에 있는 이분은 누구세요?”
[내 사부님이자 네겐 태사부가 되시는 천극자이시다.]
“와, 이분도 한 얼굴 하시네요. 설마 얼굴 보고 뽑은 건 아니죠?”
무극자 사부 못지않게 태사부인 천극자도 굉장한 미남이었다.
[끌끌끌. 우연히도 그리되었구나.]
사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에게 얼굴을 보여 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은 듯싶었다.
“기분이 안 좋아졌네요. 인사나 하고 나가야겠어요.”
이준은 태사부인 천극자부터 구배지례를 올렸다.
무극자 사부의 제자가 되고 정식으로 올리는 인사였다.
“제자 이준이 인사드립니다.”
일 배, 이 배, 삼 배, 구 배.
모든 인사를 마치고 앉자 새로운 메시지가 올라왔다.
* * *
그 무렵.
무사고의 전교생이 체육관 강당에 모여 있었다.
웅성웅성.
학생들은 한 여자아이를 곁눈질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쟤가 신력권가의 이지안이야?”
“벌써부터 설화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면서?”
“무사중 졸업도 수석으로 하고 무사고 입학도 수석이라던데.”
“천재 티가 물씬 풍긴다.”
2, 3학년들의 관심은 온통 이지안에게 가 있었다.
그녀의 뒷배경이 신력권가이기도 했고, 원체 실력이 좋다고 소문이 나 있어 주목받은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주목이 싫었다.
낯가림이 심한 성격을 가진 그녀.
무극대와 같이 생활해서 괜찮을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
무극대나 신력권가의 각성자들은 많이 봐서 면역됐던 터.
학교 학생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 불편했다.
‘괜찮아. 자신감을 가져.’
이지안이 심호흡을 했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자고 속으로 되뇌었다.
학교 이사장과 선생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눈을 감고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있을 때.
마침내 이사장과 선생들이 강당으로 들어왔다.
각자 흩어져 있던 학생들이 줄을 맞춰 섰다.
강당 단상에 오른 한민성이 마이크를 대고 말했다.
“반갑습니다. 전 무사고의 이사장인 한민성이라 합니다.”
그의 말에 학생들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그가 손을 들자 박수가 멈추었다.
“올해는 새로운 학생들이 많이 왔군요. 각 가문의 학생들은 기본이고 무맹의 신입생과 전학생, 그리고 사마고에서 온 전학생까지 보입니다.”
원래라면 각 가문의 신입생과 무맹의 신입생밖에 받지 않았다.
무사고는 거의 모든 인원이 가문 연맹회 소속이었으니까.
졸업 전까지 가문 연맹회에 스카웃 되지 않은 학생들만 무맹으로 빠지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특이하게도 전학생들이 많이 왔다.
오대 가문이 제안한 부속 대학을 설립하기 위한 시도.
가문 연맹회는 물론 대한민국에 속한 각성자라면 누구라도 지원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생각 중이었다.
그 시도가 바로 무맹과 사마련 소속 학생들을 무사고에서 먼저 받는 거였다.
“자, 그럼 반 배정을 시작하겠습니다. 호명된 학생들은 선생이 서 있는 곳으로 가서 줄을 서면 됩니다.”
선생들이 단상에서 내려와 일렬로 섰다.
그리고 자신의 반 학생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특별반을 맡은 이준을 대신한 차경진도 학생들의 이름을 불렀다.
“3학년 한지유, 박은비, 서혜지, 남선호, 2학년 허수, 정예은 1학년 이지안 제 쪽으로 오세요.”
특별반 인원은 변함이 없었다.
딱 한 명 이지안만이 추가됐을 뿐이다.
특별반 아이들은 이미 모여 있었다.
“형님은 졸업 안 하시는 겁니까?”
허수가 진경수와 정예나를 보며 말했다.
“선생님께서 언제 돌아오실지 모르는데 내가 남아서 특별반을 지켜야지. 안 그래 예나야?”
“나도 할아버지가 유급해서라도 남아 있으래.”
“아, 그래서 3학년을 1년 더 다니시는 겁니까?”
“그렇지?”
“전 형님과 누님을 또 봐서 좋습니다.”
허수의 사회생활에 진경수와 정예나가 흡족해했다.
“짜식. 넉살이 많이 늘었어.”
진경수가 허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칭찬을 하고 있을 때 이지안이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특별반 아이들의 눈이 이지안에게로 쏟아졌다.
정확히는 그녀의 등에 메인 긴 헝겊에 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