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 외전-
한 청년이 동정호가 내려다보이는 악양루에서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설극.
비무행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설극의 입가에는 눈부시게 빛나는 미소가 지어졌다.
“크으으. 술맛 한 번 기가 막히구나.”
중원 무림에 와서 꼭 해보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바로 악양루에 올라 동정호를 보며 술을 마시는 일이었다.
오늘 그 소원을 이뤘다.
“사부님께서도 동정호를 보셨으면 좋아하셨을 텐데. 잘 계시는지 모르겠어.”
설극은 고국에 있는 사부를 떠올렸다.
속세를 떠나 산에만 박혀 있지만 태산 같은 분.
왕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분이 자신의 사부였다.
그런 사부가 자신에게 더 넓은 경험을 쌓으라며 고려를 떠나 중원의 무림으로 향하라고 했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지만, 팔랑귀가 발동해버렸다.
세상에는 예쁜 처자들이 널려 있다나.
여기서 혹했다.
산속에만 처박혀 있으니 몸이 좀 쑤시는 건 사실이다.
밖으로 나가 꿈을 펼쳐 보고 싶지만 홀로 있는 사부가 걱정이었다.
그래서 계속 옆에 있었는데, 때가 되었다고 나가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는 겸 견문도 넓히고 마음에 든 처자를 만들어 오라고 한 것이다.
자신에겐 사문의 명맥을 이을 사명이 있다느니 말이다.
마지 못한 척 중원 무림으로 비무행을 떠났다.
고국을 떠난 지도 어언 1년.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성과를 이뤄냈다.
요령의 최고수인 신검 모용인을 이기고 하북의 도군 팽오성을 이겼다.
둘을 시작으로 산서, 청해, 사천의 고수를 순서대로 이기고 이곳 호남에까지 이르게 됐다.
“이제 남은 곳은 천마신교와 무림맹뿐인가?”
마도학사와 무황.
이 두 사람이 중원 무림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에게 폭풍전야 전 마지막 술자리였다.
설극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곤 다음 행선지를 생각했다.
“이곳과 가까운 곳은 하남이니 무황부터 만나볼까?”
그러던 그때였다.
“응?”
악양루 밑에서 은밀한 기척이 느껴졌다.
술잔을 내리고 난간으로 가자 한 여자가 고양이처럼 아주 조심히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여자는 누군가에게 쫓기는지 계속 뒤를 돌아봤다.
“도망치려면 옷부터 검은 무복으로 갈아입고 움직이지. 나 잡아달라고 하얀 비단옷을 입나?”
설극은 수많은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관심을 껐다.
자리로 다시 한 모금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찰나.
여자가 난간 위로 불쑥 나타났다.
설극은 곧바로 인상을 찌푸리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여자의 얼굴 때문.
1년 동안 중원을 돌아다녔지만 눈앞의 여자만큼 청초하고 예쁜 사람은 없었다.
그야말로 경국지색.
삼국지의 초선이나 서시가 환생한 것 같았다.
그 아리따운 미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님 저 좀 숨겨주세요.”
처음보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숨겨달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그녀를 쫓고 있는 이들이 근처까지 왔다는 걸 느꼈다.
“이 탁자 밑에 숨으시오. 뒤는 내가 알아서 하리다.”
설극을 처음 봤으면서 그녀의 눈은 신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음식이 차려진 탁자의 천을 걷으며 안으로 숨어들었다.
다행히 탁자의 천이 길어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설극은 태연스럽게 홀로 술을 따라 마시는데.
“이쪽으로 가신 게 확실하냐?”
“그렇습니다. 3층에 추종향의 냄새가 납니다.”
“어서 찾아라! 꼭 찾아서 데려가야 한다. 아니면 모두 죽은 목숨이야.”
“존명!”
설극이 있는 곳으로 병장기를 찬 여성들이 올라왔다.
그는 앉은 자세 그대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의 휴식인데 불청객의 난입은 별로 달갑지 않소만.”
설극의 목소리엔 은은한 내공이 담겨 있었다.
“잠시 실례하겠어요.”
무리의 우두머리, 옥난향이 포권을 취하며 조심스럽게 나섰다.
‘심상치 않은 기도야…’
그녀는 자신이 모시는 주인을 따라다니며 많은 무인을 보았지만 모두 성에 차지 않았다.
강하다는 무인 전부가 주인보다 밑에 있었으니까.
중원에 이름이 널리 퍼진 고수를 봤을 때도 똑같은 느낌이었다.
후기지수를 볼 때는 어떤가?
코웃음이 쳐질 정도였다.
그녀가 본 주인은 천하제일을 논하는 분이었으니까.
한데 눈앞의 청년은 어떤가.
힘을 숨기지 않고 과감히 표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힘이 청년의 진면목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이유 때문인지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분명 불청객은 별로라고 말했을텐데.”
탁.
설극이 술잔을 내리고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서 하얀색 안광이 쏟아졌다.
“윽!”
“억!”
여자들이 신음을 토해냈다.
고작 눈빛만을 마주했는데 살이 에일듯한 기세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옥난향이 아니었다.
“조금만… 찾아보고 나가… 겠습니다.”
힘겹게 말한 그녀에게 설극이 대답했다.
“당신이라면 이 3층에 나 말고 아무도 없다는 걸 알 텐데. 지금 날 업신 여기는 것이오?”
설극이 자리에서 일어나 똑바로 서자.
화아악-
그의 몸에서 폭풍 같은 기세가 흘러나왔다.
압도적인 위압감.
고작 이립(30세)밖에 되지 않은 자에게서 절대자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돌아가시오. 마지막 경고요.”
여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상관인 옥난향이 아무 말도 없었기에 움직이지 못했다.
“여긴 어딜 가나 똑같군. 한번 말하면 바로 안 들어.”
설극이 옆으로 팔을 뻗자 벽에 세워져 있던 창이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의 손에 무기가 들리니 또 다시 기세가 변했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패기.
여자들의 몸에 닭살이 올라올 만큼 소름이 돋았다.
“…돌아… 갈게요.”
옥난향의 말에 설극이 기세를 갈무리했다.
주변을 압박하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극한의 내공 조절.
그녀는 설극을 보며 한 차례 더 놀랐다.
“혹, 이곳에 하얀 비단옷을 입은 여자가 나타난다면 저희에게 연락을 주실 수 있겠어요?”
“어려운 일은 아니오. 그러리다.”
그녀는 연락용 폭죽을 바닥에 조심히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결례를 범했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이명을 알 수 있을까요?”
“당신이 관심 가질 만한 이명과 이름은 없소.”
“괜한 질문을 했군요. 그럼.”
여자는 몸을 돌리면서 설극의 창에 메인 수실을 뚫어지게 봤다.
그리곤 마지 못해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를 따르는 수하들이 물었다.
“단주가 물러나는 건 처음 봅니다.”
“우리가 상대할 자가 아니야. 내 예상으로는 저자… 요즘 유명한 무신이다.”
“무, 무신!”
수하의 입에서 뾰족한 비명이 나왔다.
최근 1년간 제일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른 사람이 바로 무신이었다.
구대문파의 문주를 비롯해서 오대세가의 가주까지.
전부 찾아서 꺾은 인물.
심지어 치욕을 되갚아 주겠다고 떼로 덤볐다가 문파가 풍비박산 난 곳도 있었다.
정정당당한 비무였고 공증인도 있어서 그를 정파의 공적으로도 몰지 못했다.
또한 얼굴은 항상 가리고 다녔기에 그가 몇 살인지 아무도 몰랐다.
십대고수들을 연달아 꺾은 무신.
세인들은 그가 노회한 고수가 아닐까 추측만이 나돌았다.
무엇보다 아주 신출귀몰했다.
그가 나타난 지 고작 1년인데 중원 전역을 돌아다닐 만큼 빨랐다.
무엇보다 무신을 가리키는 한 가지.
창에 특이한 수실을 매달고 다닌다는 것.
이 하나로 저자가 무신이라고 확신한 그녀였다.
‘무신이… 저렇게 젊은 자인지 몰랐어. 아차, 이럴 시간이.’
그녀는 수하들과 악약루를 빠져나갔다.
한편 설극이 창을 내려놓고 탁자의 천을 올렸다.
“소저. 이제 나오셔도 되오.”
탁자 아래에 숨어 있던 여자, 주경아가 엉금엉금 기어 나와 바닥에 털썩 앉았다.
“하아아아. 살았다.”
숨을 푹 쉬며 안도를 드러낸 주경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왔다.
“식사라도 하시겠소?”
“그래도 될까요?”
“손도 안 댄 음식이 많소. 편히 드시오.”
“구해주신 것도 감사한데… 이래도 될지 모르겠네요.”
청초하고 조신할 것같이 생긴 이미지와는 달리 아주 활발한 성격을 가진 그녀였다.
현재 그녀의 눈은 음식에 꽂혀 있었다.
침을 꼴깍 삼키는 게 설극의 귀에 들릴 만큼 컸다.
“혼자 동정호를 구경하기 적적했는데, 같이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겠소?”
“공짜로 음식을 얻어먹은 대가로 제가 공자의 이야기 벗이 되어 드릴게요.”
“좋소이다.”
그렇게 설극과 주경아는 술과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2시간 후.
처음 동정호를 구경한 것부터 그동안 살아왔던 이야기까지.
서로 닮은 구석도 많았다.
설극은 산속에, 주경아는 가문에.
이 나이 먹도록 한 번도 세상 구경을 못 했던 것까지 모두 닮아 있었다.
다른 게 있다면 설극은 자유가 있었고, 그녀에게는 자유가 없던 것.
그래서일까.
얼마 만나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설극은 무슨 용기가 났는지.
“소저.”
“말씀하세요.”
“새장 밖으로 나가겠다면 내가 도와주겠소.”
설극의 제안에 주경아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한 그녀가 술병을 통째로 들어 마셨다.
“소, 소저! 싫으면 거절해도….”
“좋아요. 절 새장 밖으로 인도해주시겠어요?”
그녀가 얼굴이 빨개진 채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가 보통의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 마화단의 단주가.
오직 그녀가 모시는 주인에게만 허리를 굽혔다.
오늘 처음 순순히 뒤로 물러나기도 했고.
악양루 3층에 올랐을 때부터 강한 사람이 이곳에 있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으리다.”
“이건 공자님께 미리 드리는 제 보답이에요.”
주경아가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설극에게로 팔을 뻗었다.
“내, 내가 먹겠소.”
“소녀가 주는 게 싫으신 거예요?”
“그, 그건 아니오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
경국지색의 미녀가 반찬을 집어 주는데 누가 마다하겠나.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이라 그저 당황한 것뿐이다.
그는 표정을 고쳐잡고 심호흡을 한 뒤 그녀가 내민 반찬을 받아먹었다.
* * *
중원을 여행한지 1년.
설극과 주경아는 많은 곳을 둘러보았다.
두 사람의 외모가 워낙 튀긴 해서 얼굴을 가려야 했지만, 여행 내내 웃음꽃이 가득했다.
그들은 요녕의 한 객잔에 도착해 방을 잡았다.
“객잔 뒤에 붙어 있는 독채입니다요.”
“좋군. 이걸로 주시오. 일주일치 식사까지 준비해주시오.”
설극은 금화를 꺼내 점소이에게 주었다.
무려 금 한냥이다.
독채라지만 한 달은 족히 지낼 수 있는 돈이었다.
“최고급들로 모두 준비하겠습니다요.”
“그리고 전서를 보내고 싶은데.”
“요녕전장을 이용하시면 될겁니다요. 위치는 객잔을 나가셔서 쭉 북문 쪽으로 가시면 보일 겁니다.”
“고맙소.”
“그럼 전 이만.”
점소이가 나갔다.
설극과 주경아는 짐을 풀었다.
“경아. 요녕전장에 좀 갔다 올게.”
“사부님께 소식을 전하시는 거죠?”
“응. 우리 두 사람 이야기도 했더니 경아를 데려오라고 난리셔.”
“저도 가가의 사부님을 빨리 뵙고 싶어요.”
“이곳만 지나면 곧 고려야. 지금까지 강행군했으니 이곳에서 좀 쉬고 넘어가자. 전장에 서신만 전하고 올 테니 잠깐만 기다려.”
“네. 천천히 하고 오세요.”
설극이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주경아는 손수건에 자수를 새겼다.
그녀가 집중하며 자수를 새기고 있는데 꽤 많은 수의 기감이 잡혔다.
‘인기척?’
그녀는 손수건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검을 잡아 조용히 꺼냈다.
스르릉-
검이 검집에서 다 꺼내지자 문이 벌컥 열렸다.
주경아는 나타난 이에게 지체없이 살초를 휘둘렀다.
“아가씨, 저예요.”
그녀의 검이 여자의 목덜미에서 멈춰졌다.
“옥 단주?”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동정호에서 주경아를 쫓은 여자였다.
옥난향, 마화단이란 단주였다.
“아가씨를 찾는데, 너무 오래 걸렸어요. 죄송합니다.”
“돌아가세요. 저 안 따라갈 거예요.”
“가셔야 합니다.”
“싫어요.”
“아가씨께서 1년 동안 사라지신 바람에 지존의 입장이 난처해지셨습니다.”
검을 쥔 주경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 단체를 이끄는 지존.
많은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존재였다.
정파와는 대립적인 관계에 있지만 사이를 회복하려고 끊임없이 소통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자신이 희생되었다.
무림 맹주 아들의 약혼녀로서.
“거부할 수는 없겠죠?”
“죄송합니다.”
“그러면 제게 잠깐만 시간을 주세요.”
“1분 이상은 불가능해요.”
“알았어요.”
주경아는 붓을 들어 손수건에 무언갈 휘갈기곤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문밖에서 방을 돌아보았다.
‘가가. 그동안 즐거웠어요. 여기까지가 한계인 가봐요.’
주경아는 아쉬운 표정을 뒤로한 채 옥난향과 함께 객잔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