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9화
“태상가주를 보호하라!”
만천단은 부상당한 괴개를 둘러쌌다.
“이깟 게 뭐라고, 됐다.”
정심호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이 타들어 갔다.
내기가 잘 이어지지 않았으나 꾸역꾸역 내공을 담아 암기를 뿌렸다.
한 명이라도 더 잡아야 했으니까.
아직은 방어진과 방벽이 버티고 있으나 언제 깨질지 모르는 상황.
정문이 뚫리면 쉘터에 숨은 학생들이 위험했다.
암기가 동나자 장력을 발출하려고 두 손에 내기를 모으는데.
“큭!”
중간에 내기가 끊어져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옆구리에서 바늘로 쿡쿡 찌르는 통증이 몰려왔다.
“태상가주!”
“무리입니다. 방벽 너머로 물러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대로면 태상가주의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만천단의 만류에도 정심호는 꿋꿋이 허리를 세웠다.
“나, 암독이야. 여기서 무너지지 않아.”
정심호가 굉폭뢰를 집어 들었다.
위력이 워낙 강력해서 자칫 방어진이 망가질 수도 있는 무기.
그 때문에 사용하길 자제했지만, 이젠 어쩔 수 없었다.
천외천과 몬스터의 숫자는 아직도 많았다.
적의 숫자를 더 줄여야 했다.
“크흡!”
내기를 억지로 끌어올리는데 그럴 때마다 고통이 밀려왔다.
꾹 참고 굉폭뢰를 집어던지려는 그때 허수가 나타났다.
“괴개를 뵙습니다.”
“무사고 학생?”
“예. 이준 선생님 아래에 있는 허수라 합니다.”
“내 손녀들과 같은 반이겠군. 헌데 여긴 왜 왔느냐. 위험하니 쉘터로 돌아가거라.”
“저도 싸움에 합류할까 합니다.”
“흠….”
평소였다면 버럭 소리쳤을 정심호였으나 허수의 기도를 느꼈다.
어린 것이 상당히 강했다.
아니, 상당한 정도가 아니다.
나이가 많아 봤자 고3.
그런데 AA급 각성자의 기도를 지니고 있었다.
“괴물이긴 한데, 여기서 죽기에는 아까워.”
“죽으러 온 게 아닙니다. 괴개 님을 도와 적을 물리치러 나온 겁니다.”
허수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넘쳤다.
쿵!
이 너머에선 정문을 둘러싼 적이 방벽을 무너트리려고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앗, 이러고 계실 게 아니라 빨리 상처를 치료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한 번 상처를 봐도 될까요?”
“이 아이는 누구냐?”
“신의의 손녀입니다.”
“이의태가 신력으로 돌아왔어?”
“네. 전 그럼 나가서 시간 좀 끌어 보겠습니다.”
허수가 방벽 밖으로 나갔다.
적이 바글바글 했다.
게이트에서 몬스터를 상대하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후우우우. 할 수 있다.”
허수가 심호흡했다.
그리고는 참마도를 꽉 붙잡았다.
이준이 선물해 준 아티팩트.
허수는 참마도를 믿고 적에게 달려들었다.
푸확-
거대한 도가 허공을 가르며 몬스터를 단박에 갈라 버렸다.
패력진권의 팔을 잘라 버린 무공.
연환패왕도가 펼쳐졌다.
허수의 도가 반짝였다.
그럴 때마다 몬스터의 몸에 붙은 팔, 다리가 날아갔다.
약한 몬스터가 죽고 그 자리를 채우는 강한 몬스터.
허수의 공격은 전보다 더 강맹해져서 강한 몬스터의 몸도 반으로 나뉘었다.
‘먹힌다.’
건곤미허신공으로 펼치는 연환패왕도.
알맞은 내공이 연환패왕도를 보필하니, 기세가 줄지 않았다.
오히려 더 광폭하게 몰아쳤다.
허수의 도에서 연신 뿜어지는 붉은 아지랑이.
그 아지랑이가 합쳐지더니 도신의 길이가 길어졌다.
굉장히 선명한 도강이었다.
“하앗!”
허수가 만들어 낸 도강은 그대로 적에게 폭사했다.
쾅-
먼지가 일었다.
시야가 가려졌으나 허수의 도는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도강을 거두고 도기를 날렸다.
콰광쾅쾅!
먼지구름을 향해 날아간 도기.
시간이 지날수록 도기에 담긴 힘은 배로 늘어났다.
이게 연환패왕도의 장점이었다.
내기를 끊지 않고 공격을 계속 가한다면 무한대로 강해질 수 있는 도법.
물론 내공이 전부 소모되면 다시 원래의 위력으로 돌아가는 단점도 있었다.
내공이 많은 사람에게나 안성맞춤인 무공이다.
얼마나 도를 휘둘렀을까.
허수의 팔은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할 수 있어!’
단전에 가득하던 내공이 점점 사라졌다.
강한 도기를 뿌린 대신 급속도로 빠져나가는 내공.
현재는 내공 1/3밖에 남지 않았다.
‘아니, 해야만 해!’
느려졌던 허수의 도가 다시 제 속도를 되찾았다.
단전에 있는 내공이란 내공은 싹 다 긁어모아 도기를 만들어 냈다.
그 결과.
“후욱, 후욱….”
방벽 앞에는 몬스터의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섰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죽은 천외천의 인물은 소수라는 점이었다.
* * *
“응급 처치는 끝냈어요.”
“고맙구나.”
이지안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피가 묻은 침을 수건에 닦고는 침통에 넣으려는 찰나.
“컥!”
앞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만천단 인원들이 굴러떨어졌다.
거기에 허수도 포함됐다.
정문 담벼락에 박힌 허수 앞.
도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허수를 향해 검을 긋는 순간!
“읏!”
이지안이 움직여 벽력신장으로 도인의 검을 막았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실전 경험도 적을뿐더러 각성자 등급도 낮았으니까.
잠재력이 높고 또래에 비해 강하긴 했으나 천외천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녀의 손에 펼쳐진 벽력신장의 장력이 검에 의해 서서히 줄어들었다.
“으윽….”
정신을 잃은 허수.
이대로 있다간 둘 다 이 도인에게 죽게 생겼다.
도인은 이 상황을 즐기듯 천천히 검을 내리그었다.
장력이 갈라지고 그녀의 손에 검날이 닿았다.
“흑!”
피부에 파고드는 서슬 퍼런 칼날에 붉은 피가 흘렀다.
더는 버티지 못한 그녀가 포기하려는데 위쪽에서 파육음이 들렸다.
콰직-
도인의 상반신이 사라졌다.
이지안의 머리 위에 나타난 그림자 하나.
파란색 털을 지닌 거대한 몬스터, 파랑이였다.
“크르르르.”
몸집을 키운 파랑이가 검은 화염을 불태우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파랑아!?”
이지안이 파랑이를 올려다보며 이름을 불렀다.
으르렁거리던 파랑이가 혀를 낼름거리면서 피가 나는 그녀의 손을 핥았다.
“준이 오빠가 온 거야?”
“크르.”
파랑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혼자 왔어?”
“크르.”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파랑이였다.
파랑이는 긴 꼬리를 움직여 이지안과 허수를 감쌌다.
폴짝 뛰어 방벽 안으로 들어온 파랑이.
두 사람을 내려 준 후, 앞발로 땅을 여러 번 밟았다.
“여기 있으라고?”
“크르.”
다시 고개를 끄덕인 파랑이가 몸을 돌렸다.
화르륵-
파랑이의 몸에서 뿜어지는 검은 불꽃은 더욱 거세졌다.
“청호?”
“청호는 파란 불꽃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까?”
정심호의 중얼거림에 만천단주가 의문을 표했다.
“그렇긴 하지. 게다가 꼬리도 네 개가 아니고 저 몬스터는 열 개야.”
“블랙급 몬스터의 힘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저 아이를 구해 주는 거지?”
그는 이준이 데리고 있던 조그마한 생명체의 몬스터를 봤다.
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파랑이는 거대화된 상태.
작았을 때는 귀엽고 앙증맞았지만, 거대화한 후로는 모습이 완전히 달랐다.
몬스터란 존재만으로 위압감을 뽐내고 있었다.
정심호는 작았던 파랑이가 현재 이렇게 변했다는 걸 전혀 인지를 못 했다.
“요새 야수공을 익힌 아이들이 많아졌나?”
“창제 때문에 따라 익힌 게 아닐까 사료됩니다.”
“일리 있는 말이야.”
정심호 또한 몬스터 테이밍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몬스터인 청호가 창제의 말을 잘 들었을 때 얼마나 호기심이 갔는지.
싸움만 아니면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 몬스터를 잘 봐 둬.”
“예. 태상가주.”
정심호와 만천단주의 눈은 파랑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으음….”
“정신이 들어요?”
“내가 기절했었어?”
“네. 정문 담벼락에 처박혀서 정신을 잃었어요.”
“아.”
허수가 탄식했다.
적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왜 이준이 쉘터에 가만히 있으라고 한 건지 이유를 알게 됐다.
“그 손은 어떻게 된 거야?”
“다쳤어요.”
“어쩌다가?”
“그냥 넘어졌어요.”
이지안은 허수를 구해 주려다가 다쳤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허수가 미안해할 걸 알기에 어영부영 넘겼다.
“칼에 베인 상천데.”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치고 굉장히 말을 많이 한 상태였다.
한편.
아우우우-
파랑이가 하늘을 향해 울었다.
녀석의 꼬리가 활짝 펴지더니 열 개의 검은 불꽃이 만들어졌다.
“몬스터가 공격하기 전에 죽여!”
“방진도 펼칠 생각을 하게.”
천외천의 도인들은 침착하게 움직였다.
파랑이를 여타 몬스터로 생각했다.
하지만 파랑이는 태생부터가 블랙급 보스 몬스터.
사신수에 버금가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지금 녀석이 펼치는 기술은 암화.
명계의 불씨인 죽음의 불꽃이었다.
열 개의 암화가 제각각 움직였다.
목표는 도인들과 몬스터들.
몇몇 어리석은 도인들은 그 검은 불꽃을 향해 뛰어들었다.
콰아아앙-!
* * *
쉘터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화면이 빛에 감싸였다.
“어떻게 된 일이야?”
“뭔데, 빨리 보여 줘!”
학생들은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방벽이 뚫리면 다음은 자신들인데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화면에 나오는 건 대리만족에 가까웠다.
자신들이 흉내도 내지 못하는 싸움.
화면에 보이는 아군 중 한 명을 자신에게 투영해 몰입했다.
또한 그들이 선보이는 행동 하나하나 머리에 각인시켰다.
경험이 다르니 분명 나중에 자신들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빛이 사라지고 화면이 보였다.
“……!?”
“억!”
“개쩔어.”
학생들과 선생들의 눈이 함지박만 하게 커졌다.
분명 여우형 몬스터가 화염 구체를 날렸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 보이는 장면은 그야말로 얼음 지옥으로 변한 모습이었다.
무너진 빌딩이며 나무, 도로 할 것 없이 전부 얼어붙은 상태.
재밌는 건 그 얼음 지옥 곳곳에 검은 화염이 타오르는 것이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속성이 제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같이 세를 넓혔다.
“아악!”
“바, 발이!”
“사형, 이 불 좀 꺼 주시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천외천 측 진영은 눈 뜨고 보지 못할 참상이 일어난 후였다.
몸에 붙은 암화는 꺼지지 않았으며 이미 얼음 가시에 심장이 찔려 죽은 자도 있었다.
뿐인가.
영향권에 벗어나 있던 이들조차도 몸 한구석이 얼어서 마비가 되었다.
그나마 천외천은 나았다.
파랑이가 존재감을 드러낸 직후부터 줄곧 겁에 질려 있던 몬스터들.
자기보다 높은 등급의 몬스터가 등장하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몬스터가 어찌 저항을 하겠는가.
그저 죽음만을 기다려야 했다.
무사고 쪽으로 온 몬스터는 전부 전멸.
숨을 쉬고 있는 몬스터는 전무했다.
이게 바로 사신수에 버금가는 힘을 가진 파랑이의 위력이었다.
“지금이다! 놈들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공격해.”
정심호가 만천단을 향해 외쳤다.
허수도 참마도를 들고 천외천을 향해 쇄도했다.
이지안도 은근슬쩍 전장에 합류하려는데 파랑이가 말렸다.
“크르.”
“알았어.”
파랑이는 이지안의 옆을 지킨 채 아군이 위험에 빠질 때마다 나서서 피해를 최소화시켰다.
정상이 아닌 천외천이라 그런 걸까.
점점 아군 측으로 기세가 기울어졌다.
게다가!
천외천에게 재앙과도 같은 존재가 나타났다.
“안 늦어서 다행이네. 역시 우리 파랑이는 믿을 만해.”
“크르.”
파랑이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몸집이 서서히 작아지면서 이준의 품에 안겼다.
이지안은 이준이 반가운지 이름을 불렀지만.
“준이 오빠!”
“너 왜 밖에 나와 있어?”
예상과는 달리 그의 음성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