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1화
“저 시체들은 어찌합니까 주군?”
“놔두면 알아서 깔끔히 사라질 거야.”
나고쉬의 실에서 독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공기 중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독 기운.
그 강한 독기가 너저분한 주위를 청소했다.
시체와 살점을 서서히 녹이는 독기.
시간이 지난다면 이곳에 시체가 있었는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깔끔히 없애 줄 것이다.
“이제 처리할게….”
이준이 몸을 돌려 기자들을 보았다.
그들에게 성큼성큼 걸어가서 입을 열었다.
“저와 이 가주의 내기 들으셨죠?”
“예?”
“들었으리라 믿어요.”
그가 기자들을 쓱 훑었다.
평범한 눈빛이었지만 그들은 이준의 눈을 마주친 순간 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숨을 편하게 쉬는 것도 어려웠다.
검제처럼 위압감이 뿜어진 거라면 모를까.
현재 이준의 몸에선 그 어떤 기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일반인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준을 대하는 게 그 어떤 사람보다 힘들었다.
“오늘 듣고 본 것들 그대로 쓰세요. 이 가주가 저에게 내기를 먼저 제안했고, 그 결과 모두 목숨을 잃었다. 만용이 부른 최후. 기사 제목으로 좋지 않습니까?”
이준이 씩 웃었다.
하지만 기자들은 똑같이 미소를 짓지 못했다.
그들은 엄연히 사신혈맹 측에 돈을 받고 모여든 이들.
이준과 신력권가에 대해 안 좋게 쓰려고 한 사람들이었다.
“아닌가요?”
이준의 물음에 기자들이 애써 대답했다.
“조, 좋습니다. 어, 어그로 끌기 적합합니다.”
“사실… 그대로 기사를 내겠습니다.”
“사람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소, 소재군요. 이런 훌륭한 기사 거, 거리를 제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 하.”
기자들은 서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협박을 받은 사람처럼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주군. 기사가 나가면 이곳에 함정이 있다는 사실이 다 알려지는 게 아닙니까? 천외천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되지 않아요?”
김봉팔이 이준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이곳에 함정이 있다는 걸 숨기려고 암상의 인원도 전부 돌려보냈다.
그 때문에 고작 100명의 인원으로 이 함정을 설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사를 내겠다니.
서울 숲에 함정이 있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는 것과 다를 게 뭐가 있겠나.
“생각이 바뀌었어.”
“예?”
“차라리 천외천을 여기로 끌어들이는 게 좋겠다.”
“아니, 그러실 거면 애당초 암상의 인원을 보내시지나 말지. 괜히 개고생을…. 큼큼.”
이준과 눈이 마주친 김봉팔이 헛기침을 했다.
기자들이 있으니 투덜대는 건 그만.
새로 생긴 궁금증을 말했다.
“그런데 기사를 내보낸다 하더라도 천외천이 반응을 할까요? 코웃음 치며 무시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겠는데.”
“오게끔 만들어야지.”
이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얼굴에는 확신이 어려 있었다.
천외천에게 어떤 도발을 하면 그들이 서울 숲으로 달려올지 알기에.
“기자님들.”
“…예?”
“천외천을 상대할 함정이란 문구를 강조하세요.”
“네? 네네.”
기자들은 어느새 메모지와 볼펜을 꺼내 이준의 말을 적고 있었다.
그가 무서운 건 별개.
특종을 준다는데 못 주워 먹는 건 기자를 그만두는 게 나았다.
이건 그냥 특종 거리를 입에 넣어주는 격이었다.
“또 어떤 문구가 필요하십니까?”
한 기자가 용기 내서 말하자 이준이 곧바로 대답했다.
“최대한 천외천을 자극하는 문구로 도배를 했으면 해요.”
“천외천을 자극… 그,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천외천은 누구입니까?”
“아.”
이준이 탄식했다.
15가문 연맹에서 아직 공식 자료가 안 나갔나 보다.
‘곧 기사를 내겠지.’
전 국민을 쉘터로 보내려면 방송을 때릴 터.
먼저 기사를 낸다 해도 손해볼 건 없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준의 입장에서였다.
15가문 연맹회는 달랐다.
뒤처리는 전부 그들의 몫.
문의가 빗발치는 걸 다 버텨야 하는 게 15가문 연맹회였다.
‘뒷수습은 이사장님이 알아서 하지 않을까.’
한민성과 이야기도 나누지 않은 채 이준은 기자들에게 천외천에 대해 설명했다.
꽤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씨세가 가주에게 전혀 들은 바가 없는 기자들.
이준은 그들에게 상세히 설명해 줘야 했다.
“그, 그런 괴물들을 홀로 상대하시려는 건가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이 가주의 말만 믿었습니다.”
“기사를 섰으면 매국노가 될 뻔했어요. 휴우우.”
그의 이야기를 다 들은 기자들의 태도가 변했다.
“제가 기사 기깔나게 뽑아 보겠습니다.”
“저희만 믿어 주세요. 그렇지?”
“아무렴. 창제께서 이 고생을 하시는데 우리가 도와야지.”
“죄송한 마음을 담아 정성껏 기사를 써 보겠습니다.”
기자들은 그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타이핑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그들의 얼굴은 굉장히 의욕적이었다.
“와, 태세 전환 쩌네.”
“기자들 원래 저래요?”
“쟤들 종군 기자들이야. 웬만한 걸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 가주가 대단한 거지.”
“말이 논리적인 건 아닌데 사람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마력이 있단 말이야.”
“오죽하면 우리 사 대주조차 넘어갔을까.”
“그건 인정.”
무극대가 기자들을 보다가 이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묘한 매력을 가진 가주.
저 매력에 푹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었다.
저 사람처럼 말이다.
“헤헤. 역시 주군이십니다. 아주 언변이 제갈량 뺨쳐요.”
“아부가 테구르와 썅벽을 이루네.”
“테구르는 누굽니까? 혹 저를 놔두고 다른 심복을 두시는 건 아니죠? 저 아주 섭섭합니다. 제가 주군 발바닥은 되지 않습니까?”
“발톱 정도로 치자.”
“에엑? 그것밖에 안 돼요? 너무하십니다!”
김봉팔은 이준의 옆에 찰싹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천성이 아부쟁이.
줄 하나는 기깔나게 타는 사람.
촉 하나로 부대주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그게 바로 무극대의 부대주인 김봉팔이었다.
* * *
[사신혈맹과 창제의 충돌. 그 결과는?]
[만용이 부른 최후]
[제 무덤을 파고 관속으로 들어간 사신혈맹.]
[사신혈맹을 전멸시킨 함정의 정체는 무엇인가.]
어제저녁.
비슷한 내용의 기사가 올라왔다.
모두 사신혈맹이 전멸했다는 내용이었다.
-창제 또 일냄?
-사신혈맹은 또 어떤 단체냐?
-이씨세가랑 금룡황가, 대국건설 이하 길드가 합친 곳임.
-근데 왜 또 창제와 부딪힘?
-ㅅㅂ. 기사 좀 읽고 댓글 달아라 븅신아. 동태눈깔이냐
⌞이 새낀 왜 나한테 급발진함?
⌞내용도 모르고 댓글 달아서
⌞그래서 왜 싸운 건데?
⌞이권싸움.
⌞이권이 뭐임?
⌞병먹금하자.
⌞창제의 제안에 사신혈맹이 내기에 응했고 그 결과 전부 뒤짐.
창제의 이야기는 언제나 커뮤니티를 불타오르게 했다.
-내기가 기사에서 말한 함정임?
-ㅇㅇ. 서울숲에 나고쉬의 실로 만든 함정을 통과하면 원하는 걸 사신연맹에 주기로 했데.
-창제와 싸운 것도 아니고 고작 함정에 이 가주랑 황 가주, 오 회장이 전부 죽은 거?
-고작 함정? 창제를 모르는 사람 또 여기에 있네.
⌞222
⌞3333
-여태까지 봐 왔던 창제는 지는 게임 안 함.
-한 번도 창제가 밀렸다는 거 보진 못했지.
그리고 제일 중요한 기사가 아침에 올라왔다.
[천외천. 그들은 누구인가.]
[사신혈맹이 빠진 함정은 제3의 세력 천외천을 상대할 비책.]
[창제의 자신감. 천외천이라도 서울숲에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다.]
-돌았네. 이거 그제 나왔던 창제와 매화무인의 이야기 아니야?
-그 각성자가 천외천이란 단체의 소속이었어?
대가문회의 직후에 떠돈 세 개의 영상 중 하나.
가문연맹회에서 공식적인 보도 자료를 돌리기 전 밑밥을 깔려고 푼 영상이 이준과 매화무인의 싸움 장면이었다.
-매화무인보다 강한 놈들이 지금 한국을 치러 온다고?
-다 튀어야 하는 거 아님?
-쉘터에 사람 꽉 차기 전에 난 출발함.
드디어 천외천이란 이름이 전 국민에게 알려졌다.
이 기사로 인해 15가문 연맹회 측에서도 부랴부랴 공식 자료를 내보냈다.
천외천이 한국에 쳐들어온다는 게 기정사실화가 된 시점.
2차 대공황 때보다 더 심각한 분위기였다.
매화무인의 압도적인 무력.
이미 이 주제로 커뮤니티에서 밤을 새운 사람만 수십만 명은 되었다.
-가문연맹회에서 전국 쉘터를 열기로 합의했다니까 빨리 가자.
-천외천이 얼마나 무섭다고 또 숨어야 됨? 난 안 감.
-가문들이 지켜주겠지.
-나도 그냥 집에 박혀 있을 예정.
꼭 청개구리들이 존재했다.
위험하다고 말하면 그 반대로 하는 이들.
강제로 쉘터에 넣으면 그것대로 트집을 잡은 노답인 사람들이 있었다.
-으휴, 뒤져봐야 정신을 차리지.
-뒤지면 어떻게 정신을 차리냐 그냥 죽으라고 해.
가문연맹회에서 발표한 내용이 맞으면 자기 목숨도 위태로울 판.
남에게 충고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 충고할 시간에 빨리 움직여 쉘터로 가는 게 제일 현명했다.
-궁금한게 있는데 저 함정 기사 내려야 하는 거 아님?
-천외천의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기사 내리게 누가 전화해봐.
천외천을 상대로 준비했다던 함정 기사에 사람들은 더욱 불안감을 느꼈다.
숨기는 것도 모자란데 전 국민이 알게끔 기사 낸 기자를 향해 수많은 욕설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이준의 의도였다.
전국민이 알았으니, 이 기사 또한 반드시 천외천의 귀에 들어갔을 테니까.
* * *
바다 한가운데.
거대한 배 위에 대머리와 학사처럼 생긴 남자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오랜만에 배를 타고 나오는 것 같구만. 안 그런가 사제?”
“80년도 더 지난 것 같습니다.”
“왜 전용기를 타고 안 가는지 안 물어보는가?”
“사형께서도 다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요.”
“자네의 머리를 식힐 생각이었네. 비행기를 타고 가면 금방이지만 자네가 이성을 찾을 만한 시간은 없었겠지.”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무어 있겠나.”
대머리 남자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사매가 죽었네. 자네마저 잃을 수 없음이야.”
“사형….”
“그것보다 기사는 보았는가?”
“보았습니다.”
“창제가 우리를 서울숲이란 곳으로 유인하려는 모양이네.”
자신들의 자존심을 깔아뭉개는 기사.
너무 노골적이었다.
마치 발끈하며 바로 서울 숲으로 달려오게 하려는 듯이 말이다.
“그쪽으로 바로 가시는 겁니까?”
“생각 중이네. 우리에겐 복수 말고도 할 일이 있어.”
대머리 남자와 학사풍의 남자.
일선과 이선의 본래 임무는 따로 있었다.
파천혈신의 기보를 찾는 것.
일보 마겁.
이보 청룡무의.
삼보 파천반지.
사보 수호혼.
이 네 가지를 찾아서 인주에게 가져다주는 거다.
마겁의 행방은 알고 있지만, 나머지는 소식이 없었다.
그나마 최근에서야 청룡무의의 소식을 알게 되었는데.
“마침 청룡무의도 마겁과 같이 한국에 있다고 하네.”
그 장소가 한국이었다.
마겁은 창제가 가졌고 청룡무의는 아직 아무도 얻지 못한 것 같았다.
“난 자네가 복수한다고 하면 말리지 않겠네. 다만, 이성을 가지고 행동했으면 좋겠어. 창제란 아이에게 어떤 고통을 주어야 괴로워할지, 어느 정도 해야 사매의 한이 풀릴지를 말이야.”
일선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자애로운 얼굴과는 달리 말투에는 짙은 살기가 맺혀 있었다.
스님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강한 살기였다.
“난 말이네. 청룡무의를 얻을 것이네. 그리고 그 기보로 창제의 나라를 피로 물들일 것이야. 노예보다 못한 존재로 만들어, 죽을 때까지 부려 먹을 생각인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일선이 흔쾌히 이선을 따라온 이유였다.
파천혈신의 기보를 하나라도 얻으면 현경을 넘어설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왔다.
현경은 벽 하나하나가 엄청난 고난의 연속.
그 벽을 기보가 뚫어서 막강한 힘을 준다고 하니 그 어떤 무림인이 탐을 내지 않겠는가.
속세의 물건을 탐하면 안 되는 스님조차 탐욕에 물들게 하는 게 파천혈신의 기보였다.
“인주께서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난 사매의 한이 풀릴 만한 복수를 하고 싶네. 인주가 어떻든 상관치 않을 생각이야.”
“음….”
“자네는 자네 뜻대로 하게나. 난 이미 마음을 먹었다네.”
일선이 눈을 감았다.
어찌 보면 역심을 품은 그였다.
이선이 그와 반대의 생각을 한다면 뒤에서 공격해 제압하려 할 터.
일선은 이선의 행동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사형을 따르겠습니다.”
“날 믿어 줘서 고맙네. 꼭 사매의 복수를 합세나.”